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마더...무서워서 눈을 감다...^^;;

  • 등록일
    2009/06/02 00:42
  • 수정일
    2009/06/02 00:42

봉준호 감독의 [마더]를 봤다.

 

최근 아니 올해 들어서 작정하고 영화보러가기도 처음일 뿐 아니라

최근에는 딱히 영화를 보고픈 맘이 들지 않았었는데

혜린의 보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혹해서 봤다....^^;;

 

아~~~~아~~~~ 소름돋고 무섭고....심장이 벌렁벌렁이다....^^;;

 

역쉬.....^^;;....영화는 무시무시한 힘을 지녔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 봤다.

아 !!  뭐라고 해야 하나.....?.....머리가 온통 이미지들의 흔들림에 사족을 못쓰고 있다...^^;;

 

본다라는 것

시선이라는 것

시선에 갇혀사는 사람들과

그 시선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사람들...

그 시선의 조작과 그 엄청난 권력애(?)...아니 삶을 언제나 재구성해버리는 놀라운 치유력이란...^^;;

 

이 영화

[마더]라는 영화

완전히 내 맘대로 해석해 버려도 전혀 미안하지 않은

진짜로 내 맘대로 보고 싶은 영화............^^;;

간만에 만난 너무 엄청난 영화랄까...?....^^;;

 

 누군가 진하게 술한잔 하면서 이야기 해보고 싶은 영화였다....ㅎㅎ

 

왜 혜린이 영화보고나서 이야기 해보자고 했는지....

나도 너무너무 이야기해보고픈 영화다....

 

영화본지 20분만에

블러그 질을 해서인지

너무 흥분하여 미치겠다는.....^^;;

 

내일이라도 차분이 생각해 보고

간만에 영화리뷰라도 써보고 싶다는.....크크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불의가 합법화되면 걷어차라....!!....[단스]를 보고

  • 등록일
    2005/04/02 00:20
  • 수정일
    2005/04/02 00:20


 

언젠가 이야기는 들었는데

기회도 달지 않았었고

한동안 이런 류의 영화들을 감상할 마땅한 통로도 없었기에

그저 아!! 이런 영화들이 있었지...하는 식으로 넘어 갔었다.

 

그러다 며칠 전 우연히 눈에 들어 온 영화가 [단스]다.

 

19세기말 벨기에에서 활동한 단스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인데

벨기에 공업단지에서 벌어진 여성과 아동들에 대한 착취

그리고 성직자임에도

"불의가 합법화되면 민중들이 발로 차버려야 한다는"주장과 함께

적극적으로 사회문제에 대한 관여 및 헌신하였던 단스 신부의 일대기다.

 

성직자가 가져야할 기본 품성까지도 버리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아이들, 여성들, 노동자들의 삶이란...... ........에휴...!!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옛날에 보았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눈 앞에 아른 거렸다.

자막에 올라 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뜻으로 모여

같은 메세지를 전달 하는 것.....

즉, 자신들의 목소리로 자신들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던 영화인 것 같다.

영화내내 책이라는 형태로 출간된 전태일보다는 큰 감흥을 얻기가 힘들었었는데

작은 백열전구 밑에서의 그 어린 아이들의 그 슬픈 눈이란,,,,,,,,,,,,,,,,,,,,,,,,,,,,,,,,,에휴

시각적으로 직접적인 이야기를 해 버리는 그 노동의 아픈 진실이란...........헤헤

 

 

어쩌면 영화 [단스]에서 보여지는 현실이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보여지는 현실

즉, 자본주의의 극단적인 이익추구 및  그 속에서의 철저한 노동착취

그 노동착취의 결정적 국면인 아동 및 여성들에대한 처절할 정도의 착취 및 탄압...!!

 

 

어쩌면

자본주의는 나아지거나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 없어져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져 버린 어느 어린 노동자의 비극처럼

항상 우리들의 눈밖에서

그리고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그 공허한 흔적들속에서

변함없이....흔들림없이 자신들의 광폭함을 숨기며 증폭할 뿐인 것 같다.....

 

더 많이 가진 자들이

더 적게 가진 자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그 삶의 파괴양식은

언제나 노동자들을 거리로

그리고 삶의 파괴들로 몰고 가는 것 같다.

