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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손을 내밀어 우리

56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10/22
    [옛글] 가을에(200자 단상)(3)
    손을 내밀어 우리
  2. 2004/10/07
    [편지] 벗에게 주는 말 1(2)
    손을 내밀어 우리
  3. 2004/10/06
    통곡(1)
    손을 내밀어 우리
  4. 2004/10/04
    그야말로 잡담(21)
    손을 내밀어 우리
  5. 2004/09/26
    비정규직 개악입법 정리버젼을 트랙백하다(2)
    손을 내밀어 우리
  6. 2004/09/24
    대덕R&D특구 특별법을 아시나요?
    손을 내밀어 우리
  7. 2004/09/17
    어떤 전쟁의 유혹
    손을 내밀어 우리
  8. 2004/09/12
    [옛글] 1981년에...(2)
    손을 내밀어 우리
  9. 2004/09/07
    태풍오는 날 아침(3)
    손을 내밀어 우리
  10. 2004/09/01
    아침에 블로그를 기웃거리다가 만난 시(바보 과대표)(2)
    손을 내밀어 우리

[옛글] 가을에(200자 단상)

내가 철들어간다는 것이/ 내 한 몸의 평안을 위해/ 세상에 적당히 길들여지는 거라면/ 난 결코 철들지 않겠다. 그런 노래가 있었다. 그런 노래가 있다. 어느 사이엔가 세상살이에 참 익숙해져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면 그 노랫말이 생각난다. 노란 은행잎이 연구단지의 거리를 우르르 몰려다니면 여지없이 10월이 다 가는 것이다. 한해의 겨울을 준비하며 좀 더 철들어야 할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계절이 시나브로 바뀌더라도 스스로의 의지로 철들지 않을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뛰어난 능력(?)이 아닌가. 철들지 말자. 그렇다고 해서 철부지가 되지는 말자. 세상을 우리에게 길들이며 살자. 세상을 그렇게 바꾸자. (2000.10.30)

 

술 덜 깬 아침,

심란과 우울이 불현듯 밀려들고,

택시를 타고 어제 대전역에 세워둔 차를 가지러 가는데,

노란 은행잎이 연구단지의 거리를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을 보면서

문득 이 글을 떠올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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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벗에게 주는 말 1

91년 겨울에 한 동무가 다른 한 동무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무의 가슴앓이를 옆에서 안스럽게 지켜만 보다가, 어느

날 그 동무와의 술자리를 끝낸 늦은 밤에, 나는 부리나케 실험

실로 달려갔습니다.  그 밤과 새벽 사이에 추운 실험실 구석에

서 마구 써내려간 것이 바로 이 글입니다. 내 편지글을 전해

받은 동무는 그 날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했고, 그 둘은

이윽고 결혼까지 이르게 됩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밤, 쉽게 잠들지 못하고, 내 옛 메모장들을

더듬어 가다가 우연히 이 글을 만났습니다. 반갑네요. 어쩌면

취중의 유치찬란한 마음으로 썼을지라도 동무를 향한 내 우정

의 한 조각을 만난 듯합니다. 조만간 그 동무를 만나서 소주라

도 한 잔 해야겠습니다.^.^

 

 



 

그대 사랑

분수처럼 힘차게 사위로 흩어져 내리더니

어쩌다 그 줄기 하나

제 곳에 가 닿지 않음이 안타까워

오늘도 잠 못이루고 있구나, 벗이여


이 척박한 땅에서는 모다 외로운 이들 뿐이거늘

하필 그대가 지나는 길마다 사랑의 꽃 활짝 피어나니

누가 있어 그 꽃그림자에 갇힌 모습 살펴

손 내밀어 그대를 쉬게 하리오만

정이 많음이 병이런가

사랑이 깊음이 죄이런가

봄볕 오는 거리로 나가 춤추지 못하고

낯붉히며 그늘로 물러서는 나의 벗이여

사랑이여 연민이여 드러낼 수 없는 부끄러움이여

나조차 이 새벽에 애닯고 눈물겹고나


그런 것을, 그토록 몸달은 그대인 것을

나는 그만

사랑은 오래도록 남몰래 지키는 것이요

사랑은 말못할 가슴앓이를 안으로 안으로만 견디다가

해살라 먹고 달 살라 먹고 별까지 안은 후에

이윽고 찬란한 아픔으로 터지는 석류와도 같은 것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했구나


