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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3/19
    학교 운영위원(2)
    풀소리
  2. 2006/03/16
    살구꽃(4)
    풀소리
  3. 2006/03/15
    강아(江娥)의 무덤을 찾다(2)
    풀소리

학교 운영위원

1.

학교 운영위원이 됐다.

경선을 치렀던 작년과 다르게 무투표 당선!

 

2.

난 이번엔 운영위원을 맡을 처지가 못되었다.

노조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지역위원회와 아들 성연이는 꼭 나와주길 바랬다.

 

지역위원회서는 올해는 교육위원 선거도 있고, 지방자치 선거도 있기 때문에 한 명이라도 더 학교운영위원이 더 되길 바랬기 때문이고,

성연이는...

 

성연이는 스럽게스리

내가 운영위원이 되면 학교신문에 자기 이름과 내 이름이 같이 나오는 게 멋있다나 어쩠다나~~

유치하지만 거절하기 힘든 요구다.

 

3.

지난 한 해 운영위원을 하면서

돌이켜 보면 아쉬움이 많다.

할 일은 많은데,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회의에 참석해

황당한 제안을 방어하는 역할밖에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2월 운영위원회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그 회의에서 교장은 안건에도 없던 '우유 의무급식' 안을 내놨고, 1표 차로 통과되었다.

학부모들의 항의도 있었지만, 스스로도 도저히 납득할 수도 없었고, 솔직히 부끄럽고 화가 났다.

 

우유급식에 학교가 과연 '의무'적으로 급식할 권한이 있는가? 아무리 우유가 몸에 좋고 값이 싸더라도 학생이 돈을 내야 하는데.

우유가 좋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먹어야 한다?

 

(사실 우유가 완전식품이냐 아니면 성인병을 유발시키느냐는 논란이 있다. 자연상태에서 방목된 소로부터 얻은 우유에 대하여도 논란이 있는데, 인공사료와 온갖 항생제로 길러지는 소에서 나온 우유야  좋기야 하겠는가?)

 

난 지난 주 금요일 있은 운영위원회에서 먼저번에 결정한 우유 '의무급식'을 '선택급식'으로 번복하하는 안을 내놓았고,  어렵게 통과시켰다.

 

올 해 운영위원회 활동을 이렇게 하면 안 될 터인데,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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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꽃

봄이 왔다고 우겨볼꺼나?

봄이라고 어디 대수랴!

봄 같지 않은 봄을 맞는 이들이,

봄 같지 않은 청춘을 맞고, 그런 청춘을 보내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랴!

 

...

 

투쟁 현장에 갔다가 일이 의외로 늦어져 대회 시간이 지나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장으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뛰는 와중에 왠지 뒤꼭지가 땡긴다.

흘깃 돌아보니 아뿔싸! 꽃이 벌써 피어 있구나.

 

이왕 늦은 거, 하고 달려갔다.

뭔 꽃일까?

아무래도 살구꽃인 것 같다.

아님 개복숭아일 터인데, 아무래도 살구에 가깝다.

아무렴 어쩌랴. 열살 남짓에 시골을 떠났으니 모르는 것도 당연하고,

살구든, 개복숭아든 어찌됐든 봄을 알리는 꽃이고,

내복과 파카가 그리 낯설지 않은 계절에 그 꽃이 폈다는 게 중요하지!

 

사진 몇 컷을 찍고 대회장으로 달려가니 영 썰렁하다.

안내창구에 물으니 방금 끝났단다. (확인하니 정족수 미달이라고 한다.)

이런!

이럴 수가...

되게 미안하다.

미안함의 정체를 묻지는 말라.

하였든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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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江娥)의 무덤을 찾다

 1.

고양시에 이사 오면서 지역 답사를 해보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제대로 여전히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고양시에 이사 온지 벌써 7년차에 접어들고 있다.


