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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9/09
    삼성교통 노동자 자주관리기업으로 출범하다.(1)
    풀소리
  2. 2005/08/17
    장준하 선생 기념 새김돌 앞에서(1)
    풀소리
  3. 2005/07/29
    연정(戀情)없는 연정(聯政) 2(2)
    풀소리

삼성교통 노동자 자주관리기업으로 출범하다.

 지난 8월 30일 진주 삼성교통의 노동자 자주관리기업 출범식이 있었다. 5월 22일 파업을 시작한 지 꼭 101일 만이다.

▲ 출범식 행사 빵빠레가 울리고, 폭죽이 터졌다.




100일. 청주 우진교통의 180일 파업에 비하면 길지 않지만 결코 적은 날짜라고 할 수는 없다. 모두가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에 단 한푼의 월급도 없이 100일을 버틴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며, 가정경제의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욱이 삼성교통은 누적된 임금체불로 그 고통은 배가되었으며, 조합원들 대부분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하였고, 일부 조합원들은 파업기간 동안 가정이 파탄나기도 하였다.


악덕 자본가 1명 때문에 200여명의 조합원과 직원, 1,000여명의 그 가족, 그리고 30여만 명의 시민들이 피해를 봤다. 뭔가 잘못되지 않았는가. 아무리 자본이 주인인 자본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시청에 몰려가 항의하는 조합원과 가족들/ 악덕 사업주 박성칠을 몰아내고 우리들을 살려내라!


출범식은 시작 전부터 흥분과 긴장감이 교차했다.

100일 파업으로 단련된 조합원들은 행사 준비에도 일사분란하다. 음식을 준비하는 조, 내외빈을 맞이하는 조, 무대와 행사장을 정리하는 조 등등...


행사 시작 전 구호 외치는 조합원들.


오늘 삼성교통지부 동지들은 투쟁조끼를 벗고, 말끔한 유니폼인 양복바지에 와이셔츠로 갈아입었다. 내일 모래면 우리는 다시 차를 몰고 거리로 나간다. 더욱 친절하고, 더욱 책임성 있는 자세로 우리는 시민들을 맞이할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주장하고 원해왔던 완전 공영제는 아니지만 공영제로 운영되는 게 어떤 것인지를 시민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지자체와 정부에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버스를 왜 공영제로 운영해야 하는지, 공영제로 운영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웅변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투쟁가를 힘차게 부르는 조합원들


축하하러 온 민주버스 조합원 동지들과 버스노협 동지들은 축하의 마음과 부러운 마음이 교차하는 것 같다. 어찌됐든 억압과 착취의 자본이 사라진 현장은 생기로 넘친다. 우리는 가장 좋은 서비스를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우리 노동은 시민들에게 또는 우리 삶으로 새는 곳 없이 그대로 전해질 것이다.

 

거리 행진하는 조합원들/ 고난의 언덕을 넘어 오늘 우리는 자주관리기업을 만들어냈다.


100일 동안 투쟁을 선봉에서 이끈 비상대책위원들이 소개되었고, 일선에서 활동해온 조장들이 소개되었다. 모두 감격에 겨워했고, 또한 오늘을 만든 자부심이 배어있는 것 같다. 김권수 비대위원장은 감격에 겨워 연설의 말을 이어가기 어려워했다. 오늘의 감격과 자부심을 영원히 간직한다면 앞으로 어떤 난관이 닥치더라도 우리는 능히 헤쳐나갈 것이다.

 

비대위원들 앞에서 김권수 비대위원장이 연설하고 있다.


가족들은 기대와 안도와 기쁨이 교차하는 것 같다. 100일 동안 거리에서 싸우면서 평화적인 시위를 하고 있음에도 조합원 전원이 연행되기도 하고, 간부가 구속되기도 했다. 조합원이 연행되고 난 텅 빈 거리는 늙은 어머님을 비롯해 아내와 아이들 등 온 가족들이 채웠다. 연행자들을 구출하는 경찰서 진격에도, 시청으로 진격에도 가족들은 오히려 선봉에 섰다. 비록 미완의 승리지만 오늘 우리의 승리에는 가족의 힘이 무엇보다도 컸다.



