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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권리투쟁, 자본주의 모순을 드러내다
제22회 420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맞이하여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는 출근길 선전전을 진행했다. 2001년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참사 이후 22년이 지났지만, 정부가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시혜와 동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전장연은 지적했다.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은 정부가 정한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이 장애인의 수많은 차별과 억압을 은폐시키는 날로 기능하기에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모든 차별에 맞서 함께 싸워나가는 ‘장애인차별철폐의 날’로 만들어나가기 위해 장애·인권·노동·사회단체들로 구성된 공동투쟁기구이다.
그동안 전장연은 단순히 장애인 이동권 보장뿐만 아니라 장애인 권리 확보를 위해 4대 법률(장애인 권리보장법, 장애인 탈시설 지원법, 장애인 평생교육법, 장애인 특수교육법) 제•개정과 이와 관련된 장애인 권리예산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 장애인 권리 요구는 최근의 지하철 탑승 시위로 사회적인 관심사가 되면서 알려졌지만, 사실은 오래전부터 주장해 온 내용이다.
전장연은 장애인 권리 관련 예산 증액을 요구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권은 전장연이 요구한 증액 예산 중 106억 8,400만 원(고용노동부 장애인 고용관리 지원 사업)만을 반영했다. 이는 전장연 요구안의 0.8%에 불과하다. 물론 이전 정권에서도 장애인 권리 관련 예산에 대한 무관심과 방관자적 자세는 다르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방치와 무시, 억압으로 일관하였고, 결국 장애인이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예산이 반영되었다. 게다가 서울교통공사는 전장연을 상대로 지난 6일 서울중앙지법에 6억여 원의 손해배상 소송까지 제기했다.
지난해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파업과 화물노동자 파업을 제압한 이후 윤석열 정권의 강경 대응 기조는 자신감을 얻었고 서울시의 대응도 그 연장선이다. 서울중앙지법은 민사에 대해 전장연이 시위를 중단하는 대신 서울시가 19개 역사에 내년까지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라는 조정안을 내놓았다. 시위가 5분 넘게 지하철 운행을 지연시키면 전장연이 공사에 회당 500만 원씩 지급하는 조건도 달았다. 하지만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는 법원의 강제조정 안을 거부했다. 윤석열 정권과 서울시는 장애인들의 절박하고 정당한 투쟁을 ‘불법’, ‘민폐’로 매도하고 혐오를 조장하면서, 장애인들을 대화 상대가 아닌 제거 대상, 지배 질서에 대한 무질서의 원천으로 지목하며 강경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권을 위한 ‘전장연의 시위가 비장애인의 불편과 비용 낭비를 초래한다’라는 논리는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인 ‘파업이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노동자의 권리와 생산 손실을 초래한다’라는 자본가계급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
장애인의 권리는 이동할 권리,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권리, 일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등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이다. 이런 점에서 장애인의 권리는 허울뿐인 정의와 공정으로 치장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장애인에만 국한되지 않고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모든 프롤레타리아트에도 해당한다. 이는 장애인 권리투쟁에 노동계급의 연대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 사이 협상은 계급적 역량과 투쟁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한데, 사회적 약자/소수자의 요구가 협상테이블에 오르기 위해서는 더욱 강력한 계급적 연대가 필요하다. 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시위는 노동자의 파업과 같이 장애인 권리예산 증액을 위한 실질적인 협상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이다. 지난 2001년 오이도역 참사를 계기로 시작된 장애인 이동권 보장 투쟁은 장애인 권리 요구와 함께 20년 넘게 지속해 왔지만, 이번처럼 장애인들이 대중교통 탑승 등 노동과 일상 공간으로 나와 자신을 집단으로 드러냈을 때 그나마 사회적 관심과 논의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투쟁을 통한 권리 쟁취의 역사
한국보다 장애인 권리가 훨씬 더 보장되는 이른바 장애인 복지 선진국의 장애인 권리도 끈질기고 처절한 투쟁을 통해서 쟁취한 결과이지, 자본주의 사회와 정부의 선의로 주어진 게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1970년대에 장애인 운동단체가 건설되면서 장애인 권리투쟁이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 1995년에는 장애인들이 버스와 기차를 점거했다. 약 1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장애인들은 이 싸움은 "모두를 위한 대중교통"을 만드는 거라고 주장하며 교통수단에 자기 몸을 수갑으로 연결하는 등 격렬한 투쟁을 이어갔다. 이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 2015년 6월에는 중증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생활하고 일할 수 있도록 고안된 정부 보조금인 자립생활기금(ILF)을 폐기하려는 정부 계획에 항의하기 위해 장애인 활동가들이 영국 의회 하원 건물 로비를 점거했다.
· 2017년 영국의 철도노동자는 자본의 장애인과 노인을 위한 공공 안전 조치와 평등한 권리를 후퇴시키는 정책에 맞서 파업을 진행했다. 장애인에 대한 공공안전 조치의 후퇴는 철도 이용객들에 대한 안전 조치 후퇴, 철도노동자에 대한 구조조정과 노동강도 강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1977년 샌프란시스코 연방 건물을 점거해 26일 동안 농성을 벌인 역사적인 투쟁과 1978년부터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장애인들이 버스 운행을 막은 것을 시작으로 십수 년간의 장기 투쟁 끝에 '미국장애인법'(ADA)을 관철했다.
