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다

같이 일을 하면 내 부림을 받게 될 거라는 한 친구의 말에,

내가 그럴리 없다며, 나는 사람을 닥달하지 않는다고 발끈했다.

그럼 내기를 하자길래, 흔쾌히 좋다고 했는데.

이럴수가. 나만 모르고 있었지, 나는 엄청 갈구는 인간이었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심각한 회의가 든다.

-_-

 

같은 공간에서 활동하는 친구가, 내가 직접 말로 쪼진 않지만 뭔가를 하고 있는 것 만으로 압박을 준다고 설명해준다. 내 말과 행동의 태반은 '부앙부앙'인데, 보통 얘기들(드럼을 배울거야. 베이스도 배울거야. 탁구를 배울거야. 배드민턴을 배울거야. 읭? 이런 것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만 활동에 관련된 건 '부앙부앙'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나 보다. 내 시건방진 태도도 '부앙부앙'에 기대고 있건만, 활동에 있어서는 왠지 액면대로 받아들여지게 되나보다. 이건 내가 가진게 많아서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는데, 나라는 게 애초 관계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보면 나를 순수하게 나로 봐달라고 얘기하는 건 내 환상에 불과했지 싶다.

 

어쨋든.

오오.

맙소사.

어찌까.

2010/09/28 19:10 2010/09/28 19:10

지나간다대목장 최기영

추석연휴에 tv채널을 돌리다 다큐를 하나 중간부터 봤다.

대목장 최기영씨에 대한 이야기였다.

평생 나무짜는 일을 해온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저 감동이다.

황룡사 9층탑 터를 보며, 그 때 사람들이나 지금이나 마음 씀씀이가 같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과연 대가구나 싶었다.

 

대가들 끼리는 통하는 무언가가 있는 듯 싶다.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말이야.

 

문살이 나무들을 이어 붙여 만드는 게 아니라 끼워만든다는 건 신기했다.

그게 여러 조각이 아니라 한두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도.

 

허나, 저 집들에서는 누가 살았을꼬. 저 탑은 뉘를 위해 만들었을꼬.

 

2010/09/26 03:07 2010/09/26 03:07

지나간다2010/09/26

몸 시계가 엉망.

피곤해서 픽 쓰러져, 저녁도 안 먹고 내내 자다, 밤 늦게 일어나 한량짓이다.

 

방에서 악기를 뚱땅거리니, 옆집에서 벽을 쾅쾅 친다.

ㅡㅜ

소리도 줄여놓고 연습하는 건데.. 너무해.. 헝헝

 

기사 써야할 것이 있는데, 맘먹고 썼으면 진작에 다했겠건만, 여지껏 미뤄두고 있다.

이런 게으름은 어디에 꿈쳐있다 튀어나오는지, 원.

2010/09/26 00:23 2010/09/26 00:23

지나간다서른, 잔치는 끝났다

잔치는 끝났다.

그게 무슨 상관이람?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는 거북하다.

하지만, 언제나 혁명적인 동지들의 입성과 달리

잔치는 끝나지 않았나? 아니,

잔치는 있었던가?

잔치는 도래할까?

무슨 상관이냐고 묻지 않는 게 더 못미덥다.

나는 갸냘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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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잔치는 끝났다

             - 최영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 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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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 제목을 알게 된건 얼마되지 않았다. 한 친구의 블로그에서, 내가 같이 학교를 다녔던 전대협세대의 학형이 메신져 닉네임을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해놓았었다는 코멘트를 읽었다. 그 땐 그게 시 제목인 줄도 몰랐다.(그 코멘트를 단 사람 역시 이게 시라는 걸 몰랐거나, 혹은 어떤 내용의 시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싶다.) 그렇게 지나치고서, 친구와 찻집을 갔다 책장을 두리번 거리는데, 이 문구의 시집이 보인다. 그래서 냅다 펼쳐 읽어보았다. 시 내용이 낯설진 않았다. 오며가며, 한번쯤은 들어봤을 시였겠구나. 그러고보면 우연과 우연이 만나 이렇게 하나의 끈이 된다. 먼저 블로그의 글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 문구를 마음에 담아두었을까. 하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스쳐 지나가며 읽고서도 간간이 '잔치는 끝났다'고 중얼거렸으니. 찻집에서 그 제목을 처음 발견했더라도 손이 갔을거야. 그런데 난 잔치를 벌여낼 만큼, 20대를 보냈던가? 그래서 정말 무에 꺽이기나 한 것일까. 한 것도 없으면서, 잔치는 끝났다고 옹송거리는 내가 한심하다.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2010/09/23 21:45 2010/09/23 21:45

지나간다지리산

짐을 줄이고 줄이고 줄여서. 배낭 반절도 안 채우고 출발했다. 집에서 나설 때 기세는 세계일주

 

하지만 처음부터 에라였다.