경찰서 항의집회/ 조합원들을 연행해간 경찰서로 몰려간 가족들과 조합원들


인사에 나선 황일남 위원장은 제일먼저 가족들의 노고에 감사와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우리가 완전 공영제의 모범을 세우고, 질 좋은 서비스로 시민을 대해 우리가 옳았음을, 버스 완전 공영제가 옳음을 진주뿐만 아니라 전국에 알리자’고 역설했다.


인사말 하는 황일남 위원장


이사진이 소개되고, 김해린 대표이사의 대회사가 있었다. 엄숙하고 엄정한 자리인 만큼 즉석 연설을 피하고 연설문을 작성해왔다. 김해린 대표이사는 비록 삼성교통에 근무하지는 않았었지만 버스노동으로 정년을 맞으신 분이고, 버스노동자들의 투쟁이 있는 곳이라면 멀고 가까운 곳을 가리지 않던 분이다. 김 대표는 자주관리기업의 대표이사로 추천을 받고도 계속 고사한 바 있지만 누구보다도 사명감을 가지고 삼성교통을 잘 이끌어 나갈 것이다.


고사지내는 김해린 대표이사


현판식과 고사를 마치고, 오색천 끊기를 마치고, 드디어 버스에 시동을 걸었다. 대표들을 태우고 진주시내 한바퀴를 돌면서 삼성교통이 자주관리기업으로 거듭났음을, 진정한 시민의 발 역할을 할 것임을 온 시민들에게 알릴 것이다. 얼마 만인가. 100일만에 버스를 몰고 거리로 나섰다.


차고지에서 출발하는 시승버스


이제 본격적으로 축하연이다. 삼성 투쟁에 처음서부터 끝까지 함께 한 새노리 동지들과 맥박 동지들의 흥겨운 공연과 노래가 이어졌다. 조합원들과 가족들은 술잔을 부딪치고, 흥겹게 노래부르고 춤을 췄다. 자본이 사라진, 자본가의 압박이 사라진 노동현장은 이렇게 흥겹다. 술판이 춤판이 되고, 춤판이 노래판이 되고, 쟁반을 꽹과리 삼으면 또 어떠랴. 우리는 즐겁기만 하다.


흥겹게 춤을 추는 가족들과 연대 온 동지들


흥겨운 와중에 사회를 맡은 김행규 조직국장은 양구중 전 지부장을 무대로 모셨다. 오늘 자주관리기업을 출범하기까지 누군들 사연이 없으랴. 200여 조합원과 1,000여명의 가족들 모두는 온갖 어려움과 사연이 가득하리라. 그렇지만 어디 양구중 전 지부장 만하랴.

양구중 전 지부장은 삼성교통을 민주버스로 최초로 조직변경을 한 지부장이다. 회사의 탄압에 맞서다 정체 모를 테러(자동차 사고)를 당해 영안실로 실려갈 정도로 생명이 위독했었다. 긴 투병생활을 하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 심지어 기억까지 말이다.


연설하는 양구중 전 지부장


그런 양 지부장이 살아났다. 기억이 어느 정도 돌아오고, 말도 똑바로 할 수 있다. 마이크를 잡은 양 지부장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감격의 눈물이 묻어났다. 사회자는 언젠가 꼭 삼성교통에서 함께 일할 것을 다짐했다. 그렇다. 사람이 사람을 책임지고, 위로하고, 연대하는 것이 진정한 사람 사는 사회다. 억압과 통제만이 사회인양 하는 무리들에게 우리는 어떤 사회를 원하고, 만들어 가는 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그런 사회를 작지만 삼성교통이라는 공간 안에서 실현하고자 한다.

 

노래하고 춤을 추는 조합원들과 가족들


마지막으로 가족들을 위로하는 노래자랑이다. 어디다 저런 끼들을 숨기고 살았을까.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못하는 것이 없고, 거칠 것이 없다. 앞으로 이렇게 후련하고 기쁜 일들만 있어라.


그러나 우리는 방심할 수 없다. 적은 밖에도 있고 안에도 있다. 밖에 있는 적은 함께 힘을 합쳐 이겨나가야 할 것이다. 안에 있는 가장 큰 적은 방심이고, 망각이다. 회사가 정상화되고, 생활이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하면 회사와 1,000여명의 가족보다 자기의 이익을 크게 내세우는 이가 나올 수도 있다. 교묘한 논리로 조직을 혼란에 빠뜨리는 동지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자. 우리가 무엇 때문에 땡볕에서 투쟁하고, 얻어터지고, 외쳤는지를 잊지 말자. 가족들이 우리를 믿고 함께 하여 여기까지 왔음을 잊지 말자. 앞으로 어려움이 닥치면 항상 지난날을 오늘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

 

 

지난 투쟁의 나날들/ 우리와 달리 저 초롱한 아이의 눈가에는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하자.