· 2006년에는 청각 장애 학생들이 워싱턴 DC의 갤러뎃 대학교(세계 유일의 청각 장애인 대학)에서 점거 투쟁을 벌였다. 학생들은 청각 장애인 문화 발전에 전념하지 않겠다는 차기 총장의 임명에 반대하여 시위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모든 입구를 막고 대학 건물을 점거하여 학교를 폐쇄했다. 이에 경찰이 점거 건물을 습격해 130명 이상의 청각 장애 학생들을 체포했다. 경찰은 1960년대 이후 워싱턴 DC에서 가장 큰 대규모 체포라고 밝혔다. 하지만, 점거는 계속되었고, 다른 청각 장애인들은 갤러뎃 대학과 같은 청각 장애인 '텐트 도시'를 만들어 지지를 보여주었으며,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 50개가 넘게 만들어졌다.
폴란드에서는 2014년 장애인 부모들이 폴란드 의회를 점거했다. 장애인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위해 정부가 지급하는 적은 돈으로 살아갈 수 없는 부모들이 행동에 나선 것이다. 의회를 점거한 이들은 국제적인 차원에서 관심과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우리는 전 세계의 언론인들이 우리의 행동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행동이 합법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녀들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해 수년간의 투쟁 끝에 이러한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실제 처음 활동을 시작한 때와 같은 상황에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승리하지 못한다면, 분명히 패배 후에 다시는 우리 자신을 회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 나라에서, 그것을 위해 싸우지 않고, 자녀들의 삶과 존재에 대한 두려움 없이, 정상적으로 살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매우 사랑하지만, 우리의 사랑으로 음식 문제를 해결하거나 치료를 할 수 없습니다. 의회에서의 이러한 시위는 정부가 듣지 못하거나 적어도 모른 척하는 우리의 결단력과 절망의 외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장애인 권리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그냥 얻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투쟁과 연대가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 노동자들은 역사적으로 대공황 시기에 견고한 단결과 파업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점거 투쟁’을 시작했고, 자본가들은 그들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해 법률에 호소하며 경찰을 동원했다. 하지만, 자본가에 맞서 파업이 필요한 노동자들은 이러한 논리에 맞서 투쟁을 지속했고 투쟁 형태를 발전시켜 왔다. 장애인들의 대중교통과 입법기관 점거 투쟁은 생산의 주인인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생산을 멈추듯이 사회의 주인인 장애인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이동 수단을 멈추고 법 제도에 압력을 행사하는 정당한 수단이다.
자본주의의 ‘장애’ 개념과 노동계급의 연대 필요성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과 임노동의 관계에서 잉여가치를 창출한 잉여노동이 이윤의 원천이 된다. 이윤추구 압박은 노동강도에 대한 압박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노동강도는 높아지며, 이러한 노동강도와 노동생산성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적 고립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장애 개념에 대한 기원이었다.
“신체적으로 손상을 입은 사람을 장애인으로 만드는 것은 사회다. 장애는 우리가 가진 손상 위에 부과되는 어떤 것으로 그것은 우리가 아무런 필연적인 이유 없이 사회에 대한 완전한 참여로부터 고립되고 배제됨으로써 초래된 것이다. 이렇게 장애인은 사회 안에서 억압받는 집단이 된다.” (영국 「분리에 저항하는 신체장애인 연합(Union of the Physically Impaired Against Segregation)」, 1976년)
이러한 개념은 한국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모자보건법 14조에서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예비 부모의 낙태를 허용•유도하고 있다. 지난 문재인 정권에서는 형법상 낙태죄를 남겨 두고 낙태 허용 범위만 일부 확대한 형법 270조 낙태금지 조항이 있다. 겉으로는 상충하여 보이지만, 낙태금지법과 모자보건법은 한편으로 우생학적으로 우수한 인간의 결혼 및 출산을 장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열등한 인간의 출산을 금지하는 국가통치 장치이며, 자본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결과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장애의 문제는 차별과 배제에 대한 문제 제기뿐만 아니라 가치 창출 기여도에 따른 구분에 대한 문제 제기도 필요하다.
장애인 권리투쟁은 물리적 문턱과 감각의 문턱, 주체성의 문턱과 관계의 문턱을 파괴해야 하는 싸움이다. 장애인의 자립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문제 제기는 결코 따로 일 수 없다. 장애인의 자립 생활을 위한 권리투쟁은 장애인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의 문제이고 노동계급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위기가 심화하면서 국가는 장애인을 위한 복지를 삭감한다. 경제위기가 아니더라도 장애인 권리투쟁이 약해질 때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 위기 전가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계급이 밀리면, 그 고통은 취약한 곳으로 향한다. 장애인과 노동자들이 견고하게 연대하지 않으면, 자본가계급은 노동계급 내부의 분리,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분리를 통해 공격을 강화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장애’는 사람들이 할 수 있어야 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특정한 것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한다. 자본주의는 특히, 장애인과 노동계급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모두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잉여와 생산의 논리를 만들어냈다. 코뮤니즘은 사람들이 각자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여하는 원칙에 따라 생산의 자체 관리를 통해 자본주의의 배타적 관행을 극복하고 자본주의 생산의 기반이 되는 소외의 논리를 극복한다. 손상과 같은 요소를 떠나 모든 사람이 사회의 재생산에 완전하고 평등하게 통합되는 것이 코뮤니즘의 목표이며, 각각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의 기초가 될 것이다. 이것은 장애해방과 노동해방이 모두 자본주의 체제를 폐지해야 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장애인 권리투쟁이 장애해방을 위한 운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와의 투쟁이 필요하고, 이는 노동계급의 이해관계와 일치한다.
장애인과 노동계급이 연대하여 장애인 권리 쟁취하자!
자본주의 위기 전가에 맞서 생존권 투쟁을 전면화하자!
장애인과 노동자의 희생이 아닌 자본가계급과의 계급전쟁으로!
2023년 4월 20일
제22회 420장애인차별철폐의 날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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