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심층인터뷰] ‘영원한 사회주의자’ 오세철 동지

[심층인터뷰] ‘영원한 사회주의자’ 오세철 동지
 
 
<1회> “자본주의는 노동-자본 ‘적대’ 조정하지 않아... 국가는 자본과 동맹하는 기구에 불과”
 
 
 
[위클리서울=최규재 기자] “이 수업을 듣는 대부분은 졸업해도 경영자가 되기 힘들 겁니다. 남의 밑에서 일하는 임노동자가 되겠죠. 그래도 어떤 회사가 어떻게 경영되는지는 알아야겠죠. 억울하게 당하지 않으려면 말이죠. 임노동자의 입장에서 수업을 진행할 것입니다.”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79)가 재직시절 새학기 첫수업 신입생들에게 늘 던진 말이었다. 학생들은 경영학을 공부하며 마르크스를 읽었다. ‘경영자 이건희’도 마르크스를 읽었다고 한다. 임노동자들의 입장을 헤아리기 위해서였다는 블랙코미디 같은 우스갯소리가 나온다. 대기업 회장들과 임원들이 마르크스를 읽으면 읽을수록 노동탄압은 더욱 흉포해져갔다.
 
백골단이 기승을 부리던 1987년 어느 날은 오 교수 인생의 큰 전환기였다. 6월 항쟁 당시 이한열이 연세대 앞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지면서다. ‘강단 맑스주의자’였던 오 교수는 자신의 수업을 듣던 제자가 숨지자 이때부터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밝힌 후 이명박 정부 때는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사건으로 국가보안법에 연루되었고, 용산참사-쌍용차 사태 등 각종 시국사건 변론에 앞섰다,
 
오 교수의 입장은 분명하다. 이 모든 게 자본주의가 낳은 폐해라는 것. 지구상에 사회주의가 제대로 정착된 적도 없다고 덧붙인다. 사회주의를 표방한 북한도, 중국도, 러시아도 ‘사이비 사회주의 독재 국가’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북한 체제 역시 붕괴될 대상이라고 늘 주장해온 그다.
 
“과거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를 비롯 북한, 중국, 쿠바 등을 사회주의 국가로 오해했다. 일국 사회주의 건설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들 국가가 보여주었다.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는 자본주의 내에서 완성될 수 없다.”
 
자본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국가들도 비판의 대상이다. 실제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능력을 점차 상실하고 있으며, 계급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노동자들 앞에서 100년 전과 비슷한 이데올로기로 겨우 버티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혁명을 향한 어떠한 투쟁도 없었고 자본주의의 일시적 번영의 착시와 사회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복지국가 모델, 케인즈주의의 일시적 위기 극복 그리고 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신자유주의의 공격과 또 다른 형태의 케인즈주의의 활용 등이 지금의 자본주의의 위기를 넘기려 하고 있다. 전쟁의 위험 역시 도사리고 있다. 트럼프를 비롯한 민족주의, 국가 제일주의, 좌우를 막론한 포퓰리즘, 인종주의 그리고 크고 작은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긴장과 충돌은 지속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 현실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비노동’이 아니라 오히려 ‘반노동’에 가깝다는 것. 노동, 자본, 국가의 통합구조를 안착시키려는 시도가 민주노총의 불참으로 미완성이기는 하나 장기적으로는 형성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오 교수는 “국가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와 대립을 조정하거나 중재하는 기구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자본가 국가이고 자본계급과의 동맹하는 기구”라며 “여기에 노동계급마저 자본 계급 편에 선다면 그 기구는 자본계급의 단일기구이다. 계급의 대립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와 정부는 노동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는 반민주주의 국가임을 문 정부 스스로 천명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얼마전엔 오 교수와 늘 함께 거리에서 싸워온 원로 사회운동가인 백기완 선생이 영면했다. 백 선생이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당시 오 교수는 선거대책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노선은 달랐지만 백 선생과도 인연이 깊었던 오 교수는 여전히 착잡한 심정. 원로로서 바통을 이어받아야 하지 않느냐 묻자 “내가 왜 원로야, 원로라는 표현은 빼달라”며 멋쩍게 웃는다. 원로라는 표현을 ‘극 혐오’ 하는 오 교수. 영원한 ‘청년 맑스주의자’ 오세철 교수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오 교수의 요청대로 외국어 발음은 되도록 그대로 싣기로 했다. 이를테면 코뮤니즘의 경우 우리말로 ‘공산주의’라는 용어로 잘못 번역 되고 있고, 이는 특히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김일성주의, 남미 등의 민중주의와 구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 요즘 근황이 어떤가.
 
