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다지금 쓰고 있는 기사만 다 쓰면.

당분간은 기사 안쓴다.

오오. 기사 쓰는 거 힘들다. ㅠ

 

그런데. 참소리에 기사가 너무 부족하다.

아무리 봐도, 너무 부족하다.

참소리에 가장 필요한 건, 기사의 양인 것 같애.

발로 써서라도 양 부터 늘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 뭔수로 기사를 늘리지???

 

자원활동 주제에,

담보할 수 없는 고민을 하는 것도 싫고.

나도 모르겠다. 휘리릭.

 

어정쩡하게 발걸치면서 고민하는 건,

그만하고 싶은데,

단호하질 못해, 이도저도 못하게 된다.

우유부단.

2010/10/15 15:06 2010/10/15 15:06

지나간다게을러서

몇 분만 쓰면 끝낼 일들을 잔뜩 쌓아뒀다.

이렇게 사는 건, 불만족스럽다.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드는 꼴.

2010/10/13 23:36 2010/10/13 23:36

지나간다하루 종일 골골

출투 한 번 참석하면, 온종일 골골이다.

이것 참.

 

으으으음.

2010/10/13 23:00 2010/10/13 23:00

지나간다핸드폰

님이 지멋대로 꺼지기도 하고, 꺼진뒤에 안켜지기도 하고.

 

이번 핸드폰은 좀 오래쓰나 했더니, 으음, 내가 바꾸기 전에 고장이 나시네.

 

전자기기에 대한 욕심이 많아, 핸드폰을 자주 바꾸는 편이다.

좋은 핸드폰을 탐내는 건 아니고, 그저 새로운 물건을 써보고 싶어서, 공짜폰을 찾아 기계를 바꾸곤 했다.

새로운 기계면, 흑백폰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기계벽이 있다.

여러 이유로 육식은 안한다고 얘기하면서, 전자기기는 그렇게 소비하는 게 스스로 민망해서,

되도록 전자제품 더 안늘리고, 갖고 있는 건 오래쓰려고 맘먹었는데,

핸드폰님이 고장이 나서, 마음이 혹해버렸다.

이참에, 나도 스마트폰 +.+ 이러다가, 

쯧쯧쯧, 다시 한심해지고.

 

이런 물욕 다스리기가 참 어렵네.

2010/10/13 22:35 2010/10/13 22:35

지나간다소통

언제나 소통이 가장 어렵다.

 

당위를 강요하는 내 말하기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건 알지만.

그것만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자신이 말하는 게 어떤 효과를 남기는지 고려하지 않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자기 말의 논리적인 정당함을 증명하는 것이 말하기의 목적이 되어버린 게 아닌지 짐작해보는데,

결국 자기가 이기기 위해서 말하는 게 되버리는 거다.

그런 상황에서는 그 말이 현실에서 어떤 물리적 효과를 남길지를 보기 어렵다.

내가 바라보는 효과가 언제나 정확하고, 타당할 수는 없겠지만 -

내가 고집을 부리는 건 내가 옳다는 확신과 설사 그릇되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이다.

결국 실천에서 증명되리라 생각한다.

 

반성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그 반성이 반영되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허망한 일은 없다.

 

다음에 같은 반성을 하지 않기 위한 반성을 하는 이들은 드물다.

반성도, 그 반성이 타당하다는 증명을 위해 이루어진다.

반성은 난무한다. 그래왔고, 그럴것이다.

...결국 실천에서 증명할 것이다.

 

묵묵히 그저 하면 될일이다.

떡고물 바라지 않고.

인정받으려 하지 않고.

현재의 역사를 특권화시키지 않고. 미래의 어느 순간을 특권화시키지 않고.

내일 죽어도, 이파리 하나 틔우는 것.

2010/10/12 23:52 2010/10/12 23:52

지나간다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별 생각없이 보러갔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것에 비해 좋았다.

 

내 이야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겹쳐졌다.

 

관계의 많은 부분은, 나를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그러진다.

상대방을 위해 모든 것을 하지만, 정작 자신은 공허하고 외로워지는 것.

내 관계는 그러기 십상이었다. 특히나, 내 상태가 너무 좋지 않을 때 만났던 많은 사람들에게.

나를 아끼지 않기 때문에, 더욱 쉽게 던질 수 있고. 그만큼 더 공허해진다.

 

용서받지 못할 일들에 괴로워하는 것도.

결국 용서하는 건 나라는 것을, 나도 모르지 않으나.

용서하고 싶지 않은 것을. 용서하는 것이 합리화가 되는 것 같아 두려운 것을. 용서받을 만큼 충분히 괴로워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해야하나.

 

현상유지를 위해 나를 무너뜨려왔다는 말이 아프게 남는다.

무너져야 다시 세울 수 있는 것을,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붙잡기만 했던 수많은 관계들.