기차에서 졸다 구례구역을 지나쳐, 순천까지 갔다.

마음이 급했다. 출발도 느지막히 했는데, 이런 실수를 하다니.

확, 산타지 말고, 순천구경이나 하면서 남해를 돌아다닐까 싶기도 하고.

그런데 조급해한다고 별방법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 체념하니 편해진다. -_-

 

짐을 줄여서인지, 트레킹화를 갖춰 신어서인지, 그간 체력이 좀 붙어서인지

지난번보다 수월하게 걸었다. 세번째는 잘 모르겠지만, 앞에 두가지는 확실히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노고단대피소에서 김밥을 먹고 노고단에 올랐다.

몇 해전에는 아예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고, 최근에는 매번 새벽에 오거나 늦은 오후에 왔었기 때문에 노고단 꼭데기에 올라가보질 못했다.(지금은 10시부터 4시까지 개방되어 있다.) 그러니까, 처음 올라가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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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는 꽤 자주 쉬었던 것 같은데, 이번엔 거의 쉬지 않고 달렸다.

피아골삼거리에서 한번 쉬고, 화개재에서 한번 쉬고. 연하천대피소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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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간 정도 걸었으니, 지난번에 9시간은 족히 걸려 연하천에 들렀던 걸 생각하면, 시간이 많이 줄었다. 이 정도가 평균 소요시간인 듯 하다.

 

대피소에 잘 곳이 없었다. 도착했을 땐 이미 비박을 하기 위해 밖에 자리를 잡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난 비닐 두 장에 모포보다도 얇은 라이너침낭 하나가 있었기 때문에 식당 안에 자리를 폈다. 비닐 한장 밑에 까니 냉기가 그대로 올라온다. 시려워서 등을 바닥에 대고 있을 수가 없었다. 짐이 늘더라도 작은 매트 하나 챙겨올 걸 하는 후회가 컸다. 챙겨간 책은 깔판으로 쓰였다. 밤새 뒤척이며 덜덜 떨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속이 좋지 않았다. 찬데서 잔 탓으로 속병이 낫나 싶었다. 전날 저녁으로 아침부터 싸서 다닌 약밥, 찰떡을 먹었는데 그게 약간 상했나 싶기도 하고. 어쨋든 아침 7시쯤 출발해서 벽소령으로 이동했다. 지난 번 기억으로 길이 힘들까 걱정했는데, 그리 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번에는 비바람에 시야가 전혀 열려있지 않았는데, 이번엔 산 아래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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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천에서 출발할 때는 살짝 안 좋다 정도였는데, 벽소령에 도착하니 배 속에 난리가 났다. 설사를 하고, 잠도 제대로 못잔 터에 피곤해서 대피소에 들어가 잠깐 누워 쉬고 있으니 직원이 일기가 좋지 않으니 하산하는 게 좋겠다고 권한다. 몸도 안 좋으면 더 힘들거라고. 일기예보에는 비온다는 얘기가 없었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망설여졌다. 배는 살살아프고, 날씨도 좋지 않다는데.. 벽소령이 내 한계인가.. 지리산 신령님네들이 나를 안 받아주나.. 무지근한 마음으로 밑에 있는 친구에게 일기예보를 확인해달라 하니 비소식은 없다고 한다. 어쨋든 다음 대피소까지는 걷기로 마음 먹고 출발했다.

 

걷기 시작해서 두시간 쯤은 배가 아파서 중간중간 주저앉았다. 벽소령대피소에서 세석대피소까지 길은 평탄해서 걷기 좋았는데, 배가 문제였다. 망할 것. 그래도 시간이 좀 지나니 배가 나아져서 걸을 만 했고, 세석대피소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었다. 세석평전은 높은 나무 없이 낮은 풀들이 펼쳐져 있어서 정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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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석대피소에서도 설사를 하고, 한숨 눈을 붙였다. 바닥은 추워서 의자 위에 누웠는데, 바람은 찼지만 침낭으로 감고 있으니 꽤 아늑하니 좋았다. 

장터목을 향해 걸으면서, 장터목대피소에 자리가 꽉차서 잘 곳이 없을 것 같아 걱정이 됐다. 이 몸상태로 비박을 할 수 있을려나.. 매트도 없고. 비닐만 덮고 있다가는 천상 그대로 날밤을 새야할텐데.. 그래도 장터목대피소까지 고개 하나를 남기니 마음이 신난다.

