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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생각_펌 - 2007/07/23 19:43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지나치게 긴 하루다.

 

협상 가능 대상인지 아닌지부터 옆나라 눈치 보며 따지는 꼴이, 그 모습을 여과없이 대중에게 투여하는 언론의 모습이,

도저히 사람 목숨 걸린 사안에 대한 취급이라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살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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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3 19:43 2007/07/23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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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7/22 12:51

 

세상의 눈과 귀가 된 미디어 자극적인 소재만을 쫓아가는 사이,
우리들의 사는 세상엔 전쟁, 살인, 강간, 빈곤 등
인간 내부의 잔인함만을 확인할 수 있는 각종 인간성 상실의 현실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과연 '인간답게' 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자연스러운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오랜만에 들고 나온 그의 소설 [파피용]에서 주인공들이 선택한 인류 희망의 쟁취 방식은 바로 '탈출'이다.

 



과학자 이브가 발명한 빛으로 가는 우주선 모형, 그가 발견한 20조 킬로미터 너머 인간이 살만한 환경의 행성으로 이 모든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에게 인류의 마지막 희망은 이 몰락해가는 지구를 떠나는 것이다.
뜻을 함께 하는 재벌 맥 나마라, 항해사 엘리자베트, 기획및 관리자 사틴, 환경 및 심리 전문가 아드리앵 등은
20조 킬로미터 떨어진 행성까지 14만4천여명을 태우고 1000년에 걸쳐 항해할 우주선을 만들어 마지막 희망의 전달을 시작한다.
우주선 안엔 중력과 인공태양을 만들어지고 노아의 방주마냥 동물, 식물 등 모든 필요한 생물체와 냉동 수정란이 담겨졌다.

 

처음엔 좋았다.
그들은 이미 각종 폭력을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다고 판단한 정치가, 공권력, 종교인, 군인 등을 배제시켰고
농부, 요리사, 대장장이, 건축가, 장인, 예술가 등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전문가들을 선발한 상태였다.
그들은 자연 친화적 소재로 원하는 곳에 집을 지었고, 협동노동을 하였고 그렇게 행복한 듯 했다. 사람이 죽으면 흙에 묻히고 그 위에 나무를 심어졌다.
그러나 불현듯 발생한 첫 살인 사건을 시작으로 파피용호는 인류가 몇천, 몇만년을 걸쳐 겪었던
공권력과 왕으로 상징되는 권력의 창출, 비노동, 환경의 생존을 위한 반란, 전쟁 등을 겪게 된다.

 

그리고 결국 1000년이 조금 넘어 행성에 도착할 즈음엔 단 6명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중 행성에 착륙할 수 있었던 건 단 2명.
또 수정란으로 부화시킨 뱀에 물려 1명 사망.

 

혼자 남은 아드리앵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잇지 못했다는 좌절과 외로움의 세월을 보내다가 문득 수정란 중 인간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수정 시 필요한 골수를 얻기 위해 자신의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수정란을 부화시킨다.
그렇게 태어난 에야에게 아드리앵은 자신도 잘 모르는 선대의 역사를 끊임없이 이야기해준다.
그러나 에야는 난청 끼가 있는 지라
아드리앵을 '아담'이라 부르고,
우주선 만들었던 '이브'라는 이름을 자신에게 부여한다.
그리고 오래전 소형 우주선으로 탈출했던 사틴을 '사탄'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것이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생각해낸 인류 생존에 대한 단 한가지 놀라운 추측이다.

 

이것은 우주의 의지일지는 모르나

이대로라면 인간은 영원히 진보를 모르고 쳇바퀴만 돌리고 있는 다람쥐일 뿐이다.

 

그야말로 인류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성과 권력욕, 소유욕에 대해 거대한 두려움을 품게 된다.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지도 모른다.

모든 인류가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한 비결은 개미와 같은 공동체 사회의 구현일 것이라고...

그러나 행복의 기준같은 거, 사람마다 다른 게 당연하지 않을까?

쥐와 같이 각개격파의 이기주의만이 행복이라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지 모른다.

희한한 건 쥐나 개미 양쪽 집단 모두 같은 비율의 높은 생존률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베르베르는 질문하고 있다.

개미처럼 살건지 쥐처럼 살건지...

물론 개미처럼 살거라고 말하길 바라면서...