서둘지 마라, 그대

자칫 강가에 닿기도 전에

사공의 벗은 옷에 님의 옷깃 가리운 걸 모르고

서러운 물로 풍덩 뛰어든 낭자의 전설처럼 큰 슬픔이 또 올까

그것이 두렵다고

그렇게 말하였구나


기다림 속에서 애타고

고통 속에서 입술을 말리면서

젖은 장작은 서서히 불씨를 키우고

마침내 비바람 몰아치는 여름날에도

눈보라 내리치는 겨울날에도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피어 나리라 활활 타오르리라

그렇게 떠벌였구나


아닐세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대 사랑의 깊이를 내가 몰랐네

그대 불꽃의 밝기를 내가 미처 몰랐네

그대 정염의 힘찬 깃발을 내가 정말이지 못 보았네

그래, 사랑은 뜨거운 몸뚱아리를 아낌없이 던지는 것

그래, 사랑은 거대한 불구덩이에도 망설이지 않고 뛰어드는 것

그래서 바다와 같이 깊은 가슴으로 모든 것을 끌어안는 것

그래서 하늘과 같이 넓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것

그래서 하나가 되고 그래서 새로운 세계로 열리는 것

이제 알겠다, 벗이여

그대 사랑의 빛깔과 그대 사랑의 냄새와 그대 사랑의 맛깔

술 마시지 않고도 취하는 순간

아하 비로소 그대 사랑의 의미를 바로 알겠다


지금 내 감히 이야기하느니, 달려가라 벗이여

오직 하나뿐인 그대의 님를 찾아서

오직 하나뿐인 그대의 태양을 찾아서

오직 하나뿐인 그대의 영혼을 찾아서

달려가라, 견딜 수 없이 서러운 밤들을 모아

그대의 발치에 버리고

무수한 불면의 술잔들을 내던지고

술잔 속의 온갖 상념을 떨치고 달려가라

가서 두려워 말고 고백을 하라

부끄러운 고백 뜨거운 고백 오로지 사랑의 고백을

이 새벽이 밝으면 기어이 하라 늦기 전에

하라


이루어지리니 그대의 소망

이루어지리니 그대의 꿈

아름답구나, 그대의 기나긴 사랑 그 마지막 열병 그 눈부신 불꽃.


- 1991. 2. 27. 새벽 2시 30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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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

새벽에 일어나
한 동지의 울음으로 포화된
음성메시지를 듣는다.

 

동지의 울음에 얹힌 질타
동지의 울음에 담긴 원망
동지의 울음에 갇힌 한탄
동지의 울음에 비친 후회
동지의 울음에 배인 절망

 

제때에 손 내밀지 못하고
온 몸 던져 부둥켜 안지 못한 나,
새벽 미명에
유구무언이요 속수무책이다.

 

이르기도 하고 늦기도 한
질타와 원망 따위에만 집착하여
울음의 뿌리로 한껏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저 자위하기를,
한바탕 웃음이 폭죽처럼 터지는 날은 오리라.

 

짐짓 불화인듯 아슬아슬하다가
저마다의 울화로 내닫는 관계라면
어찌 동지이겠나, 이 구태의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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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잡담

(쌍둥이칼)

추석 직전에

아내가 출장으로 집을 비웠던 8일동안

아내가 집에 있었으면 마땅히 지출했어야 할 돈까지

내 지갑에서 꺼내야만 했거든.

어쩌다 내가 주말 출장이라도 가게 될 때

아이들과 함께 하루를 지내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 줄 아느냐 하면서

꼭 내 지갑에서 돈을 울궈내던 아내를 기억해 내고는,

오늘 아침에 넌지시 그래 봤다.