이제와 반성과 후회가 남지만, 앞으로 되풀이하지 않으리라는 자신은 없다.

 

네 발로 중심을 잡고 서는 것.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생각하는 것.

명상을 하거나 프로그램을 참여하면, 어디에서나 한번도 빠짐없이 들었던 말이다.

나 같은 인간은, 머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만큼 힘든 게 없는데. 

사람마다 각각 타고난 업이 다르니 어쩔 수 없다고, 접어두고 있다. ㅎ

아무튼, 내가 나를 아끼게 된다면, 삶에 균형이 좀 생긴다면, 나도 그것을 깨트리는데 겁이 날 것 같다.

이제껏, 만남들은, 언제나 비상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니, 쉽게 다가서곤 했지만.

상 속에서의 비상이면 어떨까.

 

한편 이 영화같은 류의 얘기들이.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자신을 찾으라는 담론들과 연결되는 것 같아 불편하기도 하다.

외려, 찾을 나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텐데.

해탈은, 그저 묵묵히 살아내는 데 있는 것일텐데.

 

 

극중에서 피폐한 줄리아 로버츠와 빛나는 줄리아 로버츠는 참 멀리 있었는데.

분장 덕인지, 연기 덕인지. 그저 신기하게.

2010/10/10 22:01 2010/10/10 22:01

지나간다박헌영

 

와! 정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구나.

벼락때려 튀겨죽일 놈.

 

 

 

박헌영에 대한 평가를 바로하자.

2006년 1월 21일  황동우

 

누구나 한번쯤 읽어본 대하소설 하면 흔히 조정래씨의 '태백산맥'을 꼽는다. 국가보안법에 따르면 이적표현물, 쉽게 말해 '금서'인 이 소설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대하소설 가운데 하나(그것도 일반 서점에서)라니 참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여하튼 이 태백산맥이란 소설을 읽다보면 마지막 부분에 박헌영, 이승엽을 처형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이들을 당파싸움의 희생자로 묘사하고 있다. 즉, 북한 정부가 전쟁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넘기기 위해 이들에게 간첩 누명을 씌웠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책을 읽은 일부 사람들이 북한 지도부를 불신하고 박헌영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오랫동안 정권의 반북 선전을 들은 나머지 반북 의식이 강한 사람들 가운데 사회주의에 우호적인 감정이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박헌영에 대한 동정을 뛰어넘어 박헌영이야말로 당시 공산주의운동의 진짜 지도자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

하지만 잠깐만 생각해봐도 쉽게 모순을 찾을 수 있다. 북한은 한국전쟁을 승리한 전쟁으로 기념하고 있다. 휴전협정을 체결하고는 평양에서 승리의 열병식을 한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전쟁 직후에도 많은 북한 주민들은 한국전쟁을 승리한 전쟁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왜 북한 정부가 전쟁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고민했겠는가. 이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또한 박헌영의 활동을 연구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박헌영의 남로당 활동에 많은 문제가 있고 모순 투성이라는 점이다. 박헌영이 받은 법원의 판결문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하지만 박헌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단지 북한에서 진행된 재판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증거와 증인들의 증언을 조작으로 치부한다.

편견을 버리면 진실이 보인다. 북은 악이고 남은 선이다, 북은 거짓이고 남은 참이다는 논리는 미국과 독재정권의 선전일 뿐이다. 이 글에서는 박헌영이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의 간첩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일제시대.

박헌영은 1900년 5월 28일에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서울에서 '여자 시론'이라는 잡지의 편집원으로 일했는데 이 때 선교사 언더우드와 알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선교사를 가장한 미 정보기관 첩자였다. 이들 가족은 학교, 병원 등을 세워서 사람들의 환심을 사며 고아 등을 데려다 친미인사로 키우는 일을 하였다. 언더우드 뿐 아니라 잡지 '여자 시론' 주간인 차미리사라는 친미인사도 알게 되었는데 이들을 통해 박헌영은 숭미사상을 품게 된다.
 
한편 반일운동에 가담한 박헌영은 1925년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일신의 안락을 위해 변절하고 만다. 그는 조선공산당과 조선공산청년동맹의 지하 비밀조직을 폭로하고 지도 간부들을 알려주는 조건으로 석방된다. 당시 박헌영의 자백으로 서울, 신의주, 평양, 강화, 대구, 마산, 광양, 안동 등 각지의 비밀조직망이 일제경찰의 손에 넘어갔다. 그 후에도 반일운동에 계속 가담한 박헌영은 1930년대 말에 또다시 체포되는데 이 때 그는 대전형무소에서 일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상전향'을 표명(1939년 9월)하고 출옥한다.

