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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전선 비판과 혁명조직의 역할
- 다시 꺼내든 낡은 당 건설 노선 비판 -
노동자의 주변에는 항상 자신들이 노동계급을 대변하거나 지도하는 세력이라 자임하는 정파와 파벌이 득세하고 있다. 여기에는 소수이지만, 노동계급의 해방과 사회주의를 실천한다는 세력도 일부 포함된다. 그들은 항상 "노동계급이 역사와 혁명의 주체이고... 부르주아 국가를 전복하고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여 사회 전체를 통제해야만 노동해방에 이를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과 권력 장악 이후까지 일관되게 노동계급을 권력과 투쟁의 주체로 세우는지, 아니면 반대로 계급을 대리하거나 이용하는 역할을 하는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별히 한국에는 사회주의-혁명 세력을 자임하면서 반(反)자본주의, 사회변혁, 노동해방, 사회주의자 등을 내걸고 노동자 운동에서 이른바 좌파 블록을 형성한 세력이 존재한다. 이들이 좌파 블록으로 모인 것은 한국의 노동운동 내부에서 온갖 폐해를 끼치며 기득권을 누려온 다수파 운동(이른바 자민통으로 지칭되는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지만, 엄밀히 보면 자기 운동의 최종 목표와 노선을 명확히 하지 못한 운동의 퇴보에 기인한다. 이들은 쇠퇴기 자본주의 위기 상황에서 자본주의 개혁을 넘어선 혁명적 이행 전략을 가진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 투쟁에서는 사회주의와 무관한 실천만을 하면서 대외적으로 급진적 구호와 기회주의적 전술을 섞어 자신들의 조합주의, 노동자주의, 선거주의 실천을 합리화하고 있다. 이렇듯 ‘좌파’의 정체성은 단지 다수파 운동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한 혁명적 기질과 줄서기로 드러낼 뿐이다.
이들 좌파 중 다수는 혁명적 이행 전략인 노동자평의회 권력 창출이라는 전략적 과제를 소수파 운동의 한계 속에서도 현실에서 혁명적 실천을 통해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전술을 바꾸면서 전략적 과제를 혼란에 빠트리는 운동을 하고 있다. 계급이 처해있는 현실에서 출발하면서도 장기적 전망에서 현실의 장벽을 넘기 위한 실천, 즉 노동계급이 혁명적 계급의식을 획득하고 자기 조직화로 나아가는 장기적 목표를 향해 꾸준히 실천하지 않고, 단기적이고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전술을 바꾸는 것이다. 공동전선의 일종인 좌파 블록이 정치노선과 전략적 목표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우파에 대한 상대적 반(反)정립으로 형성되는 경향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더욱이 이들이 개량주의 세력을 대중적으로 폭로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입당 전술과 노동자 공동전선은 오히려 개량주의 세력에게 노동자성을 부여하고 혁명 세력과 함께한다는 환상을 유포해 그들의 본질을 가려주고 입지를 강화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동맹은 자신들이 다수파를 장악하지 않는 한 그들과 함께하는 내내 개량주의 노선을 묵인하게 된다. 결국, 개량주의 세력과의 동맹을 옹호하는 전술의 결말은 노동자들이 그것으로부터의 단절하는 시간을 지연할 뿐이다. 더욱이 이러한 전술의 남발로 인한 이합집산과 분열의 반복은 노동자에게 정치 운동의 신뢰를 잃게 할 뿐 아니라, 현장 투쟁에서 단결을 실질적으로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이들은 자신이 계급의 전위 역할을 해야 한다는 착각과 대중을 지도해야 한다는 자만에 빠져, 온갖 현장 투쟁에 개입하면서 투쟁의 목표와 원칙을 훼손하거나 계급의식 발전과 자기조직화에 걸림돌이 되어 왔다. 노동계급 전체의 이해관계와 운동의 발전에 복무하지 않고, 자기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당면 정세에 조급하게 개입하는 운동이, 장기적 전망이나 운동의 본질에 접근하는 투쟁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계급의 전위란 자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전위는 계급투쟁 과정에서 계급의 가장 의식적이고 전투적인 부분을 조직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매우 길고 힘든 계급의식 발전 과정에서 (계급투쟁의 퇴조-상승의 모든 기간에) 운동의 최종목표를 명확히 하고 코뮤니스트 강령을 투쟁하는 노동계급이 받아들이고 스스로 방어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혁명적 소수의 신뢰와 영향력이 노동계급 안에 깊이 뿌리 내려 주요한 투쟁의 중심에 설 때 비로소 계급의 전위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전위(혁명조직)가 노동계급을 혁명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계급 안에 혁명적 부분(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전위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조직은 적대하는 계급과의 투쟁이 있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계급 안에서 계급과 함께 투쟁하면서 혁명 강령을 방어하는 존재로 자리 잡아야 한다.