우리는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누구보다도 원칙적이고,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칙을 지킬 것이고,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민주주의를 실천할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잊지 않고, 오늘의 환희를 기억할 것이며, 조합원과 가족, 아니 10만 버스노동자의 미래를 위해 헌신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출발이다. 삼성교통 자주관리기업 출범 만세!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빠께

 

 

 

 

▲ 편지를 읽고 있는 전솔잎(18세)양/ 조합원뿐만 아니라 시민들을 모두 울렸다.

요즘 정말 많이 힘드시죠? 날씨도 점점 더워져가고 지치신 아빠의 모습을 볼 때마다 제 마음속에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1년 전, 집안사정으로 아빠의 월급이 반밖에 나오지 않았을 때, 전 그때가 제일 힘든 줄 알았어요. 그러나 반밖에 나오지 않는 월급마저 한 달씩 날짜가 미뤄질 때마다 점점 불안해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가족은 참 행복했던 것 같아요. 희망이 보였으니까요.

그 희망을 상상하며 우리 기뻐했고, 그 빚을 다 갚고 난 후 우리 가족은 사고 싶은 물건들… 한 달에 조금이나마 저축할 생각을 하며 정말 설레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좋았잖아요. 그런지도 얼마 안돼서 1개월, 2개월, 3개월째 월급이 체불되었을 때 우리 가족의 생계에 위협이 시작되었고 저에게도 더할 나위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인문계고등학교를 다니는 저로선, 비싼 책값, 비싼 등록금, 사사로운 모의고사비, 두 달 세달 밀려 한꺼번에 나오는 급식비 등등 빨리 내지 않는다고 여러 선생님께 따가운 눈초리를 받기도 했습니다. 항상 독촉장을 받는 저는 친구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습니다.

혹시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기하도 하면 어쩌나… 뒤에서 험담하진 않을까. 아침에 눈을 뜨고 난 후 첫 번째로 생각한 것은 학교에 가기 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혹시 또 독촉장을 주진 않을까 불안에 떨며 학교엘 갔는데 정말 하루하루가 싫었습니다. 하지만 돈을 주지 않는 회사를 원망하고 또 원망할 수밖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전 내색할 수 없었어요. 제가 이만큼 힘든데 아빠는 오죽 하시겠어요. 파업이 시작되기 전부터 아빠는 적극적으로 언론에 이 사실을 알리며 시간과 돈과 몸과 마음 모든 것을 투자하셨어요. 전 아빠가 자랑스러웠습니다. 삼성교통 파업을 부정적으로만 보시는 분들이 있을 때마다 전 아빠를 자랑하며 정확한 내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죠. 오늘 차 없는 거리에서 시위하는데 참석해 줄 수 없겠냐고… 전 그때 친구와 함께 있었어요. 부끄럽다며 거절했었어요.

그 뒤로 가시방석에 않아 있는 것처럼 마음이 정말 불편했어요. 그래서 잠깐이라도 참석할까 해서 갔는데, 당당하게 나서지 못하고 숨어서 지켜봐야만 했어요. 제 자신에게 부끄럽고, 마음이 너무 너무 아팠고 눈물이 나서 도저히 그 모습으로 나설 수 없었어요.

집회하고 행진하고 삭발식을 한다는 소리는 누누이 들어왔지만 제 눈으로는 처음 봤습니다. 아빠가 그렇게 고생하시는 줄 모르고 전 철없이 굴었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아빠가 무척 새까맣고 작아보였습니다. 아빠가 이 세상에서 제일 크고 듬직하고 강인하게만 보였는데… 이제 아빠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먼저 흐릅니다. 무서울 게 없는 우리 아빠가 삼성교통의 악덕 사업주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하고 계시니까요.

아빠… 사랑하는 우리아빠… 조금만 더 힘내세요. 조금만 더 참고 이겨내세요. 조금만 있으면 우리도 남들처럼 웃으며 지낼 날이 오겠죠.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들을 이렇게나 많이 헤쳐 왔는데 우리도 이젠 행복해야죠. 돈 때문에 원망하고 우는 날들을 이젠 끝내기로 해요.