1939년 10월 박헌영은 서울 종로에 있는 식당인 백합원에서 언더우드를 만나 미국의 간첩 활동을 하기로 서약하였다. 이 때부터 박헌영은 죽을 때까지 미국의 간첩 노릇을 하게 된다. 
같은 해 12월 언더우드는 박헌영에게 지하 깊이 침투하여 혁명운동 내부에 기반을 구축한 다음 지도부에 들어가 비밀 정보를 수집하도록 지령을 내린다. 이에 따라 박헌영은 서울의 '경성콤그룹'에 접근하여 지도권을 탈취하는 한편 노동운동에 대한 비밀자료들을 계속하여 언더우드에게 넘겨주었다.

'경성콤그룹'은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정태식, 이순금 같은 '엠엘파', 이재유 등 '조선공산당재건운동 경성그룹', 이복기, 이인동, 서중석 같은 '상해파', 박헌영, 권오직 등 '화요파' 같은 여러 파벌이 결합한 조직이었다. 여기서 박헌영은 최고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경성콤그룹'은 노동조합을 비롯 각계 대중단체에 들어가 혁명운동을 하였다. 그런데 이 조직이 결성되자마자 와해되었다. 1939년 말부터 조직원이 체포되기 시작하면서 1940년에 대부분의 조직원이 검거되었다. 박헌영만 검거를 피했고 광주 시내 벽돌공장 인부로 숨을 수 있었다. 사건 관계자들은 일제 경찰이 조직원 명단을 완벽하게 파악했으며 거처를 다 알고 급습한 사실을 통해 밀고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밀고자가 누구였는지는 해방 후에 드러났다. '경성콤그룹'에 몸담았던 이주상이 '콤그룹의 명단을 넘겨준 것은 박헌영'이라고 폭로한 것이다. 경찰의 급습으로 모두 체포될 때 최고 지도자만 빠져나갈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 있었다. 
1941년 12월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자 박헌영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광주에 그대로 숨어지내며 해방이 되기를 기다렸다.

 

2. 해방 후.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박헌영의 행적을 편의상 간첩행위, 당 파괴행위, 대중운동 파괴행위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자.

 

(1) 간첩행위

1945년 9월 미군이 38선 이남을 점령하자 박헌영은 서울의 전 반도호텔에서 미군 주둔 사령관 하지를 만나 조선공산당이 미군정책에 순응하고 미군정의 포고와 제반 법규를 준수하겠다는 밀약을 하였다. 이듬해 2월에는 같은 장소에서 하지와 언더우드를 함께 만났으며 이 때 간첩선이 언더우드에서 하지로 정식 인계되었다. 하지는 이 자리에서 박헌영에게 조선공산당 안에서 확고부동한 지위를 차지할 것, 중요한 공산당활동을 사전에 통보할 것, 공산당 안에서 분열사상을 조성할 것, 공산당을 합법적, 타협적 방법으로 친미 방향으로 인도할 것, 미군정 앞에서 폭동, 파업 등 투쟁을 하지 못하도록 할 것, 간첩 비밀을 엄수할 것 등 새로운 지령을 주었다. 또 이 자리에서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의 전반적 조직 체계와 활동 정형, 당의 지도를 받는 대중단체의 조직체계와 간부명단, 민전정책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그 이후 3월과 5월에도 하지에게 조선공산당 장성정형과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당의 태도와 협의대상 문제에 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그 해 3월 하지는 박헌영에게 이승엽과 조일명을 당의 중요 지위에 배치하고 간첩활동을 보장하도록 지령을 주었고 이에 따라 박헌영은 이승엽을 경기도당위원장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으로 등용하고 그에게 '우익 정당 프락치야' 사업을 맡겼으며, 조일명을 당기관지 해방일보의 주필로 등용하였다. 이승엽과 조일명은 당 내부에서 수많은 비밀자료를 미군정에 넘겨주었다.

1946년 9월 5일 서울 전 반도호텔에서 하지는 박헌영에게 북조선노동당과 북조선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활동과 함께 이강국의 간첩활동을 보장하라는 지령을 주었다. 이강국은 미군 제24사단 헌병사령관 장교에게 고용된 간첩이었다. 이를 위해 박헌영은 미군정을 반대하는 민전 명의의 성명을 발표하고 이를 핑계로 10월 초순 북반부에 잠입하였다. 그는 우선 당의 대남연락선을 장악하여 서울에 남은 이승엽과 연락을 계속하여 1947년 2월 남조선노동당 대남연락책임자 김소목을 통해 이승엽에게 밀서를 보내고 이와 함께 북조선 인민경제기획에 관한 통계자료도 보내주었다. 4월에는 앞으로 재개될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 방침에 관한 자료를 보내고 6월에는 북조선노동당의 중요결정과 기밀자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 사업준비정형을 하지에게 전달하였다.

한편 박헌영은 이강국을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으로 등용하도록 하고 해주 제1인쇄소 지도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이강국은 이 지위를 이용해 수많은 기밀자료를 미군에 전달하였다. 
이 외에도 이원조, 박승원, 임화, 한병옥 등 미국에 고용된 간첩들을 강동 정치학원 등에 배치하여 간첩활동을 보장하였다.