 

그 철저할 정도의 이윤추구란........................

사람들을 걷잡을 수 없게 파편화시키고 궁극엔

다들 삶의 공간에서 유리된 채 떠도는 자본주의 부적응자로 만들어 버린다.

 

아마도 그것이

이런 영화들속에서 창백한 얼굴로 일하는 그 똘망똘망한 아이들의

죽어나가는 애닲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

 

여하튼 [단스]를 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는 패잔병의 모습으로

아무상관없이 거대한 도시 사이를 흘러다니는 내 자신의 모습에 흠칫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아 ! 자연스로운 복종이란....!!..(영화정리)

  • 등록일
    2005/03/12 11:53
  • 수정일
    2005/03/12 11:53

복종이다.

억압이나 가용가 아닌 복종이다.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이런 복종심리가 있는 듯 하다.

아마 어렸을때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수많은 영웅들의 신화에 익숙해졌던지

아니면 스스로 이 험악한 세상을 홀로 버티기 힘들어 누군가에게 기대고픈

어줍잖은 로맨스적 감성이 선천적으로 있든지..............!!

 

요즘

라 보에티의 [자발적 복종]이라는 책을 읽고

며칠동안 머릿속에서 이 자발적 복종이라는 말이 맴맴 돌고 있다.

일상에서 나 스스로는 이러한 자발적 복종을 솔선수범해서 자청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반선 아닌 반성을 전제하면서까지 말이다.

 

요 몇년 동안 본 영화중에서

아무 생각없이 재밌게 보고 

혹시 누군가가 알면 창피할가봐 몰래 열광한 영화들이 몇 편있다.

 

(내 주변에 소위 영화매니아들이 있어서 조심했다.

 그래도 사회운동판에 있다는 놈이 허리우드 영화나 좋아한다고 타박받을까 봐서...헤헤

 실은 모든 영화를 거의 다 보는 편이지만 이런 허리우드 영화를 볼땐

 좀 남의 눈치를 보는 편이다.

 뭐...소위 영화 매니아라는 그 친구들을 내가 워낙 좋아하는데다가

 활동하면서 갖가지 도움도 많이 받았고......그들이 좋아하는 소위 다큐라든가

  독립영화들도 좋아하기때문에 굳이 불편해 하도록 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다..)

 

가령 반지의 제왕이나 매트릭스나 뭐 이런 류의 영화들은 머리 아플때

그냥 멍하니 보기엔 제격인 영화가 아니겠나 싶다.

 

굳이 자발적 복종이라는 단어가

무슨 스님에게 주어진 화두처럼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지금에

이런 영화들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

 

아마도 이 영화들에서 보여지는

어떤 판타지 ...복종이라는 판타지를 강렬하게 받은 탓일거다.

 

 

가령 매트릭스에서

네오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모피어스

왜 아무것도 모르는 촛짜에게 복종하는 가 ?

그들은 이렇게까지 네오를

메시아처럼 받들고 스스로들 목숨을 걸면서까지 복종하는 것일까 ?

 

그것은 아마도

계시라는 예언가라는 오라클의 말 즉, 언어에 의한 복종일 것이다.

성서라는 것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록이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은 결국 말씀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매트릭스의 인간들은 철저하게 이 묵시론적 언어라는 것에 대한

자발적 복종을 보여준다

유일하게 성서속의 유다처럼 네오를 팔아넘기는 싸이퍼는 결국 악의 천사인

루시퍼의 변종이고보면 그리고 그가 외면하는 것은 매트릭스라는 가상의 현실....

즉 진실이 아니라 언어로 예언된 네오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을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 ?

 

실제 우리는

이 언어라는 것에 대한 선량한 복종들을 도처에서 볼수 있다.

 

한나 아렌트가 선량한 행동에 의한 제도의 발전보다

선량한 제도 특히 헌법에 의한 사람들의 개조 혹은 정치의 재구축이 훨씬 더

역사속에서 성공적인 모습을 찾아내는 것 처럼

그래서 주저없이 프랑스혁명보다는 미국혁명이 더 성공적이었다 평하는 것처럼

어쩌면 정치, 혹은 법이라는 언어라는 수단으로 획득되어지는 이데올로기에 복종하는 것은

우리 주변에 무수히 많을 것이다.

