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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희망을 만드는 시대 : 조직노동자를 대신하여, 낡은 진보.좌파 정치를 대신하여, 모두가 시인이 되어 김진숙이 되어, 비정규, 해고노동자가 되어, 자발적으로 버스를 타고 투쟁 현장으로 거리로 나서는 시대..
다시 시인을 옥에 가두는 시절 : 시인과 같이 희망버스를 탓던 정치인들은 노동자를 버리고, 진보를 버리고, 혁명을 봉쇄하며, 아무곳에도 갇히지 않으며, 어느 양심에도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우(右)로 권력으로 금뺏지로만 향하는 시절..
여전히 시인이 옥에 갇혀있는 시대 : 황석영은 국영티비에 나와 입담을 자랑하고, 공지영은 대중스타가 되어 수만의 청중과 유력정치인들의 옆자리에 서는 시대..
이번엔 리얼리스트 소설가 이시백 선생이 나섰다. 노동시인 임성용과 송경동이 존경한다는 소설가가, 날카로운 펜을 들고, 풍자와 해학과 분노를 들고 거리로 나서신 것이다. 현실주의 문학행동과 실천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개인이 아닌 집단적 응전 방안을 모색해 나간다는 리얼리스트100의 실천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또 다른 희망을, 더 강력한 무기를 제공해줄 것이다.
그래서 다음주 화요일 저녁엔 시청 앞 재능농성장으로 모두가 자발적으로 다시 모여 봅시다!!
시인이 옥에 갇히는 시절에 대하여
-이시백
한 시인이 옥에 갇혔다.
참 오랜만의 일이다. 시인이 돈이라도 훔쳤는가. 아니면 누군가처럼 남의 더러운 돈이라도 받아 먹었는가. 그가 한 일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니, 그가 저질렀다는 잘못도 자신의 몫이 아닐 것이다. 그가 한 일은 일자리를 쫓겨난 노동자들을 위해 크레인에 오르고, 그들에게 '희망'을 넣어 주기 위해 버스에 오른 것이니 이것이 옥에 가둬 둘 일인가. 힘으로 말하자면 파리 한 마리 나꿔 챌 권력도 없으며, 돈으로 말하자면 '가난하고 외롭고 높아' 가을 바람에 나뒹구는 가랑잎보다 쓸쓸한 시인을 옥에 가두는 자들은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대체로 역사를 돌아보자면, 시인을 옥에 가둔 시절 치고 난폭하지 않은 때가 없었고 시인의 입을 틀어막은 군주 치고 거친 폭군이 아닌 시절이 없었으니, 이제 이 시절을 다스리는 힘을 논할 때 가히 거칠고 난폭한 시절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권력을 쥔 자가 현명하다면, 시인의 바른 말에 노여워하기보다 자신의 비뚤어짐을 겸허히 바로잡아야 할 것이요, 시인의 쓴 이야기를 거북해 여기기보다는 자신의 들척지근하니 썩어가는 바를 깨끗이 할 것이다.
시인은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경보기이다. 한 시대의 어둠을 미리 감지하는 감광 높은 감수성과 한 시절의 불의를 예민하게 잡아내는 비판이 그의 본연이며, 무기이다. 이제 그를 옥에 가두어 눈을 가리고 입을 막는 시절이라면 무엇이 남아 이 시절의 비뚤어지고 구부러진 바를 부르짖어 알릴 것인가. 그저 안으로 썩어 문드러질 뿐이다.
참으로 한 시절을 바르고 밝게 살려면 시인을 옥에서 내어 놓으라. 그에게 밤낮으로 부르짖게 하라. 송경동 시인을 옥에서 내어 놓아 '희망'을 외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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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지 선생님들의 투쟁, 재능농성장에서 세상을 말한다! 재능 거리특강
제목 : 사자는 들소를 어떻게 잡아먹는가?
- 노동자가 스스로 찾아야할 권리
강사 : 소설가 이시백
일시 : 2011년 12월 6일(화) 저녁 7시 30분
장소 : 재능농성장(시청광장 옆 재능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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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작가를 만나다]
이시백 장편소설 ‘종을 훔치다’를 만난 시인 송경동
우리시대 학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제2의 이문구라는 찬사를 받은 연작소설집 「누가 말을 죽였을까」에 이어 새로운 장편소설 「종을 훔치다」를 낸 소설가 이시백 형을 찾아 용산역에서 중앙선 전철을 탔다. 처음 내려보는 역, 운길산에 내리니 그가 봄 햇살처럼 환하게 반겨준다.
시인 송경동(왼쪽)과 소설가 이시백이 소설 「종을 훔치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송 시인은 “공장으로 변해가고 있는 요즘 학교에서 학생들이 상품으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냈다”고 평가했다.
어떤 이들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함을 주는 이들이 있다. 그가 그렇다. 그를 만날 때마다 나는 왜 시골 마을 입구 어디에나 서 있는 튼실한 당산나무들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강가에서 건네 줄 사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선 나룻배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조금은 오래되어 보이지만 제 역할에 충실한, 그래서 내적으로는 한없이 깊고 충만한 힘이 그에게서는 느껴진다.