▲ 여전히 맑스주의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를 자처하는 북한, 중국, 러시아 등도 다 가짜다. 역사 이래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한 적 없었다. 그러니 사회주의자로서 예나지금이나 입장변화가 없다.
 
 
-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분위기와 달리 과거 정권과 별반 차이 없다는 비판 등이 제기되고 있다. 현 정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국제적으로는 국제 부르주아지(자본 계급) 사이의 경쟁·갈등이 제국주의 전쟁의 길을 열어놓고, 국내적으로는 역시 자본 계급 분파들의 담합과 쟁투가 계속되고 있다. 과거 문재인 대통령은 몇 가지 표어를 내걸었다. 첫째는 ‘함께 잘살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함께 잘살 수 없다. 자본주의가 이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말하는 사회는 억압, 착취가 사라지고 상품, 화폐. 시장, 계급 그리고 국가가 소멸하는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평화’다. 남북이든 북미이든 간에 제국주의 사이에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계급전쟁이 항존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평화는 위장일 뿐이다. 셋째는 ‘공정한 사회’다. 차별을 극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과 차별 자체를 넘어서자는 말은 다르다. 이 역시 자본주의를 폐절하지 않는 한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맑스주의의 진정한 복원에서 찾을 수 있다. 국내외 자본 계급의 현란한 수사나 ‘사이비 사회주의’에서는 진정한 답을 찾을 수 없다. 다시 시작하는 길밖에 없다. 맑스주의 이론과 실천으로부터 혁명을 통해 평화로 나아가야 한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합하는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하는 길이 인류의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고 싶다.
 
 
- 정권이 바뀌어도 근본적인 문제가 바뀌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한민국 과거와 현실을 진단하자면.
 
▲ 정치권력은 입법, 사법, 행정이라는 삼권 분립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영역의 분리, 기능의 독립성으로 체제의 견제와 균형을 이룬다고 보는 견해가 자본 중심의 민주주의의 골격이다. 코뮤니스트는 이러한 분리를 반대하고 평의회에 기반을 둔 대중(노동자, 병사 등)과 지역의 선출된 권력을 노동계급 민주권력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자본계급 선거와 의회를 둘러싼 자본계급 정치세력을 다루지 않는다. 여야를 불문하고 자유주의, 보수주의를 불문하고 그 권력의 본질이 같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386세력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에 결합한 민주화운동세력으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의 군사독재와 싸울 세력으로 우리사회 자본계급 민주주의의 정착에 공헌한 세력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특히 문재인 정부에 결합한 세력은 앞으로 자본계급 의회에 진출할 예비세력으로 그들의 전임자들과 유사하다. 이들의 부류는 대학, 언론, 사법부, 노동 등에 몸담았다가 자유주의 민족주의 자본계급 이데올로기의 동질성을 기반으로 사적, 개인적 인간관계로 문재인 정부에 가담했다고 본다. 이들은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것 같지만 사회주의나 코뮤니즘에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소부르주아(낮은 의미에서의 자본 계급)에 속한다. 그러면서도 보수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자본 권력에 편입되기를 갈망하고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활용하는 기회주의적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청와대, 정부, 의회, 법원, 언론기관 등에서 보이는 이른바 엘리트(교수, 판사, 정부관료, 청와대, 언론가, 시민운동 활동가, 노동조합 관료)들이 문재인 정부를 떠받드는 소부르주아 세력의 실체이다. 앞으로 이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자유주의 민족주의 자본계급 세력이 보수주의 자본계급 세력과 언제, 어디서나 연대하고 연합할 수 있는 세력임을 알게 될 것이다.
 
 
 
<2회> “어느 정권이든 집권 1년이면 실체 드러났고 노동계급은 정권퇴진운동 벌여”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위클리서울/ 오세철 교수 제공
 
- 코로나 문제를 떠나 전 세계는 경제위기를 수차례 겪었다. 어디서부터 문제를 들여다봐야 하는지.