1948년 6월 하지는 '현애리스를 비롯한 미정보원을 유럽을 통하여 북조선에 파견하겠으니 그들의 입국과 간첩활동을 보장하라'는 지령을 보냈다. 박헌영은 이에 따라 1949년 봄 정치적 망명자로 가장한 현애리스와 이사민에게 입국사증을 발급하고 현애리스를 중앙통신사와 외무성에, 이사민을 조국전선의 요직에 배치하여 그들의 간첩활동을 보장하였다.

1948년 6월 박헌영은 하지에게 밀서를 보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계획을 알리며 이승엽을 북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9월 중순 박헌영은 평양시 남산리 자택에서 이승엽과 만나 하지의 지령대로 자신은 노동당 속으로 더욱 깊이 잠입하며 간첩활동은 이승엽에게 넘기고 간첩들의 신변보장만 하기로 하였다. 또한 이때부터 박헌영은 서울 주재 미대사관 정치고문 노블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1948년 9월 외무상으로 취임한 박헌영은 외무성 안에 자기 부하들을 끌어들여 요직에 배치한 다음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과 북한의 관계를 파탄내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특히 주소련 특명전권대사 주영하, 주중 특명전권대사 권오직, 주중 대사관 참사 송성철에게 접근하여 소련과 중국에 대한 악선전을 하였다.

1950년 미 극동사령부 항공정보관 장교 니콜스는 '남조선노동당' 책임자 김삼룡 체포와 관련된 미군 간첩 조용복을 백형복과 함께 위장 의거입북시켰다. 1950년 5월 박헌영은 자택에서 백형복을 만나 이승엽에게 이들의 신변 보호를 지시하였다. 조용복은 이승엽의 도움으로 내각 인민검열위원회에 들어가 인민군 항공부대에 대한 군사기밀 등 기밀사항을 미군측에 제공하였다.
 
이처럼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박헌영이 북한 정부와 당기관에 심어놓고 보호한 미국 간첩은 다음과 같다. 
이승엽 사법상 당중앙위원회 비서 정치위원 인민검열위원회 위원장, 조일명 문화선전성 부상, 김점권 경공업성 부상, 김광수 상업성 부상, 한병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후방총국장, 이강국 무역성 일반제품수입상사 사장, 장시우 무역상, 배철 당중앙위원회 연락부장, 박승원, 윤순달 중앙위원회 연락부 부부장, 이원조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 김응빈 금강학원 원장, 서득은 당중앙위원회 조직부 부부장, 안영달 남조선로동당 지도부 연락책임, 임화, 조소 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김남천 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 이재우 직업총동맹중앙위원회 조직부장 등.

박헌영은 또 많은 사람들을 매수하여 변절하게 하였다. 박헌영은 주로 38선 이남에서 올라온 당원들을 기만, 회유하여 '북조선노동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불신을 조성하는가 하면 범죄자를 끌어들여 과거 죄악을 덮어주는 조건으로 자기 부하로 삼았다. 또한 서득은, 이강국 등을 통해 당자금조달을 구실로 동방상사, 영민공사를 경영하면서 거액을 횡령, 사람들을 매수하는데 사용하였다. 박헌영은 자신도 이 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는데 간첩 혐의로 체포될 때(전쟁시기)만 해도 87만원과 1600g의 순금을 가지고 있었다.

 

(2) 당 파괴행위

박헌영은 공산당의 지도부를 장악하기 위해 갖은 활동을 벌렸다. 그는 일제시대 끝까지 항일운동을 한 것은 '경성콤그룹'이라고 주장하였다. 활동한 시기가 2년도 되지 않고 그나마 김삼룡을 비롯 극소수를 제외하고 상당수 조직원들이 감옥에서 전향해버린 조직을 '최후의 항일운동조직'으로 꾸며낸 것이다. 그는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산속에 식량을 숨겨두기까지 하였다.

1945년 8월 17일 박헌영은 김삼룡, 이주상, 이관술, 이현상, 정태식, 김형선 등 20여명의 사람들을 모아 공산당 재건을 논의한 다음 8월 20일 낙원동 안중빌딩 2층에서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이른바 '재건파공산당')를 결성하였다. 이 자리에서 박헌영은 이른바 '8월 테제'라고 부르는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발표하였다. 여기서 박헌영은 미국을 '진보적 민주주의국가'로 규정하였다. 이 규정은 '남조선노동당' 초기에 많은 사람들의 혼란을 일으킨다.