그리고 진주 시장님 아저씨, 우리 삼성교통 가족이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고나 계시는지요. 시장님께서 적극 나서신다면 삼성교통 문제가 빨리 해결될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파업에 돌입한지 한 달이나 됐는데 이 사태를 해결하려는 의지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하루 빨리 시장님이 나서서 삼성교통 문제를 해결하시어 진주에서 정말 존경받는 시장님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전솔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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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 기념 새김돌 앞에서

장준하. 아직은 기억하는 이가 모르는 이보다 많으려나.
광복군 시절 장준하  ▷ 출처 : 기념사업회
장준하. 그가 누구지. 일제시대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활동한 사람. 유명한 사상계를 냈던 분. 박정히 정권시절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한 분. 아하, 그 사람. 적어도 그렇게라도 기억하는 사람은 아직 많이 있으리라.

내가 사는 고양시 끄트머리에 그의 새김돌이 있다. 통일로변 고양시와 파주시 봉일천 경계에 흉물로 처져 있는 콘크리트 전차차단막 사이에 그의 새김돌이 있다.
새김돌은 삼면이 전차차단막으로 둘러싸였고, 여름이면 물이 질겅질겅 솟는 땅에 서 있다. 하도 자리가 험해 후학들이 자리를 옮기자는 말에 ‘아직 분단조국이 통일되지 않았는데 선생의 새김돌이 이런 곳에 있어야 한다’는 백 선생님의 일갈에 오히려 숙연해지는 그런 험한 곳이다. 선생이 75년에 돌아가시고, 86년에 새김돌을 세웠다고 한다. 호랑이 형상의 돌에 당시대 최고의 시인 김지하가 글을 비문을 지었다.

이후 알 수 없는 괴청년들이 겨울에 3일간 불을 피워 새김돌을 태운 탓에 호랑이 형상 머리부분이 달아나고,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해괴한 글을 실은 뒤 새겨진 그의 이름이 짓이겨지는 등 시련을 겪었다.


잡초에 둘어싸인 새김돌  

 


내가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4-5년 전인 것 같다. 고양시로 이사 와서 새김돌이 있음을 알았다. 당시 돌보는 이가 없어 넓은 공터는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몇몇 사람들과 함께 예초기를 구해 새김돌 근처만이라도 벌초를 시작한 것이 새김돌에 매년 들르게 된 시작이다.
나는 사실 장준하를 잘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중학교 때 어떤 선생님이(누군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얼핏 했던 이야기가 나중에 퍼줄을 맞춰보니 장준하 선생 얘기였다. 그리고 그를 안 이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세히 알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를 무시한 것도 아니지만 딱히 땡기지가 않았다.
매년 한번 벌초하는 것으로 마치 내 임무를 다한 것으로 자위하면서 그렇게 매년 8.15 즈음의 일요일을 보냈다.

멀리 문제의 살림집이 보인다. 

문제가 생긴 건 재작년 겨울이었다. 새김돌 옆에 누군가 콘테이너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전기와 전화도 끌어다 놓고 제법 살림을 하는 집처럼 보였다. 나는 빈집에 쪽지를 남겨두었다. 연락을 해달라고. 내가 왜 그렇게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의아하기만 하다. 적어도 그들이 거기에 사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건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내가 뭔 권한이 있다고...

어찌됐던 지난해 여름에 벌초하러 그곳에 다시 들렸다. 이런 세상에나. 새김돌에는 거적이 덮여 있고, 채 5평이 될까말까 한 공간만 남겨두고 온통 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몹시 기분이 상했다. 이곳에 움막을 짓고 사는 이들은 적어도 새김돌과 무관한 사람들은 아닐 터인데 어찌 이리도 무례하단 말인가. 더욱이 땅 소유가 백기완 선생 앞으로 되어 있다는데, 성격 까탈스럽기로 소문난 백 선생님이 어찌 가만히 둔단 말인가.
아는 후배를 통하여 백 선생님에게 사정을 얘기하니 벌초하지 말고 그냥 두란다. 또 혼란스럽다. ...