그 언어적 권위에 과감히 맞설 수 있을 가능성마저도 없다거나

아니면 언어적인 강압들이 너무나 강해서도 아니면서

사람들은 스스로 그냥 주저없이 복종하는 것으로

이 체계를 지탱해주고 그런 독재자 혹은 독재적 권력들을 지탱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지의 제왕에서의 복종은 무엇일까 ?

그것은 출신 혹은 혈통에 대한 복종일 것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왕의 귀환이 의미하는 것

그리고 중간계든 인간계든 그 판타지 세계가 안정화되는데 있어서

왕의 귀환이 갖는 의미라는 것은 결국 출신 계급에 대한 그리고 혈통에 대한 향수일 것이다.

 

아라곤이 곤도르 자기의 백성을 버리고 떠도는 동안

곤도르를 통치하고 곤도르를 이끌어 갔던 인물들은

다들 죽거나 미치거나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죽임을 당할 뻔한다.

이는 결국 출신 계급에 대한 사회적 체계에 대한 방한은 비극밖에 없다는

어쩌면 지배이데올르기를 보여주는 전형이 아닐까 ?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계급에 편안히 안주하는 것으로

돌아온 왕에게 절대복종하는 것으로 편안함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

   

자발적 복종이라는 사회집단 전체의 모순적인 이데올로기가

보다 직접적으로 보여지는 영화는 무엇보다도 아더왕이다.

 

원래 아더왕이야기는 다 알고 있다시피

엑스칼리버라는 영웅의 검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이 칼에 복종을 한다.

 

 

존 부어만 감독의 [엑스 칼리버]가

판타지라는 장르속에 다양한 생각거리들을 던져준다고 하더라도

결국 이 영웅전설의 핵심은

사람들이 이 칼에 복종한다는 것이다

어린 소년이 칼을 잡아 뽑았을때 사람들은 모두다 무릎을 꿇고 이 어린 전사에게

복종을 맹세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사람들 스스로 칼이라고 하는

힘과 무력앞에 얼마나 무기력하게 자발적 복종의 길로 나아가는 지를 알려주는것이다.

칼로 대변되는 이러한 힘과 무력은

가장 고전적인 방식의 복종을 강요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아더왕 영화인 킹아더는

이젠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

아주 달라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 나온 [킹아더]는

아더왕의 이야기를 차용하여 전혀 다른 복종의 이야기를 만들어 준다

원래는 켈트족의 전설이었던 아더왕이

이젠 선진화된 문화를 가진 로마의 영웅이야기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토록 자신들을 죽이고 자신들의 땅에서 쫓아낸 아더에게

멀린이라는 마법사는 그가 가진 카리스마와 문화, 제도가

미개한 자신의 부족을 바구어 줄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들의 모든 것들을 기거이 헌납하며 복종하는 것이다.

 

이영화에서 결국

미개한 그들이 선택하는 선진 문화에 대한 자발적 복종은

결국 현재 사회에서 허리우드 혹은 힙팝으로 대변되는 미국문화에 대한

모든 문화들의 자발적 복종을 이야기하는 것이요

이러한 자발적 복종이

오늘날 이런

문화적인 식민지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이영화에서의 켈트족처럼

우린 어쩌면

어떠한 자발적 복종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

 

우린 우리가 가진 것들을 자세히 돌아보지 않고

과연 어떠한 힘과 계급과 문화에 복종을 자청하는 것일까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아 ! 해답은 현실인가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를 보고

  • 등록일
    2005/03/11 00:03
  • 수정일
    2005/03/11 00:03

역쉬 진한 감동입니다.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라는 책보다는

아니 평소에 많이 읽었던 게바라의 어떤 글보다도

그 진정성이나 깊이가 한참이나 떨어지는 영화라고는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지는 남미의 척박함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창백한 사람들의 모습이란....^^;

 

글에서만 보아 왔던 것과는 사뭇 다른...보는 사람들을 한없이 침잔하게 만드는

그 현실의 창백함이란.............에구구....^^;;

 

영화(비디오)를 보는내내 아 ! 어디론가 훌쩍 떠나

현재의 나를 버리고 한층더 현실속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좀더 현실을 바꾸어 볼 힘들이 생길까 하는

나만의 서글픔에 연달아서 담배를 물었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 온전한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신자유주의와는 전혀 다른 시스템과 사회작동원리들을 체험하며

그들과의 연대를 굼꿀 수 있을까 ?