한편 '재건파공산당'이 나오기 3일 전에 이영, 정백, 최익한 등이 장안빌딩에 '조선공산당 서울시당부'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이른바 '장안파공산당'이었다. 재건파와 장안파는 서로 해체를 요구하며 대립하다 9월 8일 60여명이 참가한 제4차 계동열성자대회에서 투표를 통해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당 재건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 대회는 이른바 '8월 테제'의 '도시와 지방의 당대표가 모여 전국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여기서 당중앙집행위원을 선출하여 당중앙위원회를 조직한다'는 규정을 무시한 것이었다. 전국대표자회의는 60여명이 모인 계동열성자대회로 대신했고 당중앙집행위원 선출도 박헌영 개인에게 맡겨버렸다. 이날 박헌영은 '과거 파벌의 두령이나 운동휴식분자는 지도자로 중앙에서 일할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자기 영향을 받는 이들로 당 지도부를 구성하였다. 9월 11일 발표된 지도부를 살펴보면 '조선공산당' 간부는 완전히 '경성콤그룹' 출신으로 채워졌고 중앙당의 핵심부서인 조직국은 특히 박헌영 직계 일색이었다. 특히 일제시기 인천에서 식량조합사로 지내면서 안락한 생활을 했던 이승엽이 정치국원으로 선출된 것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이처럼 박헌영이 주도한 '조선공산당' 재건은 문제투성이로 출발하였다.

1945년 10월 5일 평양에서 공산당 창건을 위한 예비회의가 열렸다. 이 때 박헌영과 그 하수인들은 서울에 전국을 포괄하는 당중앙지도기관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38선 이남은 미군 강점으로 공산당활동이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북한에 당중앙지도기관을 만드는 것은 상식이었다. 박헌영은 자기 주장을 계속 고집하여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창설을 끈질기게 방해하였으나 압도적 다수의 의견을 뒤집어엎기는 불가능했다.

공산당을 창건하는 데서는 또한 흩어져있는 여러 진보적 정당들을 하나로 모으는 사업이 중요하게 나섰다. 그리하여 38선 이북 지역에서는 합당사업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38선 이남 지역에서는 박헌영의 방해로 합당사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1946년 8월에 있었던 북조선노동당창립대회에서는 남반부에서 합당을 빨리 실현할 데 대한 권고를 보냈다. 그러나 박헌영은 자기 수하에 있는 '화요파' 사람들만 묶어서 '합당준비위원회'를 만들고 합당을 계기로 자기 입지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리고는 인민당, 신민당에 자기 부하들을 보내 그 당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대중들은 신속하게 합당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지도부를 비난하였으며 이런 비난에 못이겨 박헌영은 자기파 일색의 노동당을 내왔고 이에 맞서 '엠엘파' 사람들은 '사회노동당'을 만들었다. 하지만 '사회노동당'은 분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해산하였다. 1946년 11월 23일 박헌영은 반대파들을 따돌리고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 안의 자기 파 지지자들만 묶어 '남조선노동당'을 창립하였다. 박헌영은 다른 당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남조선노동당'에 가입하려면 당을 해산하고 개별적으로 들어오라고 고집했다. '사회노동당' 지지자들은 이에 맞서 인민당 지도자였던 여운형을 중심으로 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다. 이처럼 38선 이남에서는 박헌영의 편협성과 종파성, 당권욕으로 당 통합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반 쪽짜리 '남조선노동당'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며 여운형을 비롯 수많은 진보적인 애국인사들이 '노동당'을 거부하게 되었다.
 
박헌영은 '남조선노동당'의 지도부를 장악하고는 당을 체계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좌경적인 정책과 자기 파 외에는 당에 받아들이지 않는 배타주의적 행동으로 당과 군중을 이탈시킨 다음 5배가, 10배가 운동 등 당장성사업을 원칙없이 진행하여 노동당 안에 수많은 불순 세력을 받아들였다. 또한 당원 교양 사업을 하지 않고 또 '북조선노동당'과 북한 정부의 정책과 활동을 선전하지 못하게 하여 당원들의 의식수준을 낮추고 신념을 떨어뜨렸다. 그리하여 일부 당원들은 상황이 어려워지자 변절하고 심지어 '보도연맹'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박헌영과 그의 부하들은 열심히 활동하는 당 간부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변절자', '간첩 혐의자', '당 비밀 누설자' 따위의 누명을 씌워 살해하였다. 1948년 5월부터 8월까지 13차에 걸쳐 황해도 장풍군에서 42명의 남조선노동당원과 민주인사들을 살해하였고 1949년 여름 강원도 양양에서 현인초 외 2명을 살해하였다. 또한 1948년 8월 개성시 당 위원장이였던 김재관, 10월 장풍군 부위원장이었던 서구돈을 역시 누명을 씌워 살해하려고 체포하였으나 북한의 경비대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한편 박헌영은 남한 국회에 있는 지하조직을 파괴하기 위하여 이른바 '국회프락치사건'을 일으켰다. 노동당과 연계가 있던 강병찬은 친척인 국회의원 황윤호를 포섭한 후 강욱중, 김옥주, 김병회, 배중혁, 최태규 등 여러 국회의원을 묶어 국회 내에서 양심적인 목소리를 내도록 하였다. 이들은 미군철수와 남북협상에 관한 국회동의안 준비과정에서 하나의 움직임을 보였다. 이 때 당중앙 정치국회의에서는 남한 국회에서 양심적 국회의원들이 조직적으로 행동하면 조직이 드러날 수 있으므로 개별적으로 행동하도록 하고 이들의 행동에 일반 국회의원들이 동조하여 분위기가 조성되면 그 때 조직적으로 대응, 긴급동의안 제출 등을 해야한다고 결정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박헌영도 동의하였다. 그러나 박헌영은 자기 세력과 연계가 있던 노일환, 이문원 의원을 통해 5월 초 미군철수와 남북협상에 관한 국회동의안을 먼저 국회에 제출하도록 하였다. 이 사건으로 두 의원 뿐 아니라 대다수 양심적인 국회의원들이 체포되고 국회 조직은 와해되었다.