"출장갔을 때 내가 대신 내줬던 돈 안 갚어?"

아내의 한마디,

"쌍둥이칼 값이 얼만줄 알아? 그걸로 됐지."

 

독일 출장에서 돌아와서

아이들에게는 이런저런 선물보따리를 풀어놓았는데

내겐 쌍둥이칼이 선물이라고 했다.

아니, 자긴 쌍둥이칼 안쓰나.

 

 

(술)

지난 주말

수련회 하나 길게 이어지면서

당초 예정했던 서울행이 취소되었다.

수련회 뒷풀이에서 소주와 동동주가 얼콰하게 돌았고(30명 정도),

서울행이 취소되자마자 오산에 있는 동지(간장오타맨)를 급히 불러

전어회와 소주를 신나게 들이키면서

여기저기서 일하거나 쉬고 있던 동지들을 불렀더니(날세동, 이상동, 이모, 김모...),

그게 급기야

늦은 밤에

서울에 있던 이들까지 부르기까지 하게 되었고(술라, 바다소녀),

일요일 아침, 해장국을 먹으러 간 집에서까지

소주잔이 넘치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니

참 징하게도 술을 마셨다.

집 나온지 23시간쯤만에 집에 돌아갔더니

아내가 그러더군.

12시간 안에 오겠다던 사람이...

24시간을 꼭 채우고 오지 그랬어?

 

비실비실 장을 봐다가

모시조개와 콩나물과 무우채를 넣고

시원하게 끓인 국물 한사발 먹고서야 겨우 기운을 차렸고,

늦은 밤에도 허기가 져서

양송이와 양파를 듬뿍 넣은

스파게티 한 접시를 비우고 나서야

정상의 컨디션으로 돌아왔다.

 

(다시, 불면)

참으로 불규칙적인 생활에

지금 당장 아니면 연말까지는 풀어내야 할 여러 숙제들이

내 역량에 대한 회의까지 겹치고

이런저런 고민들까지 더해지면서

일에 집중하지도 못하고 잠도 설치는 날이 잦아진다.

불면의 밤이 낯선 일은 아니지만

불면의 밤에 내다보는 세상 풍경은 때로 낯설고 안으로 들여다보는 내 자신은 더욱 낯설다.

 

(그밖에)

뭐하고 있나, 출근부터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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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개악입법 정리버젼을 트랙백하다

* 이 글은 무명씨님의 [비정규직 개악입법 정리버젼.]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한번만 읽고 가고 싶지는 않아서 트랙백합니다.

필요하거나 생각날 때 다시 와서 읽어 볼 수 있겠지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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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R&D특구 특별법을 아시나요?