 

신자유주의의 밖에서

진정한 사람의 얼굴을 한 사회를 발견할 수 있을까 ?

 

정답은 아마도

게바라에게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들 모르게 분열되고 파편화된 삶을

어떻게 같은 이상과 희망으로 삶들을 재구성해나가고 사회를 재조직화 나갈 것인가 ?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

 

역시 정답은 현실이겠지요

내가 발딛고 있는 현실..................!!

 

어차피

여행이란

과거의 나약하며 기만스러운 나의 삶과의 작별일뿐

언제나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법일테니까요.....^^;

 

여행이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순간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도피일테니......

 

그래서 우리가 꿈꿔야할 여행은

현실로 돌아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

현실로 돌아와 어떻게 삶을 재구성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테니까여.....^^;

 

 

이 장면에서

게바라가 현실을 고민하며 남미의 현실을 바라보게되는데

전 그 말 하나하나 보다는

영화의 어느 순간 흑백사진처럼

아니 박제된 정물화처럼

사진기 앞에서 멋적은 웃음을 지며 쓸쓸히 서 있는 그 사람들의

그 주름 패인 얼굴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계속 여운으로 남더 군요.

 

역시 여행은 마음속에 사람을 심고 오는 것이 아닐지.....!!


 

 

나병 환자촌을 떠나며

그들과 작별하지만

이는 이번 여행의 끝일뿐

게바라는 의사로써가 아니라 진정한 삶의 동반자로써

저들에게 돌아갔었죠.....!

 

그것도 매우 아프게.......

그렇게 볼리비아 산 골짜기에 자기 피를 흘리며

그렇게 아파하던 저들에게 아픈 마음과 육신을 이끌고

언제까지나 친구로써 남아 있겠죠....

그들의 아품 마디마디 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람들...기억속에서 길을 잃다.(2)

  • 등록일
    2005/03/06 14:22
  • 수정일
    2005/03/06 14:22

사람들이 어쩌면

자신의 존재 혹은 삶의 의미를 기억 혹은 추억속에서 찾는 경향이 두드러 질수록

허리우드의 영화속 한장면처럼

인간은 자신들의 기억 혹은 추억들을 조작 혹은 재구성하는 등

자신의 삶을 바꾸려는 노력처럼 기억들도 그런 상황들이 가능할까 ?

 

어쩌면이 아니라 우린 영화속에서 이런 것들을 자주 보곤한다.

가령 과거의 어떤 시점의 기억들속에서

맺어진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혹은 사건들이

자신의 무의적이든 아니면 의식적이든

그러한 노력들에 의해 재구성되곤 한다.

 

가령

일본영화 [라쇼몽]에서처럼

아내와 사무라이 남편과, 지나가는 산적 사이에 발생한 사건이

각자의 삶에 나름대로의 영향들을 끼치듯이

결국 각자의 사적인 이해에 기반하여 인식되어지고

이러한 것들이 결국 자신의 기억들을 자신의 사적이해를 기반으로

적극적으로 재구성되어지는 것은 아닐까 ?

 

 

홍상수 감독의 [오 ! 수정]에서처럼

과거의 어느 한시점에서의 연애라는 것은

어떤 오해라는 것이 아닌 자신의 기억 혹은 추억을

오로지 자신의 입맛대로 재구성하는데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

 

아니면 [생활의 발견]에서 처럼, 혹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처럼

어떤 형태로든 결국 자신의 기억들은 스스로의 자기이해들에 의해

조작되고 재구성되어지는 것 같다.

 

     

 

실제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과 존재의의미를 찾게되는 그런 기억들을

수동적인 무의식이 아닌 적극적인 행위로써의 몸에 밴 무의식으로

재구성하는지도 모른다.

특히, 스스로 그런 기억들이 남과 상관없다라고 생각되어지는

연애니, 생활속에서의 자잘한 기억들, 학창시절, 여행담 속에서는

더욱더 진하게 조작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기억들이 보다 사회적이고 공적인 문제에서는 어떨까 ?

 

혹시 사회적이고 공적인 부분에서마저도

이러한 기억의 재구성이나 조작은 가능하지 않을까 ?