지난 일요일(3월 12일) 이웃으로 이사 온 후배 덕분에 답사를 떠났다. 후배는 대구지역에서부터 답사조직을 했었다고 한다. 갑자기 잡힌 답사라 계획을 세울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강아(江娥)의 무덤을 가자. 강아는 송강 정철을 사모했던 기생이며, 시인이기도 하다. 강아 무덤 근처에는 송강문학관이 있고, 그곳에는 고양시 초대 문화원장을 지낸 이은만씨가 살고 있다. 정치적인 지향과 관계없이 그분을 만나면 근처의 송강 유적을 자세히 안내받을 수 있을 것이다.


송강문학관에 들렸더니 이은만씨는 출타중이다. 문학관 뒤에 있는 강아의 무덤으로 올랐다. 상석이 있는 것 말고는 서민의 무덤처럼 아담하다. 그래도 시인이 무덤이라서 그랬는지 누군가 꽃을 꽂아 놓았다. 비록 조악한 조화지만 말이다.

 


  송강 정철의 연인이었던 강아의 무덤

 


  강아 무덤 옆에 있는 송강고개. 송강이 이 고개를 넘어다녔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2.

강아. 그가 송강과 어떤 사랑을 나눴고, 아름다운 시를 썼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다. 어떻게 보면 권력에 무조건적으로 반항하는 나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송강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는 별개로, 자신의 파당을 위해 반대파를 원한이 맺히도록 많이 죽였고, 후의 노론의 앞길을 닦은 권신(權臣)이었기 때문이다.


송강의 무덤도 여기 어디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현종(숙종의 아들, 영조의 형)대에 송강을 사모한 송시열이 충북 진천으로 이장을 하였다고 한다. 그곳은 대단한 명당이었기 때문에 송강의 후손들이 영달하였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믿거나 말거나다. 어찌됐던 송강과 송시열은 서로 ‘통’했나 보다.


강아의 무덤 옆으로 커다란 문인석이 서 있는 무덤이 있다. 사실 내가 무덤 답사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첫째, 비문을 보고, 둘째, 무덤가에 있는 돌조각(석물)인 비석의 모양, 문인석, 무인석, 석등 등을 보고, 셋째, 무덤의 형태, 그리고 마지막으로 풍수가 아닌 인문지리적으로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가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3.

커다란 문인석을 갖춘 무덤의 주인은 귀인(貴人) 정씨(鄭氏)이다. 비석 뒷면에 아무런 설명이 없다. 누굴까? 아마 인종의 귀인이었던 송강 정철의 큰누나일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설명하면 길어질 것 같아 생략한다. 인종은 중종의 맏아들이다. 어머니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낳고 불과 며칠 만에 죽어서 문정왕후 윤씨 손에 자란다. 문정왕후도 아들을 낳았으니 후에 명종이 된 이가 그이다.

 

인종이 임금자리 오른지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즉위하여 장경왕후의 동생 윤임과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이 차례로 권력을 잡으니 이른바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이 그들이다. 권력은 공유할 수 없다고 했던가. 멀지 않은 친척 관계이기도 한 윤임과 윤원형(문정왕후)은 피 튀기는 권력투쟁을 한다. 문정왕후는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악독한 여인의 표상이니, 큰누나가 인종의 후궁인 송강 가문과 이미 피할 수 없는 악연이었는지도 모른다.

 


귀인 정씨 무덤. 왕의 후궁 무덤치고는 매우 작은 편이다.

 

어찌됐든 송강 가문은 송강의 둘째 누나의 남편인 계림군(桂林君) 유(瑠)(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손자)가 역모로 몰려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로부터 죽움을 당하면서 큰형이 곤장을 맞아 귀양길에서 죽고, 아버지가 유배되는 등 말 그대로 풍비박산의 위기에 몰린다.