벌초를 마치고 나오는데, 장년의 부인과 딸로 보이는 처녀가 빈집으로 돌아온다. 우리를 침입자처럼 바라보더니 우리 행색을 보고는 이내 차 한잔 먹고 가란다. 누구랑 차를 먹으라는 건지 원. 새김돌에 거적을 덮어놓고, 길도 없이 몽땅 밭으로 써먹는 이들이랑 차를 먹자고.
나는 대구도 하지 않고 나왔다. 처녀는 뒤늦게 뛰어와 누군지 명함이라도 달라고 한다. 난 그녀의 요구를 무시하고 그냥 왔다. 물론 마음 약한 분들이 명함을 남겨두기는 했지만.

죽은 아카시아와 껍질 벗겨져 드러난 속살  

올해는 나도 새김돌을 까맣게 잊었다. 바쁘다보니 머리가 마비된 것 같다. 지난 토요일 시민회 최태봉 사무국장이 아니었으면 잊고 지날 뻔 했다.
지난 일요일 약속시간보다 15분 늦게 새김돌에 가니 민족문제연구소 이재준 선배가 가방을 메고 나온다. 밭은 여전하고, 그 뒤로 아름드리 아카시아 나무들이 모두 말라 죽어있다. 우선 기분이 상했다.

왜 벌써 나오세요?
매년 벌초를 하고 싸온 술가지를 함께 나눠먹는 게 관례였기에 바로 나오는 게 이상해서 물었다.
벌초 하지 말래요.
누가요?
저기 저 아저씨가요. (장준하 선생) 아들이 곧 새김돌을 옮긴대요.
나는 그래도 새김돌로 갔다. 가면서 죽어있는 아카시아 나무들 사진을 찍었다. 밑둥 둘레로 껍질 벗겨져 드러낸 속살은 죽음의 원인일 것이다.

어이. 이리 와봐. 사진은 왜 찍는거야.
늙은이 하나가 컨테이너 집 앞에서 뒤로 제켜진 의자에 누어 거만하게 외친다.
새김돌 좀 보려고요.
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거기는 못 가. 아들이 옮긴다는 데 뭣 하러 가.
여기까지 왔다 새김돌도 못보고 가요?
큰소리로 대꾸하자 대답이 없다. 새김돌에 가지 농작물이 심어져 있고, 잡초가 우거져 있는 게 볼만하다. 방법이 있나. 나는 사진 몇장을 찍고 뒤돌아 나왔다. 늙은이는 처다 보지도 않고 말이다.

잡풀에 묻힌 새김돌  

 

나오는데 ‘백기완이 하고 어울리지 마. 그런 놈들한테 속지마.’라는 늙은이의 목소리와 ‘차나 한잔 하고 가’라는 부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늙으면 죽어야지 노인네들이 뭔 꼴이여.
이재준 선배는 혼자말로 투덜댄다. 노인네들이란 그 노인과 백 선생님을 가리킨 것이리라.
답답하다. 후학들은 새김돌 하나 간수 못하나.
장준하 선생이 실제 어떻게 살았던, 무수히 잊혀져간 훌륭한 선배님들을 대신하여 기려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년에는 나도 이 자리에 오지 않겠지... 그러면 누가 올까. 누가 기억할까. 우리 모두를.

 

그러고 보니 오늘이 선생의 기일이다.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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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정(戀情)없는 연정(聯政) 2

드디어 올 것이 온 것 같다. 오늘(7월 28일) 노무현 대통령은 마침내 한나라당과 연정을 하자고 제안하며, 자신의 계급적 본질을 적나라하게 까발렸다.
당연스럽게 열혈 네티즌들이 몰리는 사이트들은 난리가 났다.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과 큰 차이가 없다’는 대통령의 전제에 대해 친노, 반노 할 것 없이 공분하는 것 같다. ‘죽 쒀서 누구 주는 것이냐?’부터 ‘노빠 니들 다 죽었다!’까지 대통령만큼이나 노골적인 언사들이 난무한다.
열기 가득한 포럼 풍경


어제 고양시위원회 제5차 정치포럼이 시위원회 사무실에서 있었다. 강병익 진보정치연구소 상임연구위원의 발제와 이재정 부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포럼에는 19명의 당원들이 함께 했다.
이번 포럼 주제는 ‘연정(聯政)’이었다. 단순하게 학술적으로 연정에 대하여 토론하자는 것이 아니라 당내에서도 상당히 논란이 되었던 만큼 ‘연정이 남긴 모든 것’을 쏟아놓기로 한 것이었다. 포럼은 이전과 같이 ▲1부 : 발제 ▲2부 : 질의응답 및 토론 ▲3부 : 뒤풀이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당원들은 당지도부가 여전히 연정에 연정을 품고 있지 않은가 의구심을 가지고 있어