<네트워크> 10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 최근 대덕연구단지기관장협의회를 포함한 몇몇 단체가 공동으로 연구원들과 교수, 벤처종사자들을 대상으로 R&D특구 특별법 지지서명운동과 지지모임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R&D특구 특별법의 입법 취지를 홍보하고 공감대와 당위성을 확산하기 위해 9월말까지 지지모임 결성을 완료한다는 것이고, 공공기관들이 앞장서서 직원들의 서명을 독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기노조에서는 즉각 논평을 발표하고, 정부 산하 기관이 나서서 이용한 서명운동을 벌이는 것은 R&D특구 특별법에 제기되고 있는 문제점들을 왜곡하여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도대체 대덕R&D특구 특별법(대덕연구개발특구육성에관한특별법)이 무엇이길래? 대덕연구단지를 R&D특구로 지정하여, 여기에 집중되어 있는 우수 연구인력과 R&D인프라를 토대로, 연구개발 혁신과 기술의 상업화를 촉진하여 세계적 혁신클러스터로 육성하기 위해 국내의 여타 지역과는 차별화된 제도를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2002년에 대전시가 대덕밸리를 속칭 경제특구로 지정해줄 것을 중앙정부에 건의했다가 재경부,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자 경제특구적 요소를 차용한 R&D특구 지정을 요청하였고, 2003년 12월 5일 대덕연구단지 30주년 기념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이를 전격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본격화된 애물단지이다. 왜 애물단지냐고?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들의 비판에 밀려 특히 독소조항으로 지목되었던 교육, 의료시장의 개방과 관련한 조항은 대체로 삭제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지만,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연구결과가 상업화에 실패하고 있어서 30년이나 투자했는데도 본전을 뽑지 못하고 있으니, 연구소기업을 설립하고 상업화 종합지원기관을 설치하는 등 R&D 상업화 기반을 구축하겠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이다. 이미 정부출연연구기관은 90년대 이후 공공연구기관으로서 제 역할을 찾기보다는 당장에 돈이 되고 기업활동에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하도록 강요받아왔다. 특히 97년 IMF 이후 연구원들은 초유의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구조조정 방침에 밀려 연구소를 아예 떠나거나, 벤처기업을 설립하거나, 외국으로 취업하거나, 직업 자체를 바꾸는 등 신산스럽고 파란 많은 역정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여전히, 앵벌이 과제 수주경쟁에 내몰리고 비정규직이 크게 늘어나, 안정적 연구환경을 해치고 연구의 질이 악화되는 등 연구역량이 급속도로 위축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 판에 무조건 상업화를 위한 연구로 일로매진하라니? 조장(助長)이라는 말이 있다. 모내기를 하고서 벼를 빨리 자라게 하기 위해 벼의 순을 잡아 뽑아 결국 벼를 아예 죽여버린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상업화를 위한 것이든, 기초 원천기술의 확보를 위한 것이든, 지식의 축적을 위한 것이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들쭉날쭉하는 정책으로 연구원들의 신명을 가라앉힌다면, 설령 아무리 좋은 법이 만들어지더라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R&D특구 특별법이 조장(助長)의 또 다른 사례로 남지 않도록 정부는 각성할 일이다.(2004.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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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전쟁의 유혹

지난 달에 <네트워커>에 기고한 것인데, 뒤늦게 여기에도 옮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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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신문을 잘 보지 않는다. TV도 심야가 아니면 좀처럼 만나기 어려우니까 틈틈이 인터넷매체들을 뒤져서 그나마 관심있는 뉴스나 가십거리를 챙기곤 한다. 한때는 신문 은 출근하기 전에 두엇 섭렵하고 TV나 라디오 뉴스는 꼭 챙기는 편이었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을까? 거의 차별화되지 않는 기사와 뉴스들의 천편일률적인 구성에서 비롯된 식상함 때문이요, 언론 매체들의 끝 모를 선정성에 질린 까닭이요, 믿고 따를만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해서인 듯하다. 심하게 말하면, 신문이나 티비에서 믿을만한 소식은 교통사고나 살인사건으로 누군가 다치거나 죽었다는 것 정도인데, 그것도 원인이나 동기 따위는 대체로 추리소설 수준에서 머문다.


기술이 갖는 위험성뿐만 아니라 인권침해의 문제가 강력히 제기되고 있는 사안에 대한 보도들도 누가 죽어야 기사가 되는 다른 소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CCTV를 무려 272대나 설치하고서 그것이 무용지물이 될까봐 전전긍긍하던 것은 서울 강남경찰서나 그것을 찬성한 지역주민만은 아니었던지, CCTV 관제센터 개관 4일만에 절도용의자 한명을 검거하자 도하 언론은 쾌재를 부르며 보도했다. CCTV가 설치되어도 범죄 발생율이 줄어들지 않더라는 다른 나라 사례나 프라이버시와 인권 침해의 측면을 둘러싼 논쟁들이 잠시나마 실종되는 순간이다. 이제 강남구의 CCTV가 그 지역의 범죄를 다른 지역으로 쫓아내어 범죄없는 지역으로 만들든지, 가끔 영문도 모르는 좀도둑들이 걸려들어 경찰의 공을 세우든지,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게 생겼다.