이런 송강 가문의 위기는 귀인 정씨 무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첫째, 왕실의 종산에 묻히지 못하고 친정 선산에 묻힌 점이 그렇고, 둘째, 귀인의 무덤 치고는 초라할(?) 정도로 적고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한 증거이기도 한데, 비석을 세우는 밑돌은 있는데, 밑돌은 비석을 얹지 못하고, 미완성의 자세로 서있다. 아마 귀인 정씨가 죽었을 때 아무리 그를 미워하는 문정왕후일지라도 기본적인 예장(禮裝) 하사품인 석물은 내렸지만, 비문을 받고, 받은 비문을 가지고 비석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들기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흐지부지 된 듯이 보인다.


귀인 정씨 무덤 아래에는 송강의 형의 무덤이 있다.


4.

송강문학관 이은만씨가 없으니 계획에 차질이 왔다. 어디로 갈까? 음, 그래. 전에 찾다 못 찾은 「연산군 금표비」나 보자. 금표비 관산동 위에 있는 대자동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지도상 위치가 지도마다, 홈페이지마다 틀렸다. 다만 왕족인 ○○君 무덤가에 있다고 했다. 에라 모르겠다. 근처의 큰 무덤을 다 뒤지다보면 나오겠지.


대여섯군데를 들렸는데도 없다. 오기가 생겼다. 끝까지 뒤지려고 하는데, 트럭을 몰고 나가는 분이 친절하게 장소를 알려주고 안내해 주었다. 금표비는 무덤가가 아닌 길옆으로 옮겨져 있다. 허탈하다.

 

연산군 금표비/ 지금은 길가에 초라하게 서있다.

 

연산군 금표비에는 금표내범입자 논기훼제서율처참(禁標內犯入者 論棄毁制書律處斬)이라고 써 있다. 뜻은 침입자는 기훼제서율에 의해 처참한다는 것이다. 기훼제서율은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에 대한 처벌법으로 연산군시대 한글로 연산군을 비난하는 투서와 벽서가 있어 그 범인을 찾고, 벽서를 막기 위해 한글 사용을 금하고, 이를 어긴 사람은 3족을 멸하겠다는 어마어마한 벌이다. 어찌됐던 지금 기준으로 보면 미친놈이 틀림없다.


말이 나왔으니 조금 사족을 붙이자. 광해군에 이어 요즘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는 연산군에 대한 다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 같다. 사실 금표비는 연산군이 처음 세운 게 아니다. 왕실의 사냥터를 위해 세운 것도 명나라 등 중국에는 일반적인 예이다. 연산군 때까지만 하여도 왕의 권세가 살아 있을 때이니 문제는 있더라도 그 자체로 그를 폭군으로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연산군이 폭군이 아니라는 얘기는 아니고, 반정의 주역들도 그놈이 그놈이랄까 하는 반감이...

 



이성군(성종 아들)의 무덤 앞에 있는 석등/ 기하학적 무늬가 특이하다.

 

5. 그외 석물들의 특징1 (문인석)

 

옥산군(1490(성종21) 죽음) 무덤의 문인석/ 관모가 요즘 사극 신돈에 나오는 것처럼 각이져있다.

 


이성군(1552(명종 7) 죽음) 묘의 문인석/ 옥산군보다 약 60년 후에 만든 석물의  관모는 금관조복의 금관과 유사하게 바뀐다. 임진왜란 이후인 숙종대 이후에는 금관이 일반화되는데, 금관양식으로는 가장 초기형태에 속하는 것 같다.

 

6. 그외 석물들의 특징 2 : 비석

 


옥산군의 비석/ 투구처럼 생겼다고 해서 투구형 비석이다. 고려말, 조선초에 유행하던 양식인데, 왕조 성립 100년이 지난 성종 때에도 이런 비석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형식을 유지한 마지막 정도가 아닐까 한다.



투구형 비석의 사대부 비석/ 위 옥산군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비석으로 같은 사람이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왕실과 인척관계에 있던 경주김씨의 무덤으로 고종 때 재상을 지낸 김홍집(인근에 무덤이 있음)이 이 집안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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