▲ 19세기 마지막 수십 년 동안의 커다란 제국주의의 팽창은 극적인 성장률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 시기는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생활표준이 개선되면서 예기지 못한 번영과 진보의 시기로 기억되고 있다. 이는 유리한 객관적 조건뿐만 아니라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으로 조직된 노동자 운동의 영향력 증가의 덕이었고 개량주의의 출현의 기반이기도 했다. 이는 다른 형태로 수정주의, 개량주의에 대한 맑스주의 혁명가들의 자본주의 몰락 이론으로 나타났다. 위기 극복과는 거리가 멀게 카르텔과 신용을 통한 자본의 ‘조직’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응이며 이는 더 크고 많은 파괴적 수단으로 자본주의 모순을 증가시킨다고 지적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과학적 이론은 잉여가치의 추출과 그 실현과정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고, 잉여가치 추출의 과정에서는 이윤율 저하의 법칙이, 그리고 잉여가치 실현의 과정에서는 시장 포화의 한계 법칙이 위기의 기본이 된다. 이 두 가지를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틀이 요구된다. 지금의 위기는 잉여가치 실현의 막다른 골목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 한편으로는 위기라는 말이 와 닿지 않는 것도 현실이다.

▲ 자본주의 쇠퇴와 위기는 독립적이지만 상호의존적이다. 따라서 쇠퇴에 대한 인식은 대공황 시절과 같은 위기의 순간과 위기를 지금의 자본주의가 겪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1914년 이래 쇠퇴의 상태에 있음과 자본주의가 자랑하는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괄목할 성장률이 사실은 자체 재생산의 조건 창출이 점점 더 불가능해진 체제의 죽음의 고통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 지구상에 진정한 사회주의가 태동된 적 없다는 입장을 늘 고수해왔다. 수정주의 때문에 사회주의의 본질이 흐려졌다는 지적인데.

▲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혁명을 향한 어떠한 투쟁도 없었고 자본주의의 일시적 번영의 착시와 사회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복지국가 모델, 케인즈주의의 일시적 위기 극복 그리고 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신자유주의의 공격과 또 다른 형태의 케인즈주의의 활용 등이 지금의 자본주의의 위기를 넘기려 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능력을 점차 상실하고 있으며, 계급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노동자들 앞에서 100년 전과 비슷한 이데올로기로 겨우 버티고 있다. 트럼프를 비롯한 민족주의, 국가 제일주의, 좌우를 막론한 포퓰리즘, 인종주의 그리고 크고 작은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긴장과 충돌이 지속되고 있다. 세계자본주의 체제에서 크든 작든 제국주의가 아닌 국가는 없다. 이 때문에 전쟁의 위험 역시 늘 도사리고 있다.


-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북한, 무엇이 문제인가.

▲ 핵 폐기를 대가로 한 식량원조와 물질적 보상을 통해 북한 경제를 산업자본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로 세우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중국자본주의에의 의존과 미국 및 한국자본주의에서의 의존이라는 다른 선택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면서 김정은 권력이 유지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북한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독재국가다. 동시에 낮은 단계의 자본주의 국가로 읽어야 한다. 북한 자본주의를 파멸시키는 역사적 책무는 북한 주민들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져 있으나 이는 남북한을 비롯 동아시아의 노동계급의 단결과 세계노동계급의 단결을 통한 혁명투쟁에 달려있다.


- 한국사회는 여전히 노동 문제, 평등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자면.

▲ 문재인 정부의 노동과 노동계급에 대한 태도와 정책은 ‘비노동’이 아니라 오히려 ‘반노동’에 가깝다. 노동, 자본, 국가의 통합구조를 안착시키려는 시도가 민주노총의 불참으로 미완성이기는 하나 장기적으로는 형성될 전망이다. 국가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와 대립을 조정하거나 중재하는 기구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자본가 국가이고 노동계급과 동맹하는 기구이다. 여기에 노동계급마저 자본 계급 편에 선다면 그 기구는 자본계급의 단일기구이다. 계급의 대립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와 정부는 노동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는 반민주주의 국가임을 문 정부 스스로 천명하고 있다. 경제정책의 구체적 모습은 최저임금과 노동시간에 대한 법제화에서 드러난다.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의 착취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의 투쟁은 이 착취체제와 이를 규정하는 법을 반대하고 없애려는 투쟁을 몇 백 년 해오고 있다. 메이데이가 노동시간의 단축 투쟁임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의 원칙을 계층사이의 이해로 조정하고 노동시간을 변형근로제로 후퇴시키는 문재인 정부의 모습을 보며 노동계급은 어떻게 대응하는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노동자들은 어떠했는가? 반노동으로 나아가는 정부를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집권한 지 1년이 되자 그 실체가 드러났고 노동계급은 정권퇴진운동을 벌였다. 어느 정권도 예외는 없었다.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는 어디 있는가? 노동운동은 여전히 운동인가?