 

장터목대피소 직전 고개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해서 바라본 풍광이 좋았다. 굽이굽이 골짜기와 능선이 멀리 펼쳐진다. 장터목은 말그대로 장이 섰던 곳이라고 한다. 물건을 주고받기 위해, 한짐 가득 짊어지고 산을 올랐을 이들을 생각하니, 막막하다. 뭐, 차마고도도 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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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자 마자 바로 또 설사를 하고, 음,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부터 우선 찾았다. 식당 바로 앞에 밥을 먹는 공간이 그나마 바람이 좀 막아질 것 같았다. 나무 의자 위에서 자면 매트가 없어도 냉기 걱정을 안해도 될 것 같고. 그리고 상황이 궁해서 머리를 공굴리다 보니, 배낭을 비우고 배낭을 매트 대신 사용하는 방법도 떠올랐다. 이런 궁리를 하면서 밥을 먹고 몸을 옹송거리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대피소 방배정이 끝나고, 오늘 사람이 적어 대피소 복도에서 잘 수 있겠다며 사람을 들였다. 오오. 살았다. 안에서 자는데도 복도는 난방이 전혀 안되니 추웠다. 이런 날 밖에서 잤으면 입돌아갔을지도 몰라.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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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이그러진 보름달이 환하게 하늘에 걸렸다. 운 좋으면 일출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감을 갖고 잠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천왕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구름이 잔뜩끼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 불빛을 쫓아 돌을 기어올랐다. 바람불고 추워서 반듯이 서있기도 힘들었다. 바위 틈에 몸을 숙이고 해돋기를 기다렸지만, 해돋는 걸 볼 가망이 없다는 건 뻔했다. ㅠ

 

날이 좀 밝아지니, 사람들이 노고단 글자가 새겨진 돌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법석이었다. 너도, 나도. 이 꼭데기에 오갔을 무수한 사람들이 떠오르면서 무언가 글을 쓰고, 사진을 남기는 행위가 참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는 왜 구태여 장면들을 기록해 두고 싶었을까. 그렇게 남겨놓은 사진은 추억이 될까? 모든 기억이 흐려질 때, 잡아줄 끈이 되려고?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이들이 남겨놓은 기록들은 어디로 가있을까.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이들은 어디에 있을까.

내내 산을 오르며 새삼 알게 건, 참 많은 사람들이 사진기를 메고 다니더라는 것이다. 몇년 사이의 변화인 것 같다. 작은 디카보다, 오히려 DSLR이 많아 보였다. 누구나 렌즈의 조리개를 여닫으며 빛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 작품을 꿈꾸는 그 손들이 어딘지 불편했다. 사진도 소통의 수단이다. 저마다의 이야기는 넘쳐난다. 그리고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가 잘 띄이도록 공을 들인다. 위대한 자본주의는 그런 욕망을 부채질 하고, 또 실현시켜줄 것 마냥 굴고 있잖은가. 그 이야기들이 어디와 어디 사이를 오가는지는 잘 모르겠다. 진부하지만, 소통이 불가능한 세상. 그 공들임이 이야기들이 목적지 없이 떠도는 데 한몫하지 않나. 이야기가 가닿지 못하는 것은 외양이 부족해서가 아닐텐데. 하지만 더 잘 담아내고픈 마음을 어찌하겠나. 나도 그런 욕망에 언제든 풍덩 빠질 준비가 돼있는데.

 

내려와 장터목 대피소에서 밥 먹고 백무동으로 길을 잡아 걷기 시작했다. 내려가기 전에도 설사하러 화장실을 몇 번 들리고. 아무것도 안 먹는게 가장 낫겠으나, 먹지 않고 걸을 자신은 없어서 내내 먹고 쌌다. 내려가기 시작할 땐, 다음에 백무동으로 올라와 일출만 보자고 생각했었는데, 내려가며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진다. 뭐 이리 가파른 계단길이 끝도 없나. 무릎이 쑤시고, 허벅지관절이 쑤시고, 허리도 쑤시고. 2시간 반쯤 내려가니 민박집들이 나온다.

 

버스를 타고 인월로, 남원으로, 전주로 나왔다. 몸이 3년은 입은 팬티의 고무줄 같았다. 늘어질 대로 늘어져 흐느적 흐느적.

 

다음에 또 가볼 마음이 생기려나?

그럴지 모르니 정리해두면,

구례구역에 10시 50분쯤 도착하고, 구례터미널에서 성삼재에 오르는 11시 40분 버스.

성삼재에서 12시 반쯤 출발.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한게 6시.

다음 날 7시쯤 출발해서 8시 반쯤 벽소령 대피소 도착.

벽소령에서 9시 반쯤 출발해서 세석 대피소에 12시 반쯤 도착.

세석 대피소에서 2시쯤 출발해서 장터목 대피소 4시 도착.

다음 날 4시쯤 출발해서 5시 좀 넘어 천왕봉 올라가고.

8시쯤 장터목 출발해서 백무동으로 하산.