이번 소설 「종을 훔치다」 역시 문제작이다. 제목 때문인지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자꾸 연상하게 되는 역작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왕당파에 맞선 스페인 공화파들을 돕기 위해 청년 시절 헤밍웨이 자신이 참전했던 스페인 내전의 비참을 담은 전쟁 소설이라면, 이시백의 「종을 훔치다」는 그가 25년 동안 몸담아왔던 또 다른 내전의 현장, 한국 보수 교육계를 정면으로 다룬 또 하나의 ‘전쟁’ 소설이다.
그가 경험한 한국의 교육 현장, 특히 사립재단 족벌들에 의해 운영되는 학교 현장은 더 이상 ‘교육’이 양립해 설 수 없는 이상한 ‘기업’이거나 ‘공장’이 되어 있다. 아이들은 어느새 볼모의 ‘상품’으로 전락해 있고, 꿈을 심어주어야 할 교사들은 어떤 자율성도 갖지 못한 채 작은 비리들을 재생산하며 스스로 좌절해 가야만 하는 패배자들이다. 또 다른 교육의 주체인 학부모들은 이런 구조적 교육 비리에 눈 감고 자신의 아이만이 생존자로 살아남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경쟁을 부추긴다. 그가 볼 때 우리의 교육 현장은 더 이상 무엇을 배우고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이들이, 우리 모두의 미래가 일상적으로 피습당하는 또 다른 학살지에 다름 아니다. 그 광경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직시해야 한다고 그는 오래된 사학재단의 성지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다.
‘그 폐허의 어느 지점에 서 있었는가’라는 물음에 그는 양극단의 박 선생과 변 선생의 어느 사이에 어정쩡하니 놓여 있었다고 어두운 얼굴로 대답한다. 그는 남양주의 시골 학교 교사로 살아온 25년 동안 단 한 번도 인문계 학교로 가지 않고, 공업고, 종합고 등으로 떠돌았다. 자신이 있을 곳은 ‘불량’이라 낙인찍힌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 믿었다. 그에게 교육은 잘나고 똑똑한 아이들을 더 똑똑하고 특출나게 만드는 영재 공장이나 시장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뒤처진 이들을 보듬어 일으켜 세워 함께 가게 하는 연대와 배려와 사랑의 공간이었다. 소설 속 박 선생의 꿈이 그렇듯 교직은 직장이 아니라 어느 신화 속 대장간처럼 새로운 세대들에게 제각각의 꿈을 제련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곳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그가 교단에서 싸워 왔던 보충수업과 야간 자율학습과 일제고사와 잘못된 교원평가와 더 강화된 신자유주의 입시경쟁제도가 순식간에 부활하는 것을 보며 그는 미련 없이 교직을 버렸다. 이미 생활공간을 과소비로 넘쳐나는 도회지를 벗어나 수동면 광대울이라는 첩첩 산골로 옮긴 지 십 여 년이 지나고 있었다. 현장에서 싸우지 못할 거라면 눈이 초롱초롱한 새내기 선생님들에게 ‘정규직’ 자리를 비켜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이젠 소설을 통해 우리가 아이들을 맡기고 있는 학교라는 공간이 어떤 곳인지를 증거하고 있다. 이 시대가 무엇을 다시 배워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어떤 삶들의 가치가 지켜져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어쩌면 우리 시대는 이 불편한 책을 다시 외면해 버릴 수 있겠지만, 소설 속에서 기지촌 흑인 혼혈아로 자라 온 정미가 그렇듯, 언젠가 우리는 잘못 울리고 있는 이 교육 현장의 종을, 이 사회의 종을 ‘다시는 울지 못’하게 훔치고 새로운 종을 매다는 새로운 프로메테우스들의 출현을 보게 될 것이다. 소설 속 ‘부대찌개’들이 연극제에서 특별상을 받을 때, 정미가 최우수 연기상을 받을 때 내 가슴께부터 뜨거운 것이 몰려 올라와 목 언저리가 쓰라렸다. 정미의 말처럼 나도 ‘다시는 울지’ 말자고 숱하게 다짐하며 살지만 이런 소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목 밖으로 넘길 수도 없이 크고 뜨거운 것으로 작은 목구멍이 메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오늘도 말없이 흐르는 북한강을 만나고, 요즘 그가 4대강 반대로 자주 들른다는 두물머리 언저리를 둘러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용산역에 내려 작년 한해 울고 웃던 철거민참사 현장을 둘러보는데 누군가 불쑥 아는 체를 한다. 경찰인가, 나도 모르게 움찔하는데 자주 찾아오던 촛불시민이다. 자신도 한번 둘러보고 싶어 왔다는데 쓸쓸해 보인다. 우리는 다시 어디로 어떤 시대의 ‘종’을 훔치러 가야 할까. 북한강변 매운탕 집에 남겨두고 온 소주 한잔이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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