 

가령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에서 보여지는 기억의 부재에 따른 단편적인 메모에 의한 재구성은

어쩌면 왜 사람들이 이러한 기억의 재구성 혹은 조작이라는 것에 적극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주인공이 눈뜨는 순간부터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찾기위한 자신의 기억에 대한 재구성은

진실에 대하여 접근할수록 점점더 광적으로 혹은 자신 스스로의 조작에 의해서라도

전혀 다른 의미를 자신에게 부여하는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스로 메모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자신의 진실을 감추고

새로운 기억을 집어넣어서라도

재구성하려는 이러한 기억에 대한 욕망은

어쩌면 자신의 단순한 사적 이해차원보다도 확대되어진

공적인 영역에서의 기억 조작들이 가능함과 그것이 어던식으로든

광폭함을 내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가령

롤랑 죠페 감독의 [미션]에서 보여지는

남미의 선교과정에서의 개인적 욕망과 그 초월에 의한 인간의 정신적인 성숙이라는 기억은

사람들에게 어쩌면 종교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진 끔직한 범죄를 바라보는 시각들을

재구성한다.

즉, 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온갖 범죄들을

개인들의 희생 그리고 성숙이라는 이미지들을 이용하여

당시의 범죄가 마치 종교적 차원이 아닌 그저 단순한 사람 즉, 개인의 미성숙에의한

철저한 개인의 잘못으로 재구성되어지면서

사람들 기억에 여전히 종교는 선한 것,

그리고 신은 여전히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식으로

영화가 끝나고 남는 기억을

사람은 없어지고 신과 종교만이 남도록 재구성한다.

 

 

이와 유사한 영화가 난 플래툰으로 본다.

언제나 이러한 이미지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대중적 인기도 그리고 작가(?)로써의 명망도 얻으려 시도하는

전형적인 허리우드 영화의 선봉장인 올리버 스톤 감독은

미국사회 혹은 월남전과 관계된 모든 세계인들에게

철저히 사회의 집단적 기억들을 조작하여

참여한 몇몇 군인들의 잘못으로 월남전의 그 수많은 인명살상의 기억들을 몰아감으로써

독보적인 감독으로

그리고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플래툰에서

전쟁은 당시 미국도 그리고 전쟁터에서 살아가야 했던 베트남사람들에게도

아무상관없는 그야말로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의 문제로

그리고 그들의 미성숙과 광기로 인한 문제로 취부되는 듯하다.

 

즉, 사람들은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자신이 참여했던 그 광기어린 시대의 아픈 기억들

스스로의 자괴감에 빠져들게하는 범죄 방조자로서의 자각들을 버리고

갑자기 성숙한 정신적 문제에 골몰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사회집단적 기억의 재구성으로 한발 나아간다.

 

이런 사회전체의 집단적 기억의 재조작은

결국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알량한 사적 이익에 기반한

그 수많은 인류애적 범죄들을 오히려 앞서서 실천하게 만드는

전체주의적 경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는 최근 일본에서의 전쟁범죄가 희석화되고 재구성되고

결국 똑같은 일들의 반복가능성까지 내비치는 일본 사회를 보면

이런 기억의 조작들이 왜 사회전체에 집단적으로 진행되었을때의

광폭함이 두려운지 알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존재의 의미를 지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들을 할까 ?

 

영화속에서 보면

로베르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처럼

전쟁이라는 그리고 전쟁상황속에서의 수용소라는 막다른 골목에서조차도

자식에게는 전혀 다른 인생의 아름다운 기억들만을 물려주려 노력하는

눈물겨운(?) 노력들을 볼 수 있다.

 

그 아들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과연 어떠한 기억들을 가지고 살아갈까 ?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죽어간 그 수용소를 떠올릴때마다

과연 무슨 생각들 무슨 의미들을 찾을 수 있을까 ?

 

아마도 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어떤 평론가의 말처럼

전쟁의 고아기속에서도 보여지는 따뜻한 인간애를 느낄까 ?