- 남북관계 문제는 사회주의자로서 난감한 과제일 수 있다. 통일 문제를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 촛불이 매개 되어 10년의 이른바 ‘적폐’가 정권교체의 문을 열었지만 가장 핵심적인 변화는 남북관계 개선이다. 끊임없이 지속되는 다양한 형태의 제국주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국가와 민족도 자유로울 수가 없고 남과 북도 예외일 수 없다. 남, 북, 미 그리고 세계의 공통화두는 평화와 번영이다. 평화는 계급전쟁을 종식시키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며 번영은 이윤과 계급불평등을 사라지게 하는 자본주의의 지속적 성장일 뿐이다. 갈라진 남, 북이 표면적이고 가시적 적대를 넘어 세계자본주의 체제 속에 부분 집합으로 나아가는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를 상상할 수 있다. 시간이 걸리고 우여곡절의 과정을 겪어도 이 과정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통합과정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북한은 개혁, 개방을 통해 점진적으로 국가자본주의로 공고해지고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연합, 연대할 것이다. 아직도 사회주의 건설을 말하는 형용모순이 존재하지만 사회주의 국가는 세계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삼척동자도 알게 될 것이다. 이 효과는 남쪽의 우리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아직도 보수주의 자본가들이 자유주의-민족주의 자본계급(특히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세력을 ‘좌파’, ‘빨갱이’, ‘친북’이라는 딱지를 붙여 이념 논쟁을 벌이는 것은 그러한 대립이 허위이며 지금이 그런 대립을 주장할 마지막 기회임을 알기 때문이다. 두 가지 형태의 자본 세력은 자본주의의 양면이며 보완적 관계임을 깨닫게 될 날이 멀지 않았고 이는 세계 노동자 투쟁과 혁명적 실천이 보여줄 것이다. 물론 이념적 재편 과정에서 지금까지 우리사회에 존재했던 ‘진보’, ‘자유주의’, ‘부르주아 사회주의’ 등의 개념이 정리되면서 자본에 맞서는 노동계급의 코뮤니스트 이념과 실천이 성숙될 것이기 때문이다.
 
 
 
<3회> “민중 심리와 의식 왜곡시켜 자본계급의 함정에 빠뜨리는 것 항상 경계해야”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위클리서울/ 오세철 교수 제공
 
- 백기완 선생이 얼마전 영면했다. 노선은 달랐지만, 많은 시간을 함께 했었다. 어떤 생각이 드나.

▲ 백 선생은 통일운동가이면서 노동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하지만 통일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pd(민중민주주의) 계열에선 민족주의자라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런 비판을 일삼았다.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운동 진영은 서로를 그렇게 비판하는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 백 선생은 늘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라고 자처했는데, 농담반 진담반 식으로 “백 선생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라고 받아치곤 했다. 백 선생은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사회운동을 했고, 백 선생의 영면으로 이제 그 운동의 마지막 세대가 마감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우리 노선에서는 애초 민중통일 운동보다는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한 시대가 저물고 다른 시대가 오고 있다. 백 선생의 시대가 어떻게 마감되고 있느냐, 앞으로의 시대와 과제는 무엇이어야 하느냐, 그것이 관건이다.


- 전쟁 위기를 종식시킬 대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한국도 제국주의 국가다. 중심과 주변의 차이밖에 없다. 한국과 일본의 긴장과 충돌은 제국주의 사이의 필연적 과정이다. 이 대결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것 역시 제국주의의 본질이다. 세계전쟁의 가능성은 100년 전보다 훨씬 커지고 있고 이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자본계급에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전쟁의 화약고는 늘 수면 아래 있다. 전쟁을 막아내고 진정한 계급의 평화를 혁명을 통해 이루어내고 인류를 구원할 대안은 오직 자본주의를 대체한 코뮤니즘밖에 없다. 전 세계의 코뮤니스트들과 노동자들은 100년 만에 다시 한번 혁명을 통해 평화를 이루자는 코민테른의 교훈을 상기하고, 100년의 ‘사이비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청산하고 자본주의의 질곡과 재앙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혁명적 무기, 세계 혁명당 건설을 함께 선언하고 그 구체적인 역사적 과업에 나서야 한다.