발제 시작하기 전에 사회를 맡은 이재정 부위원장은 ‘일반적이고 상투적인 얘기는 하지 말자’며 발제자를 압박했다. 비겁하게 에둘러 말하지 말고 포럼답게 솔직단백하게 발제 해달라는 주문이었다.
포럼 행사진행표

발제자(강병익 연구위원)는 사회자의 주문을 받아들였다. 그는 ‘열린우리당의 연정파트너로 어느 당이 제일 어울리겠는가?’라는 설문조사에서 민주노동당이 30%대로 제일 높게 나왔다는 말로 발제를 시작했다. 일반 시민들은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과 정책적으로 가장 가깝다고 느끼는 증거이리라.

그는 여당의 연정제안에 대하여 지도부 중 어느 누구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지 않았음에도 당원들이 여전히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윤광웅 국방장관 불신임 처리 등에서 보인 민주노동당의 태도에 근거한다고 했다.

한나라당이 윤광웅 국방장관 불신임안을 낸 것은 GP내 총기사건과 맞물려 ‘군 기강’을 문제삼은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은 한나라당이 제시한 불신임 이유에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윤광웅 불신임안에 찬성할 이유가 없었느냐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윤 장관은 이라크 파병 연장을 공공연하게 주장하기 때문에, 이라크 파병철회, 철군을 당론으로 하는 민주노동당에서도 불신임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나라당과 행동을 함께 할 경우 정치적 부담을 느껴서인지 수정안도 내지 않고 국방개혁이라는 열린우리당과 같은 이유를 들어 불신임에 반대표를 던졌다.

당 발전계획 없는 연정활용론은 위험. 즉흥적이고, 자의적일 수 있어.

강 연구위원은 노 대통령이 또다시 연정문제를 들고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하루만에 적중한 셈이 되었다. 노 대통령은 소수파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연정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연정을 들러싸고 민주노동당이 어떻게 대응했는가는 최고위원회 회의록을 들어 설명했다. 회의록만을 보면 ▲연정 불가, ▲연정은 불가지만 활용해야 한다 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아도 ▲연정에 대해 연정(戀情)을 품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당 지도부를 연정에 대한 태도로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른바 연정 활용론에 대하여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 물론 연정국면이 당 지지도를 높이는데 기여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말이다. 활용이 필요하다면 그 근거가 뭔지를 밝혀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든다면 ‘당의 장기발전계획에 비추어 충분히 활용가치가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당은 장기발전계획이라는 게 없다. 따라서 활용론은 대단히 즉흥적이고, 자의적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연정은 그 자체의 득실만이 아니라 당내 역학관계도 아울러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현재와 같이 당론이 모아지지 않은 상황에서 연정을 한다면 당이 깨지지 않겠느냐는 우려에서다.
그리고 본질적으로도 민주노동당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 변혁을 고민하는데, 과연 열린우리당과 연정이 가능한가에 대하여도 의문을 표시했다.

독일 녹색당은 연정 참여 이후 분열과 정체성 훼손 경험 있어

외국의 사례로 독일의 적록(赤綠)연정을 예로 들었다. 적록연정은 독일 사민당과 녹색당의 연정을 말한다. 열린우리당과 연정한다면 우리는 사민당의 처지가 아니라 녹색당의 처지라는 전제 아래 녹색당이 연정에 참여하면서 일단 당이 양분되었던 사례를 들어 소수당의 연정참여의 어려움을 말했다.
또한 연정 참여 이후 녹색당의 정체성이 많이 훼손된 사례로 연정 정권의 원전건설과 코소보 사태 개입문제를 들었다. 두 정책은 녹색당이 줄기차게 반대해온 것이었음에도 녹색당은 연정을 유지하여 결과적으로 당론에 반대되는 정책에 찬성한 꼴이 되었었다고 한다.
발제를 맡은 강병익 연구위원


발제에 이어 질의응답과 토론이 뒤섞였다. 먼저 연정국면이 당 지지도를 높였는가에 대하여 박충렬 당원이 질문했다. 강 연구위원은 당시 다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연정 이외에 달리 (지지도 상승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연정국면이 당 지지율을 올린 1등 공신이었다는 의견에는 이견을 보여