 

이러한 기억의 조작 혹은 재구성 아니면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보여지는

그러한 어른들에 의한 기억의 간섭적 조작들은

실은 어떤 사건에 대한 정확한 사실들 혹은 기억들을 방해하고

자신들의 가치관 즉, 기성사회의 가치관에 맞는 그러한 사실들로 재 조직된 기억들은

실은 사실을 은폐하고 훨씬더 작은 단위의 개인 기억들로 파편화시키는 경향은 아닐까 ?

 


최근에 본 영화 중에

[아임 낫 스퀘어드]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의 홍보문구처럼

악이 넘치는 어른세계와는 다르게 순수한 동심의 우정을 그렸다고 보기엔

왠지 찜찜한 영화이다.

차라리

어린 아이들마저

자신의 어린시절의 기억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몸부림이라는 말이 맞지 않을까 ?

 

누구나 보아도 알수있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들

심지어는 모든 마을사람들이

인신매매범인 상황에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

그리고 동심의 순수한 눈으로 보이던

마을사람들과 자신의 행복했던 기억들을 지키기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안타가운 아이의 몸부림이 아닐까 ?

 

 

이런 몸부림에 솔직히 우리들

소위 진보적이고 운동권적인(?) 사람들마저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

 

모든 운동권 선배들이 어저면 그렇게 똑같이

추억속의 기억속의 운동들은 그렇게 열정적이고

심신을 다해 활동했다고 이야기 할까 ?

 

최근에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라는 체 게바라의 영화를 보면서

왠지 어줍잖이 향수에 젖어드는

아 ! 나도 한때는 저런 열정과 저런 사회에 대한 인식들

민중들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스스로의 생각들을 조작하고 재구성하는 것은 아닐지 ......!!

 

나 스스로도

이러한 자기만족적이고

자기 정당화의 한 방편적인 자기 기억 조작의 길에

접어든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내가 스스로 그런 자기 합리화 자기 미화의 길에 젖어들었다면

차라리 씨네마 천국의 주인공처럼

그저 세월에 짤린

무수한 조각난 필름들을 감상하며 눈물 흘리기 보단

오늘부터 쌓이게 되는 나의 기억들을 차곡차곡

나의 미래, 지향하는 바대로 재구성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한다.

지금까지의 기억들이 과거에 대한 편리이라면

이제부터의 기억은 차라리 내 삶에 대한 능동적인 개입이 되기를 바란다는 거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인간...기억속에서 길을 잃다.(1)

  • 등록일
    2005/03/06 07:31
  • 수정일
    2005/03/06 07:31

영화를 좋아한다.

왠만한 영화는 닥치는대로 보는 편이다.

물론 돈없고 시간없고 뭐 이런 저런 영향으로

남이 보여주는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거의다 비디오로 보는 편이지만 말이다.

 

이런 나에게도

몇몇 영화는

바보 짓같지만 충동적으로 소장용 DVD를 구입하는 경우가 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블레이드 러너나 공각기동대, 가타카, 뭐 이런 것들이고

매트릭스는 아직도 돈이 생기길 바라고 바라는 형편에 있다.

 

아 ! 물론 DVD를 우리 집에서는 볼 수가 없지만 말이다.....헤헤

 

그래서 주로 가지고 있다고

과감히 눈물을 머금고 친한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지만 말이다.....헤헤

 

그중에서도

언제나 영화를 추천하면 꼭 들어가는 것이 [블레이드 러너]다

 

 


 

리들리 스콧 감독, 해리슨 포드 주연의 1982년 작품으로

뭐 내용은 다 아시다 시피 지구로 몰래 숨어들어 온 인조인간을 처단하는

인조인간 사냥꾼 이야기다.

 

세기말의 우울한 영상속에서

흐느적거리 듯 살아가는 사람들속에서

사람들의 기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이끌려 간다.

자신의 어렸을때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해 술로 괴로워하는 사냥꾼과

가지지 못한 기억이라는 것을 찾아 영생하고픈 인조인간들........!

 

나 이 영화를 보고 또 보면서

아 ! 과연 인간이 살아가고 본재하는 것에서 우리가 간직한 기억이라는 것이주는

힘이랄까 아니면 존재 방식이랄까  뭐 이런 것들에 항상 전율하는 편이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인간인지 혹은 인간이 아닌지를 판별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이 자신에 대한 추억이 있는지 없는 지로 판별한다는 것......!