 

그러면서 살포시 마지막 주문과 같은 말을 내뱉는다.
'영원히 탈출을 계속할 수는 없다'
물론 이것이 베르베르의 마지막 외침이기는 하나
과연 가능한 것인지는 우리의 가슴 속에 대고 물어야 할 일이다.

 

* 사족 - 이번 소설은 베르베르의 이전 작품에 비해 극히 소품적 성격의 글이다.

그래서 실망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나 역시도 살짝 실망이다.

1000년의 역사를 [개미]만큼 풀었어도 좋았을 법 한데,

더이상 글 쓰기 싫었는지 몇 페이지로 순식간에 정리를 해버렸다.

담긴 아이디어는 참신하나 상당히 아쉬운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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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2 12:51 2007/07/22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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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생각_펌 - 2007/07/18 15:32

1. 같은 빈소 다른 죽음

 

11년 전 할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어린이집교사 시절, 2박3일로 직장에서 합숙하면서 교구전시회를 준비하고 몸은 떡이 되어 집에 들어가보니,

내 여동생이 검은 상복을 준비하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곤한 와중에 머리 속을 관통하는 '찡'하는 느낌,

장례식장에 가자마자 울먹이던 우리 엄마의 작은 어깨를 감싸안았던 느낌,

교구 전시 준비로 모자란 잠과 온갖 본드에 취한 몸임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했던 느낌...

 

그때는 다 그랬다.

내 또래 친동생과 사촌들까지 우리들이 겪을만한 첫번째 죽음이었고,

할아버지보다 10년은 거뜬히 더 사셨을만큼 마음도 몸도 건강한 할머니가 대형트럭에 치인 건 정말 갑작스런 사건이었다.

 

그래서 당황했다.

얼떨결에 맞은 충격의 망치는

몇개월이 지나고나니 더욱 더 효과를 발휘했다.

난 아마도 냉혈동물임에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빈자리는 충분히 인식 가능한 수준이었다.



정확히 그때부터 할아버지는 계속 아팠다.

거동을 할 수 없어지고 정확한 언어 표현이 불가능해졌다.

증손자를 보고 손자라고 착각했다. 

나의 조부모는 살갑다는 느낌과는 애저녁에 거리가 멀었고 오랜 세월 말도 거의 하지 않는 아웅다웅에 가까웠는데도,

배우자를 잃은 상처는 실로 놀라운 파괴력을 발휘했다.

 

누군가의 도움받아야 거동이 가능하고, 식사가 가능하고, 배변 처리가 가능했던 할아버지는 그로부터 11년을 더 사시고는 돌아가셨다.

 

정말 놀랍게도 할머니를 보내드린 그 장례식장, 같은 빈소에서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장소의 동일함과는 상반되게

- 할아버지 사랑이 끔직했던 큰 고모를 제외하곤 -

다들 이보다 평온하고 일상적일 수 없을 정도로 무덤덤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고인과 관련되어 이곳에 모인 그 모든 이들에게

이 죽음은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어쩌면 11년 내내 받아들이고 있었던 그 무엇이다.

 

 

2. 마지막 끈의 사라짐

 

오랜 병에 효자 없다는 얘기만이 이번 장례의 냉기를 나타내는 건 아니다.

이번 조사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자식대의 1촌들이 지난 11년간 알콩달콩 행복한 형제자매애를 간직했다면 오늘의 풍경은 사뭇 달랐을 거다.

 

고인의 자식대인 1촌들의 지시에 따라

손주대인 2촌들은

10만원 넘는 화환들의 물결에 돈지랄의 시궁창 냄새를 맡으면서도 두가지 출처(누가 보낸 것인지, 누구 인맥을 타고 보내게 된 것인지)를 열심히 적고,

수만, 수십만원 단위의 부의금과 이후 상주+@들의 감사 표시라는 악성 연쇄고리를 이어가는 어른들의 생리에 신물내면서도 역시 두가지 출처를 적는 데 여념이 없다.

정말 무서울 정도로 고인에 대해 특별히 나눌 말이 없이

일종의 실무 집행자인 손자, 손녀, 손부들은 그야말로 '장례'라는 일상생활 자체에 집중할 따름이다.

그 와중에 '누구는 농땡이다', '저렇게 일할거면 아예 있지나 말지' 같은 초저급 인신공격이 난무하는 가운데, 주로 무수리과인 우리 집 2촌들이 하나같이 공주과인 듯한 작은 아버지댁에 대한 뒷담화성 공격을 -우리들끼리만- 은근히 퍼붓고 있다.