그런데 여전히 노동계급 주위에서 전위 역할을 한다는 세력들은, 계급투쟁 개입을 노동자 투쟁을 대리하거나 자신들이 투쟁의 배후 역할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은 ‘공동전선’이라는 외피를 쓰고 상층 중심의 공동전선(투쟁), 입당 전술, 노동자 후보-선거연합, 계급연합, 노동자정부 등의 혼란스러운 전술을 남발하고 있다. 이러한 공동전선은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는커녕 공동전선의 상대에 따라 강령의 수준을 낮추고 전술의 원칙을 바꿔가면서 계급의식을 혼란에 빠트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직 노동자의 절대 다수가 부르주아의 책략에 눈을 감는 상태에서, 혁명조직의 책무는 혁명의 최종목표를 보다 명료하고 직접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알려 행동을 촉진하는 일이지, 자신의 정치를 부르주아 대중 정치의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아니다.
당 건설 경로에서도 철저한 강령 원칙과 실천적 검증에 따른 혁명적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세력의 재구성을 통해 당 건설의 기반을 마련하고,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새로운 주체와 코뮤니스트 노동자가 계급투쟁 속에서 직접 만나 혁명적 주체를 형성하고 자기 조직화를 이루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다.
그런데 이들은 강령적 실천과 혁명적 주체의 자기 조직화라는 본질을 망각한 채, 조급한 정세 대응에만 매달리거나, 자기 조직 유지와 양적 확산만을 위해 강령원칙을 폐기하면서 당 건설 운동을 지속해서 후퇴시켜왔다.
이제는 반성 대신 생존을 위해, ‘사회주의-좌파 대선후보를 통한 당 건설’이라는 이름만 바뀐 낡은 전술을 들고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은 정치 노선이 불분명한 의회주의 제도권 소수 정당과 (사회주의혁명 노선을 포기한) 비(非)제도권 소수 정당이 결합한 사회주의 대중정당 건설로 표현되었다. 이들 중 한 축은 9년 전에 선거주의 세력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다른 한 축에서는 준비되지 않은 위로부터의 대선 투쟁(후보전술)을 통해 그리고 실패한 진보정당 운동과 야권연대에 대한 반(反)정립 운동을 통해 투쟁 동력과 당 건설 주체를 확보하여 당 건설을 할 수 있다는 거짓을 유포했다. 결국, 공동전선을 통한 단계론적 계급정당 건설 노선이 선거 전술과 혼합되어 타락하는 운동 세력의 유일한 생존전략이 되었었다. 그리고 9년이 지난 지금, 제대로 된 반성과 성찰도 없이 이들은 더욱 우경화하여 ‘사회주의 좌파 후보’ 간판을 내걸고 부르주아 제도권 정당으로 향하는 최악의 생존 전략을 채택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도 없다. 이제라도 사회주의당 건설 운동을 포기하고 부르주아 정치의 좌파로 전향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노동자들에 대한 신의며, 운동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다.
이들이 향하는 제도권 정당에 대한 비판은 아래 글로 대신한다.