 

이;런 기억의 방식에 의한 현실의 저당잡힘이 어쩌면

집단적인 히스테리들 가령 민족분쟁들이나 인종청소...이런 것들의 태동의

기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실제 인간의 존재 내지 실존적 질문을 던진다는 의미에서

꼭 보아야 할 영화중에 몇몇은 온전히 이런 인간의 존재의 이유를

기억 혹은 추억에서 찾는 영화가 많다.

 

가령

내가 좋아하는 또 하나의 영화인 공각기동대를 보아도

영화내내 여전히 인간의 실존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결국 추억 혹은 갖지 못한 기억들에 대하여

그런 기억의 상실과 그로 인한 실존의 문제처럼 보이는 다양한 장치들

그 속에서 헤어나려 몸부림치는 등장인물들의 생생한 떨림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결국 자신의 이제가지의 삶에 대한 것들

어쩌면 기억이라는 추억이라는

자신의 삶의 공간들을 시공간적으로 매꾸어주는 이런 부산물들이

자신의 삶의 주요 존재방식으로 전이될때

사람은 상실감 혹은 극단적인 히스테리, 혹은 집착에 얽매이는 것이 아닐런지....!!

 

솔직히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과거로의 회귀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어쩌면 사람들이

자신의 기억에 혹은 추억들에 대한 향수와

그런 것들을 자신의 삶의 기반으로 삼는 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도 이미 공허함이나 슬픔 심지어는 아품들을

그 기반으로 깔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옛날 주말의 영화에서 참 재미없게 보았다가

한참 지나서 다시 보고서 아 ! 하던 영화가 있다.

누구나 다 아시는 그 영화 !

 


 

소피아 로렌 주연의 해바라기다.

전쟁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서

기차타고 고생하며 남편을 찾아가지만 남편은 이미 다른 여자와 행복하게 살아가고

이에 쓸쓸히 혼자 돌아온다는 애절한(?) 영화다.

이 영화가 더욱더 애절한 것은

여주인공이 지난 과거에 집착하면 할수록 그 비극성이 증대되고

확연히 그 추억들과 이별할때 폭발하게 된다.

자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과거를 자양분으로 버티는 듯 살아가는 여인과 그를 지켜보는

관객들 대다수는 이렇게 스스로 집착하는 경향으로 인한

극단적인 상실감의 공유로 인해 영화가 끝날때쯤 우리 어머니 처럼

눈에서 눈물 몇방울 뚝뚝 떨어뜨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기억 혹은 과거의 추억과 이별하는 경험을 하게되고

이런 이별의 감정들을 삶의 기반에 깔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지....!

 

그걸 극복하든 거기에 연연하든지 말이다.

 

최근엔

영화 자체가 허리우드식 아니면

보기 힘든 것처럼

미국의 힘에의한 기억들이 많아진다.

 

과거 영화들처럼

기억 혹은 추억이 사람에게 어떤 것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하는

요즘 말로하면 좀 머리아픈 것들을 주제로 했다면

보편화된 허리우드 방식에서는

철저히 게임이나 놀이처럼 이런 기억 혹은 추억들을 가지고 노는 경향이다.

 

아 ! 그럼에도 이런 인간에게 있어서의 기억과 추억의 중요성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매트릭스에서 보면

사람들의 신체에너지를 이용하여 살아남는 기계들이

이런 자신들의 일종의 에너지 원인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

기억 혹은 추억에 대한 조작이다.

 

매트릭스라는 가상공간 혹은 가상현실에서

다양한 삶들을 추억으로 제공함으로써 인간들은 만족하며 살아간다는 것이고

몇몇 선각자(?) 이외에는 실제 그런 가상이지만

기억이나 추억을 먹고 사는 것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런 허리우드 식 영화들에서 보여지는 끔직함은

그들의 자신감처럼

언제든지 이런 기억과 추억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다는 자신감들을 언제나 그들의 힘의 방식으로 보여준다는 끔직함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 기억이니 추억과 같이

과거의 기억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

 

이제 술먹을때 군대이야기하고 옛날 학교 이야기하는

이런 쓸데없는 짓을 관둬야 겠다.

혹시 아나

 

나 스스로도 이미 과거에 사는 사람일지................!!

 

아니면 과거와 미래 사이 어느 지점에서 헤매고 있든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