1950년 3월 27일 박헌영의 비호를 받은 안영달, 조용복, 백형복에 의하여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남조선노동당'의 책임자 김삼룡, 이주하 등이 체포, 살해됨으로써 38선 이남에 있던 지하당 조직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박헌영은 자신의 밀고 행위가 드러날 것이 두려워 김삼룡을 체포한 치안국 사찰과 중앙분실장 백형복을 위장 의거입북시켜 보호하였고 김삼룡의 밀고자 안영달은 전쟁시기에 유격대에 보내 살해하였다.

 

(3) 대중운동 파괴행위.

해방 직후 박헌영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고 친미친일인사들을 대표적 세력으로 하는 친미정권 '조선인민공학국'을 조직하고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민족전선으로 하여금 이를 지지하도록 하였다. '조선인민공화국'은 미국을 '해방자', '원조자'로 규정한 친미부르주아공화국이었다. 이에 많은 대중들이 소수특권계급을 위한 우경투항주의 주장을 묵살하였고 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 구상은 실패하였다.

이처럼 박헌영은 해방 직후 대중들에게 친미사상을 전파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박헌영은 미국을 '진보적 민주주의국가'로 규정하고 미군정을 과도하게 자극하지 말라며 동맹파업 등의 행동을 일체 금지하여 미군정 아래 있던 많은 노동자들의 투쟁의지를 꺾으려 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본질을 간파한 대중들이 투쟁에 나서자 나중에는 투쟁을 좌경적으로 몰아 대중운동을 파괴하였다.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은 이러한 대중운동 파괴의 대표적인 예이다. 박헌영은 이 투쟁을 실패로 몰고갔다. 박헌영은 애초에 농민들의 추수투쟁과 밀접히 결합시켜 진행하기로 한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앞당겨 하도록 강요하여 노동자, 농민의 공동 투쟁을 막았다. 또한 노동자 총파업에서도 출판보도부문 노동자들을 먼저 파업시켜 이후 투쟁들에 대한 보도선전을 막아버렸다. 또한 투쟁을 모험적으로 내몰아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하였다.

1948년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2.7 구국투쟁이 전국을 휩쓴 다음, 박헌영은 3.1절을 맞아 경찰서를 습격하고 유엔 한국위원단 활동을 봉쇄하는 이른바 '3.1 거점투쟁' 지침을 남조선노동당에 내려보냈다. 2.7 구국투쟁이 채 마무리되지도 않았고 5.30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조직 정비와 역량 축적이 필요한 시기에 무모한 투쟁을 지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비교적 남조선노동당의 조직역량이 남아있던 경상도, 전라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투쟁이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그나마 남아있던 조직 역량이 모두 바닥나게 되었다. 1948년 3월 중순 남조선노동당과 북조선노동당의 합동정치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김삼룡은 '3.1 거점투쟁'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였다. 그러나 박헌영과 이승엽은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현재 방식으로 계속 투쟁할 것을 촉구했다.

이후 박헌영은 1948년 여순항쟁에서도 무모한 군인폭동을 지시해 군대 안의 민주역량을 모두 파괴해버렸다. 
박헌영은 또한 '보도연맹'을 통해 수많은 애국 인사들을 학살하였다. 1948년 미군은 '남조선노동당'을 파괴하기 위하여 '보도연맹'을 조직하였다. 이에 대해 '북조선노동당'은 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기하였으나 박헌영은 이를 거부하여 의도적으로 미군의 학살을 용인했다. 
또한 1949년 6월 18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조국통일전선 호소문이 발표되자 이것을 계기로 폭동을 일으키도록 지시하여 미군에게 '남조선노동당' 당조직과 수많은 애국 단체들을 노출시켜 이남 전역에서 수많은 학살을 유도하였다.