"민주주의 공화국은 자본주의를 보호하는 가능한 최고의 정치적인 외피이다. ... 자본은 ... 그 권력을 매우 공고하게 확립하는데, 부르주아-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어떤 사람이나 제도, 또는 어떤 정당의 변화도 이를 흔들 수 없다." (레닌, 「국가와 혁명」)
"민주주의" 선거는 부르주아지 손에 있는 권력을 합법화하는 기만적인 정치 무대이다. 실제로 부르주아지는 이른바 "공공의 의견"을 매스미디어부터 시작하여 학교, 종교 제도로 모양 짓는 도구를 통제한다. 이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제도적 결정은 자본가들의 경제적 필요와 양립 가능한 것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국가의 관리자들은 지배계급의 대표들이다.
이러한 제도를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가들의 착취에서 자신을 해방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완전히 환상이며, 이 제도들이 진실로 부르주아지가 경제적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보유한 가장 훌륭한 정치적인 수단인 한 그러하다.
다양한 제도권 정당들은 지배하는 자와 그 반대에 있는 자들 사이에서 기만적인 게임을 수행한다. ‘당’끼리 대립 뒤에는 종종 부르주아지의 서로 다른 분파 간의 권력 투쟁이 있을 뿐이거나, 더 단순하게는 더 안락한 제도권 의석에 앉으려는 서로 다른 정치인 간의 무의미한 경쟁이 있을 뿐이다.
본질적으로, 어떤 제도권 정당도 이 체제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최선의 경우에도 정당은 관리에 있어서 환상에 불과한 차이를 제안할 뿐이다: 보다 인간적인, 공정한, 더욱 ‘민주적인’ 얼굴의 자본주의 등. 의회에 의석을 차지하고 있거나 그러고 싶어 하는 자칭 코뮤니스트 정당들 또한 진정한 혁명적 강령을 보유하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그들은 노동자 투쟁을 위한 제도적인 경로라는 환상만을 확산시킬 뿐이며, 대부분 언제나 (이른바 ‘급진 좌파’ 정당과 마찬가지라도) 지역 기관들에서 다른 부르주아 정당과 협력한다.
따라서 우리의 약속은 선거에서 대중 투표를 목표로, 제도권 내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정당의 건설이 아니다.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당은 국제적이고 국제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정치적 기준점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급정당이다.” (‘우리는 모든 제도권 정당에 반대한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
자본주의 착취체제가 지속하는 한 계급투쟁에 진공 상태는 없으며, 오히려 계급투쟁과 혁명적 계급의식을 담아낼 그릇이 부족할 뿐이다. 계급투쟁과 계급의식의 발전 없이 혁명당 건설은 불가능하다. 계급투쟁의 깊이는 당 건설의 주체를 담보해주고, 계급의식의 발전은 강령으로 표현된다. 당 건설의 주체와 강령을 포기한 당 건설이야말로 진공 상태에서의 당 건설과 같다. 더욱이 진공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진흙탕(부르주아 선거판)에 빠져버리는 것은, 그동안 진공 상태에서 운동을 해왔다고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혁명의 승리는 계급의식이 혁명 강령에 근접했을 때 현실화한다. 이때 당과 계급은 차이는 가장 가까워지며, 비로소 프롤레타리아 혁명정당, 프롤레타리아 대중정당으로 현실화한다. 따라서 계급의식이 정체되어 있거나 혼란스러운 일상시기에 대중정당을 건설하겠다는 것은 혁명과는 거리가 먼 개량주의 당을 만들겠다는 의미이다. 또한, 강령에 입각한 혁명적 실천에 기반을 두지 않고 (다수의 비활동 당원을 포함한 채) 노동조합, 시민사회 활동가들을 모아 활동가 당을 만들겠다는 발상은 계급의 일을 대신하거나 관료적으로 관리하는 대리주의 당으로 향하게 된다.
우리가 건설할 당은 선거가 아니라 계급전쟁을 준비하는 당, 제도권 내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정당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위해 부르주아 정치로부터 철저하게 독립한 계급 정당이다. 자본주의 쇠퇴기, 끝 모를 위기의 시기, 노동계급에 필요한 당은 국제적이고 국제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과 코뮤니스트혁명의 정치적 기준점 역할을 하는 세계혁명당임을 명심하자.
2020년 11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 이 글은 「코뮤니스트」 12호에 실린 글을 보완하여 재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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