2010/09/22 22:20 2010/09/22 22:20

지나간다2010/09/19

1.

몇 시간 뒤면, 지리산을 오르고 있을 걸.

짐은 15리터도 안챙긴 것 같다. 지난 번 데인 기억 때문에 마구 줄였다.

밥은 그냥 햇반 찬 걸로 먹을 거다. 코벨 버너 그런 거 너무 무거워..

침낭도 무거워서 슬리핑백 얇은거에 비닐만 챙겼다.

비닐 두장 챙겼으니 어지건히 춥지 않고선 안 얼어죽을거야.

반찬도 필요없다. 김 부스러기 조금만 챙겼다.

이렇게 다 빼는데도 책에 대한 욕심은 어찌할 수가 없다.

 

2.

모처의 청소노동자들을 만나 얘기를 나눴다.

서울대 병원 노동자들에게 듣던 거나, 고대병원 노동자들에게 듣던거나, 얘기가 다르질 않다.

이럴 때면 당황스럽기도 하다. 세상의 진실이 같잖아져서.

 

3.

밤늦게까지 기사를 쓰고 있었다.

천막농성장의 추석나기 인터뷰기사였다.

생각처럼 인터뷰가 따지지도 않았고, 생각처럼 글이 엮어지지도 않아서 쓰는 데 오래걸렸다.

나온 글도 맘에 들지 않아 계속 눈싸움만 하다, 기권하고 집에 들어갔다.

아침에 일어나니 농성장이 침탈당했다는 연락이 왔다.

허둥지둥 가보니, 전날 밤 늦게 침탈당했다한다.

내가 끙끙대며 기사를 쓰고 있었을 시간이다.

농성장이 없어진 마당에, '천막에서 추석나기'라니.

기사 쓸 시간에 농성장에나 와 있을 것을.

어쨋든 기사는 때늦었지만 올리긴 올렸다. 쩝.

 

4.

농성장에 문정현 신부님이 오셨다.

지금 떠올려보면, 다 같이 왜소하다.

난장이들끼리 기대는 거지. 뭐.

2010/09/19 00:53 2010/09/19 00:53

지나간다김주익 열사 월급명세서

오래된 파일들을 정리하다, 이 명세서가 튀어나왔다.

몇 년 전 겪었던, 분노와 슬픔들이 담겨있는.

지금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게, 섬찟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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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2 20:06 2010/09/12 20:06

지나간다충주호 2010.8.20

음성에 들렸다, 충주호수에 가 닿았다.

 

그저 호수만 보는 건 좋았으나, 배를 탄 건 별로였다.

호숫가에 앉아나 있을 걸 그랬다.

무언가 보아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는 순간, 흥이 사라지는 것 같다.

그래도 배위에서 바라본 풍광이 좋았지만, 풍광에 익숙해지니 지루해졌다.

 

물들에 비친 산과 하늘이 일렁였다.

어느 게 진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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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호수 밑바닥에 몇천년의 얘기가 담겨있을 거라 생각하니

서글퍼지려다, 다시 별무감흥.

2010/09/10 23:32 2010/09/10 23:32

지나간다참소리

참소리 자원활동을 나가고 있고,

오늘 취재하려 익산병원 농성장을 들렀다.

 

마침 사측 직원들이 도발하려고 카메라와 캠코더를 들고 우루루 몰려온다.

나도 시덮잖은 꼴에 열이 나서, 맞도발하며 카메라를 직원들 얼굴에 들이댔다.

직원이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다.

 

아차 싶었다.

난 취재하러 온 거지.

음음음.

 

정말, 제 버릇 남 못준다.

 

아으. 어쨋든 저런 인간들 쓸어다 흠신 패주고 싶어. -_-

2010/09/10 22:53 2010/09/10 22:53

지나간다농담

목숨 걸 듯 매달린 건, 모기 한마리 없어지는 여파 만치도 못한 흔적으로 남거나

되려 언제나 건성이었던 건, 하는 것 하나 없이 은행의 우량고객이 되도록 해주거나.

애닳던 이는 먼저 떠나고

사랑하는 이에게는 내가 가장 큰 상처다.

삶은 우연의 집합이어서, 꿈도 현실도 마냥 미끄러진다.

애당초 가닿을 곳이 있었던가?

 

20대가 이렇게 아물어간다. 남은 20대는 아물리는 데 쓰일련가.

벌어졌던 것도, 옹이가 됐던 것도, 원래 그랬던 것처럼, 내 살이 되어 간다. 흉터도 없이.

그래서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몇 년을 좋아하다가, 정작 연애한지 두달만에 차이는 이의 얘기만치나,

모든 게 지독한 농담 같다.

2010/09/09 08:10 2010/09/09 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