 

3. 전쟁시기.

전쟁시기에 박헌영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박헌영은 전쟁과 관련된 극비 자료를 미 첩보기관에 넘겨주는 한편 북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무장 폭동을 두 차례나 준비하였고, 남한에 있던 유격대를 괴멸시키고 전쟁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 당조직과 대중단체를 파괴하고 애국인사들을 학살하였다.

먼저 첩보활동을 살펴보자. 전쟁을 위한 박헌영과 그 부하들의 간첩 활동은 전쟁 전부터 시작되었다. 1947년부터 1948년에 걸쳐 인민경제계획에 관한 자료,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방안에 관한 자료, 인민군 병력배치자료,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기구 체계, 화폐개혁에 관한 정보자료를 미군측에 넘겼고, 1949년에는 이승엽이 직접 38선을 돌아보고 조선인민군 병종별 병력수와 주둔지, 38선 경비상태를 조사하여 미군측에 넘겼다. 이런 자료들은 모두 미국의 전쟁준비에 중요하게 이용되었다. 
또한 이들은 전쟁중에도 북한 인민군 사령부의 위치와 주요 부대들의 위치, 주요 작전 등을 무선 등을 통하여 계속 미군측에 전달하였다.

다음으로 무장 폭동에 대해 살펴보자. 
1951년 9월 초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의 이승엽 사무실에서 이승엽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폭동사령부가 만들어졌다. 이 폭동사령부는 1947년 5월 미국의 노블이 '당신과 같은 애국자들이 조선의 좌우 중간세력을 규합한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면 성공할 수 있으며 미국은 당신을 적극 후원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에 따른 것이며, 미군의 '하기 및 추기 공세'에 발맞추려고 한 것이다. 폭동사령부는 참모장에 박승원, 군사조직 책임에 배철, 폭동지휘 책임에 김응빈, 정치선전 책임에 임화, 조일명 등을 임명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던 금강학원 학생들에게 반정부 사상을 주입하고 군사 훈련을 강화했으며 무장폭동의 주력으로 유격대 제10지대를 지정, 이 부대를 4천여명에 달하게 증강하였다.

이들은 첫 번째 무장폭동이 실패하자 아이젠하워가 '신공세'를 준비하는 데 맞춰 두 번째 무장폭동을 준비하였다. 두 번째 무장폭동은 1952년 9월 박헌영의 집에서 준비하였다. 이들은 '합법적 좌익 정당'으로 새 당을 결성하고 이승만 정부와 연합하기 위한 새 정부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무장폭동이 성공하는 경우 박헌영을 내각수상으로, 이승엽을 새 당의 총비서로, 부수상에는 장시우, 주영하, 내무상에 박승원, 외무상에 이강국, 무력상에 김응빈, 선전상에 조일명, 교육상에 임화, 상업상에 윤순달, 노동상에 배철 등을 내정하였다. 두 번째 무장폭동도 실패로 끝났다.

다음으로 남한에 있던 유격대를 괴멸시킨 일에 대하여 살펴보자. 
전쟁이 길어지면서 미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지리산 등을 중심으로 유격투쟁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조선노동당은 6개 도당회의를 통해 이들 유격대를 하나의 체계로 통합, 남부군을 건설하였다. 이 때 조선노동당 중앙에서는 '이현상 부대는 제6지대로서 지리산 전북도당에 속해 활동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유격대 전술에 대해서도 '대규모 부대에 의한 진지전을 피하고 소부대활동을 전개하라'고 하였다. 또한 인민군 사령부에서도 인민군의 공군력을 대신해 후방을 교란하고 군사시설을 파괴할 것, 특히 교통로를 습격 파괴하여 수송을 마비시키고 미군의 지휘부를 기습하여 통수계통을 교란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박헌영은 이승엽을 통해 이현상을 남부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라남도, 전라북도당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지만 조선노동당 중앙과 연계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승엽의 지시는 그대로 관철되었다. 이현상은 대낮에 역공을 하고 대규모 공격을 남발하며 유격대를 천미터 이상 고지에 배치하여 보급사정을 약화시키는 등 유격대에서 사용할 수 없는 전술을 펼쳤고 이로 인하여 유격대는 군경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괴멸되었다. 후에 이현상은 자신에 대한 비판을 접수하고 백의종군하였으나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흘러가버렸다.

다음으로 당과 대중단체 파괴, 애국인사 학살에 대해 살펴보자. 
박헌영과 그 부하들은 전쟁이 일어나자 38선 이남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간첩행위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박헌영은 자기 부하 2백여명을 안주에 집결시켜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의 도, 시, 군 당, 정권기관 책임자로 임명하여 파견하였고, 특히 이승엽은 서울시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에, 김점권을 조선노동당 경기도당위원장에, 안영달을 경기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안기성을 경기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배치하였다. 
또한 1951년 4월 임화에게 문화, 예술분야에서 친미세력이 지도권을 장악하도록 지시를 주어 문학예술총동맹 내부에서 대립과 불신을 조성하였다.