- 지금까지 얘기를 들어보면, 현재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 특성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겠다.

▲ 인간의 필요가 아닌 이윤을 위한 생산, 노동계급 착취를 대가로 한 비용효과의 영원한 추구, 피착취자 삶의 조건에 대한 폭력적 공격, 국가와 기업 사이의 치열한 경쟁 등이다. 프랑스에서 ‘자본주의는 바이러스’다, ‘혁명은 백신’이라는 구호가 일반인 입에 오르고 있다고 한다. 몇 개월 동안 세계 사람들은 코로나에 대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대응 방식을 지켜보고 있다. 지역봉쇄, 이동금지, 거리 두기, 재정지원, 실업급여 등의 재정금융 지원, 그리고 삶의 조건 향상을 위한 노동자, 민중 행동에 대한 공권력의 억압과 폭력, 인종주의, 민족주의를 이용한 적과 희생양 만들기 등등 100년 동안 자본주의 위기 시기마다 자본주의 국가와 자본계급이 활용한 방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노동계급을 포함한 모두는 알고 있다.


- 대안은 무엇인가.

▲ 지금은 노동계급의 광범위한 투쟁이 건강, 삶, 안전, 공장폐쇄 등의 방어적 투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 투쟁이 지구적 규모로 확장되고 있고 계급영역 내의 기본투쟁으로 진전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본계급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인종주의, 민족주의 외피를 쓰고 노동계급을 포함한 민중의 심리와 의식을 왜곡시켜 자본계급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여기에 코뮤니스트들과 그들 세력의 역할이 중요하다. 저항, 혁명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세계 노동계급과 함께 전쟁, 억압, 착취의 고리를 끊어내고,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합하는 코뮤니스트 세상을 세계혁명을 통해 만드는 길이 코로나 이후 시대의 역사적 임무일 것이다.


- 끝으로, 앞으로 과제가 있다면.

▲ 옛 노동운동에서는 사회주의가 어느 정도 민족 선구자 뒤에서 실현될 수 있고 세계 공동체는 ‘사회주의 경제’의 점진적 융합 과정으로 창조될 수 있다는 혼란스런 생각이 가능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험처럼 일국 사회주의 건설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코뮤니즘이 결정적으로 만들어지기 전에 자본주의는 모든 곳에서 결정적으로 파괴되어야만 한다. 코뮤니즘은 자본주의 내에서 건설될 수 없다. 한편에서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순환적 위기’로 규정하고 조용히 참고 기다리면 비바람이 그치고 순수한 항해를 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특히 이러한 입장이 이른바 ‘사회주의 진영’에까지 파고들어와 계급투쟁을 희석시키고 ‘건강한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이는 19세기 자본주의에서 일어났던 광경이며 20세기와 21세기 자본주의 위기에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논리가 되어버렸다. 이는 상승기에 있고 무한히 확장되는 19세기 자본주의의 위기였고 맑스는 ‘코뮤니스트 선언’에서 이 위기를 과잉생산의 전염병으로 불렀다. 그런데 과잉생산의 경향은 기아, 가난, 실업을 가져왔지만 상품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은 상품, 너무 많은 산업, 너무 많은 자원 때문이었다. 또 하나의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은 경쟁을 통해 무정부체제로 끌고 가는 자본주의의 기능인데 새로운 임노동과 상품을 찾아 새로운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확장하고 심화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19세기는 위기의 순간을 건강한 심장이 뛰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열어갈 노동자 국제주의에 입각한 노동계급의 과제는 무엇일까. 우선은 비타협적인 자발적 계급투쟁을 전개하는 일이다. 계급의 투쟁을 엇나가게 하고 자본의 분파와 연결시키는 모든 세력(노동조합, 좌파당, 민족해방전선 등)으로부터 독립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세력들과 치열하게 투쟁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국제적인 것처럼 노동계급의 투쟁도 국제적이어야 한다. 나아가 세계의 인류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운동이 계속되어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