아 촌스러 촌스러.

 

그런데 평소같으면 울컥했을 우리 엄마.

왠일로 이번엔 고요와 평정심 유지가 부처에 상응한다.

'이제 마지막이야. 저 지겨운 인간들 볼 일 이제 없어. 너희들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참아.'

그 '지겨운 인간들'이 바로 자신의 누나요 동생들인 우리 아빠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빠의 침묵은 절대적 긍정이다.

두사람에게서 안도의 표정까지 감돈다.

물론 나는 확신한다.

언제나 볼장 다 볼 듯 싸우는 것 같아도 또 모이면 근사한 일가족의 행세가 가능하다.

그래도 확실히 형제자매간 붙들어매놓은 마지막 물리적 끈이 끊기면서

뭔가 엉킨 실타래 중 하나는 과감히 버리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나의 동생들, 사촌들을 두루두루 살펴본다.

사촌들, 참 친했다. 워낙 가까이 살아와서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함께 어울렸다.

우리도 점점 나이 들면 저렇게 되려나?

할머니 장례식 땐 '우린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했던 것 같기도 한데,

이번 장례식엔 그런 생각조차 없는 백지상태다.

 

이 모든 상태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과연 가족이란 무엇인지 조차 알 수 없다.

 

할아버지, 미안.

너무 할아버지 생각을 안하고 보내고 있네.

곱디고운 흙으로 돌아가 계실거죠?

죽음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아 조금 무섭지만

확실히 보이는 건 언젠가 똑같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

언젠가 저도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잘 지낼게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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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8 15:32 2007/07/18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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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7/09 14:57

사람은 누구에게나 추억이 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곧 만들어질 추억에서조차
차곡차곡 쌓인 추억을 소급하여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때론 곧 만들어질 추억이 이미 쌓여있던 추억 때문에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런 추억들은 가지고 있는 개인에게 빛바랜 사진마냥 아련하고 간직하고픈 그 무엇이다.
그런 의미에서 추억은 기억과 다르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아니다. 그중에서 돌이켜 생각할만한 무엇이다.

 

그렇기에 이 애니 속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추억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난감하다.


 



그들이 사는 도시 타카라마치에서는,
동네 양아치가 자경대마냥 마을을 지킨답시고 설치고,
열 세네살밖에 안되었을 법한 옆 동네 싸움꾼들은 이 도시를 접수하기 위해 들르고,
그런 아이들을 쇠파이프로 작살내는 쿠로 역시 10대이면서 거리에서 살고 있고,
야쿠자는 마약을 파는,
도시 전체가 조잡한 캐릭터시장처럼 생긴 곳,

사는 이들이 스스로 시궁창같다고 칭하는 곳이다.

 

 

온통 좁은 통로와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낙서, 양아치와 야쿠자가 폼잡고 다니는 이곳에도 재개발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해외 자본까지 들여와 마을을 싹 정리하고 거대한 놀이동산이 만들어질 계획.

 

누군가는 그저 빠져나갈 궁리만 할 것 같은 도시지만 그래도 '어린이의 꿈'이 될 놀이동산이 되버린다면,

야쿠자인 생쥐는 동네 남자 아이들이 '남자가 되기 위해(진짜 남자가 되나?)' 들르는 포르노 극장이 그리워질 것 같고,

피보는 걸 좋아하는 쿠로는 11살짜리 시로와의 생활이 온통 깨져버릴 것만 같다.

 

 

쿠로는 '내 마을을 지키겠다'고 단언도 해보지만,

그동안 상대하던 동네 양아치도, 몇동네 접수해왔던 야쿠자도 아닌,

해외에서 공수되어온 '프로'를 상대하면서 실질적인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시로를 지키는 것'만이 인생의 의미의 전부였던 쿠로는 시로의 안전을 위해 시로를 어른의 세계 - 여기서는 경찰서-로 보낸다.

 

인물들의 결말은 생각외로 식상한 면이 없지 않다.

그나마 심하게 튀지 못하도록 하는 마음의 나사같은 존재인 시로를 잃은 쿠로는 폭주의 폭주를 거듭,

해외에서 날라온 프로는 커녕 마을 통째를 피바다로 만들어도 별 무리 없을 정도로 끝없는 어둠의 구원의 속삭임에 빠져들어간다.