물론 강 연구위원의 이런 답변은 무수한 반론에 부딪쳤다. 이홍우 위원장의 경우 연정국면 이전의 윤 장관 불신임 처리 과정에서 캐스팅보트를 쥔 민주노동당에 대한 약 1주일에 걸친 언론의 집중보도로 이미 우리 당이 상당한 정치적 비중이 있는 것으로 대중적으로 인식된 것이 오히려 지지율 상승의 더 큰 이유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다른 토론자도 이 위원장의 의견에 동의하며 현재의 지지율이 거품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재정 부위원장은 열린우리당이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 당론으로 연정을 제의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강 연구위원은 현재 조건에서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면서 ‘집권은 단순히 집권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집권과정으로 봐야 함’을 강조했다. 즉, 당론에 대한 지지자를 넓히는 과정, 그 과정에서 세상을 바꾸는 과정이 집권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과정 없이 장관자리 몇 개 얻는 것은 관료들과 언론의 반발 등으로 장관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황 등에 빠질 수 있어 오히려 위험하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2012년 집권전략은 공식적으로 결정된 바 없어

이어 2012년 집권전략에 대한 의견이 나왔다. 강 연구위원이 말한 필수적 집권과정이 있다면 현 상황에서 2012년 집권은 불가능하며, 집권을 논한다면 연정말고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냐는 의견이었다. 더욱이 당의 공식기구에서 단 한번도 2012년 집권전략이 결정되지도 않았는데도(2004년 중앙위원회에서 부결된 바 있다.) 계속 집권전략이 흘러나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강병익 연구위원과 사회를 맡은 이재정 부위원장

이에 대해 강 연구위원은 지금은 집권전략위원회보다는 당혁신위원회가 더 절실하다며, 진보정당으로서 당의 토대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거칠게라도 집권으로 가는 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로드맵에 비교해 진보정당에 맞게 레드맵(red map)이라고 명명했다. 이날 강 연구위원이 제기한 레드맵은 토론자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호응을 받았다. 진보정치연구소에서는 현재 적은 예산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정치, 경제, 복지, 노동 등에서 레드맵을 뒷받침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연구소는 당의 집권 문제, 제도개혁 등의 문제에 계속 개입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민주노동당의 발전전략으로서 redmap 필요

향후 정치일정과 맞물려 연합공천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강 연구위원은 (비판적 지지와 관련이 있는) 열린우리당과 연합공천 문제는 제기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87년도와 달리 이미 원내 진입한 당이 있는 만큼 비판적지지론은 호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삼았다.

반면 지역에서의 연합공천, 즉, 시민단체와의 연합공천에 대하여는 열린 자세로 적극적으로 임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그는 4.15총선으로 국회에 입성하면서 ‘거대한 소수’가 되겠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했다. 거대한 소수전략은 제 시민단체의 요구까지를 포괄하여 입법활동을 하겠다는 것이었다면서 지역에서라도 그러한 전략을 실현시키는 방안을 강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캐스팅보트에 대하여도 토론이 있었다. 물론 대다수 토론자들은 윤 장관 불신임 처리 등 지금까지의 캐스팅보트 전략에 비판적이었음을 전제로 해서 말이다.

캐스팅보트를 쥔다는 것은 대중적으로 정치력을 인정받는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캐스팅보트 정당이라는 한계를 각인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또한 캐스팅보트 전략은 스스로 입법안을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당의 안에 수정안만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즉, 진보정당식 입법이 아니라 보수정당의 입법을 약간 수정하는 선에서 입법활동을 하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다.

뒤풀이는 정치포럼의 공식행사

포럼이 끝나고 정치포럼의 자랑(?) 뒤풀이를 했다. 정치포럼 뒤풀이는 언제나 인기다. 정치로럼 뒤풀이는 말 그대로 심포지엄(symposium, 향연)이다. 먹으면서 하는 토론이니 말이다.이번 뒤풀이는 대게이야기에서 했다. 그 비싼 대게를 먹는 것으로 정치포럼의 재력(?)을 과시했다.(사실은 저렴하다.)

뒤풀이 자리는 포럼의 열기가 그대로 이어졌다. 정신없이 토론하다보니 포럼진행시간보다 더 길어졌다. 서둘러 정리하지 않았으면 언제 끝났을지 예측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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