1950년 6월 28일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박헌영의 지시로 안영달, 이중업, 맹종호 등은 '토지조사위원회', '조선의용군본부 특수부' 같은 비밀테러단체를 만들어 수많은 애국자들을 고문, 학살하였다. 특히 이 때 자신들의 간첩행위를 알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70여명을 감금, 고문하였고 이 가운데 7명의 '남조선노동당' 당원을 총살하였다.

 

4. 결론

박헌영은 수 천명의 방청객이 참가한 공개재판에서 자신의 혐의를 모두 시인했으며 다음과 같은 최후진술을 하였다.

'제가 과거에 감행하여온 추악한 반국가의 반당적, 반인민적 매국역적 죄악이 오늘 공판에서 낱낱이 폭로된 바이지만 여기 오신 방청인들뿐만 아니라 더 널리 인민들 속에 알리어 매국역적의 말로를 경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박헌영의 간첩 행위는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 되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박헌영의 간첩 행위를 돌아보며 교훈을 찾고 미국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것이지 박헌영을 미화하고 동정하는 게 아니다. 
미국은 자신들이 지배하려고 마음먹은 나라에 대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제국주의 국가이다. 우리는 편견을 버리고 역사를 바로 보며 미국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여서는 안되겠다.

 

2010/10/09 22:06 2010/10/09 22:06

지나간다읽다가 문득;; 자본주의의 위기

독점의 시대-금융 자본 - 존 벨라미 포스터

http://generalists.tistory.com/80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에서 중심부의 금융화와 경기 침체가 임금이 낮은 주변부에서 수출 주도의 기업이 새로 생기는 것과 구조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와 동시에 신 자유주의적인 독점 금융화의 모든 시대가 제 3세계의 부채 위기와 결부되어 있었고 미개발된 경제에 새로운 금융적 의존을 이끌어내는 새로운 “금융 구축”를 만들려는 시도와 연관이 되어있다.

 

미국경제와 중국 ; 자본주의, 계급, 그리고 위기 - 마틴 하트-랜즈버그

http://blog.daum.net/chanhopark/15677046

 

통상적인 생각은 공격적인 중국의 수출정책으로 미국경제는 휘청거리며, 중국만 살찌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사실에 입각할 때, 이 상황은 세계자본주의 축적과정에 의하여 강요된 것이며, 핵심적인 계급의 실체를 반영한 것이다. ; 집단적으로 손실을 보고 있으나, 각자 서로에 대한 경쟁으로 내몰리고 있는 노동자들이 있는 반면, 다국적 자본 집단과 이들과 동맹을 맺은 자들은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다.

 

 

자본주의가 세계적인 규모에서 움직이고 있고, 개개 국가의 정책에 따라 국면의 전환이 도래하지는 않는다.

 

존 벨라미 포스터와 폴 버킷은 생태주의를 훑어보다 알게 됐는데, 다른 글들에도 관심이 간다. 마틴 하트-랜즈버그는 폴 버킷과 '중국과 사회주의'를 썼다. 요즘 이사람 저사람 다 중국을 떠받드니(손학규 같은 얼치기도), 은근히 신경 쓰이는데, 이 책이나 읽어봐야겠다. 중국은 새로운 자본축적 체계인가, 전세계적인 자본의 동역학 속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것일까.

 

 

중국과 사회주의 - 한울아카데미 751
중국과 사회주의 - 한울아카데미 751
마틴 하트-랜즈버그
한울(한울아카데미), 2005
2010/10/04 20:51 2010/10/04 20:51

지나간다2010/10/02

뜻대로 안되는 일이 십중 구니,

어이 살아야할꼬?

2010/10/02 17:20 2010/10/02 17:20

지나간다어흐, 졸려

아침에 눈을 뜨니 세상이 밝아져 있다.

헛. 이러면 안되는데. 알람을 못들었나?

대체 몇시지?

핸드폰을 열어보니 꺼져있다. 근래, 이녀석이 저 혼자 꺼지곤 한다.

하필 이 때.

서둘러 켜니 6시 26분.

6시 40분 차를 못타면 오늘 출근 못한다.

밥은 커녕, 씻지도 않고 - 옷만 걸치고 달려나가 가까스로 터미널에 도착.

 

울어야는지, 웃어야는지 모르는 채로. 버스에 실려 왔다.

외투를 안걸치고 나왔더니, 밖은 꽤 춥다.

 

오늘 아무일 없이 지나가길.

그러고보면, 어렸을 땐 하루하루 고저가 심했는데, 이제는 만사 심드렁해져서인지, 특별히 나쁜 날이 없다.

확실히 어르신이 된건가?

2010/09/29 09:24 2010/09/29 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