그러나 11살에 숫자도 잘 못 세고 쿠로가 없었으면 그 도시에서 하루도 못되어 시체가 되었을 시로는 다시 한번 쿠로의 마음 속에 들어가 나사를 조인다.

쿠로의 마음 속 어둠은 언젠가 너를 구원하겠다며 잠시 사라진다.

그리고 둘은 도시를 벗어난다.

 

결국 쿠로는 도시를 지키지도, 이기지도 못했다.

동네 거지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울 때가 아냐. 풀이 죽을 새도 없어.

그런 짓을 했다가는 이 마을에게 죽임 당하고 말아."

 

도시가 변한 것을 모른 건 쿠로 뿐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도시는 지켜져야 할 무엇이 아니며

오히려 사람이야말로 도시로부터 지켜야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도시에 대한 추억 역시

혹여 도시로부터 주어진 상처는 아닌지 고민해보게 되는 영화.

 

"함무라비가 세운 바빌로니아 시대때부터 도시란 건 차가웠다고요."

"바빌로니아를 세운 건 네부카드네자르 2세야"

 

냉혹할 정도로 차가운 도시의 추억....

 

 

* 사진출처 : 네이버무비(http://www.naver.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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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9 14:57 2007/07/09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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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7/07 13:41

이 책엔 단편소설이 있지만 소설책이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

산문도 있지만 산문집이라 규정할 순 없다.

사진도 있고, 콘탁스 G1 카메라 리뷰도 있고, 여행 기록도 있고, 심지어 음악 14곡이 수록된 음악CD도 붙어있지만,

사진집이라 하기엔, 카메라 설명집이라 하기엔, 여행책이라 하기엔 빈 구석이 너무 많다.

그런 책, 김영하가 쓴 [여행자]는 그런 책이다.

서점 어느 구석에 쳐박아야 할지 알 수 없는, 아마도 비소설 부분에 꽂혀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장르 구분 불가능의 책.




어느날 라디오를 듣다가 작가 김영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름지기 글쟁이는 글로 말하는 법.

그러나 그는 동료들도 인정하는 대단한 수다쟁이같다.

실제로 라디오 속 그는 나이 40이 넘었지만

마치 10대의 감성을 가진 50대 아줌마처럼 떠들고 있었다.

언젠가 미니 콘서트장에서 본 김수철이 생각났다.

이런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이 세상이 원하는 대로 점잖빼고 살고 있어 속의 끓는 피를 어찌 다스려야 할지 골머리 썩히는 겉만 어른된 자들의 특권이다.

언제나 구름위를 걷는 듯한 그들이야말로 '차분'의 진정한 깊이를 알고 있을 지도...

 

김영하의 [여행자]는 모두 8편이 나올 예정이라는 데, 그 첫번째 여행지는 바로 하이델베르크다.

위에서 적은 바와 같이 이 책은 단편소설에 여행기, 사진, 카메라 리뷰 등이 모두 들어있다.

그러나 그는 글쟁이이다. 그것도 책을 아주 많이 읽은 글쟁이.

그가 흡수한 글만큼이나 이 책은 그 모든 것이 나름의 감성의 지도를 따로 질서정연하게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다.

무언가 쓸데없는 복합과 모순에 빠질 틈조차 주지 않게 만든 깔끔한 책이다.

사실 이 점은 가장 좋은 점이긴 하지만 다소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왠지 '소설을 읽는 듯 했는데, 어느새 자기 여행기가 되더니 짧은 사진집이 되었다가 소설로 돌아왔다가...' 뭐 이런 보기좋은 환타지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사진에 중점이 가있는듯한데 소설이 더 궁금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떻든 재미있고 좋고 쉬운 책이다.

음악을 들으며 읽다보면, 누구나 쉽게 '차분', '관조', '평온'이 일관되게 느껴진다.

나도 어딘가 여행을 다녀오면 이렇게 테마를 가지고 한권씩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죽음'을 생각한 것 같다.

'죽음을 생각하기 좋은 도시', 그가 본 하이델베르크다.

그 죽음은 따사로운 햇빛이 비치는 야외 카페에 조용히 앉아 책 한권을 읽고 있는 것만큼 차분하고 고요해보인다.

죽음을 생각하기에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착각할지도 모를 만큼.

 

* 사진출처 : 알라딘(http://www.alad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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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7 13:41 2007/07/07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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