한달전쯤 나라 안의 모든 지면과 공중파를 점령하다시피 했던 이른바 뇌졸중 감기약 파동.  명색이 약사면허를 가진 나도 처음엔 미국 FDA의 제조,판매 중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감기약 성분(PPA; Phenylpropanolamine)을 4년 가까이 더 생산,유통시킨 관계 당국에게 분노하고 손가락질했으니, 일반 국민들은 오죽했으랴. PPA가 소량으로는 콧물감기약(코 충혈제거제)으로 쓰이지만 더 많은 양으로는 여성들의 다이어트를 위한 식욕억제제로 쓰이며, 제조,판매 중지의 근거가 되었던 예일대학교의 연구보고서에는 “PPA를 고용량인 식욕억제제로 사용할 때 여성에게 출혈성 뇌졸중을 유발할 수 있다”고 한 사실과 제조,판매 중지에 대하여 미국에서도 찬반이 엇갈렸다는 것, 유럽의 몇 나라와 우리가 곧잘 뒤따르곤 하는 일본에서는 PPA에 대한 후속 조치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신문에 거의 언급되지 않았고, 나중에 관련 자료들을 챙겨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 정부의 잘못이 없단 말이냐? 천만에. 다만, 그것이 누구의 잘못이든 신문과 방송은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그저 언론이 수시로 제공하는 ‘쓰레기 만두’와 ‘중풍 감기약’을 각성제로 삼아 사람들이 떼지어 흥분하면 그만이다. 그러는 사이에, 신용불량자는 370만명을 웃돌고, 자살증가율은 OECD 최고를 자랑하며, 작년 한해만 해도 하루에 8명씩 산재로 죽어갔다. 내 스스로 과학기술노동자임을 자처해왔던 터, 다른 건 몰라도 노동의 문제와 과학기술의 문제만 갖고라도 언론과의 한판 전쟁을 치르고 싶다.

(2004.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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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 1981년에...

가끔 내 영혼이
1980년대 초반의 어떤 시점에 묶여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영화를 보다가도
억눌려 있던 사람들이 떼지어 일어나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내달릴 때
그 성패를 떠나서 무조건 눈물부터 흘리곤 한다.
때론 그것이 너무도 황당하여
주변의 모두가 와하하하 웃을 때조차도
나 혼자 뚝뚝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눈물조차 억압하던 시대가
내 젊은 시절에 있어서 그런가 보다.
언젠가 80년대를 젊음으로 지나온 사람들은
모두가 정신병을 앓고 있는 거라고 쓴 적이 있었는데
나한테서 자주 그런 징후를 본다.

 

각설하고,
옛 자료들을 뒤적이다가
일일이 등사기로 밀고 제본까지 직접 했던
동아리 회지에 실린 내 편지글이 눈에 띄었다.
감히 복사라고는 엄두도 못내던 시절,
일일이 글씨를 쓰고 수천매를 등사기로 미는 것까지야
남들도 다 하는 일이었지만,
직접 제본까지 한 것은 돈을 좀 아껴보자는 심산이었던 것 같다.
검열이 엄격했던 그 때,
우연한 일이었던지
누군가 걱정되어 미리 검열을 받았는지
230쪽 두께의 그 회지 중에서
유독 내 글을 지목해서 문제가 있다고
당시로서는 위풍당당하던 국가안전기획부 직원이 그러더라고
몇 친구들이 걱정 반 장난 반 섞인 표정으로 얘기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졸업정원제를 비판했던 글을 단과대 회지에 기고했다가
책은 인쇄되어 나왔는데 내 글의 일부는 가위질되던 기억도 있다.

 

글을 다시 읽으니
내 병의 근원이 쬐금 보이는 듯하다.
치기, 감정의 과잉, 자발적 격리의 버릇...
참, 아래 글을 쓰던 때 나는
한 학기 자의반 타의반의 휴학을 하고 시골에 칩거 중이었다.

 

 



신이여, 이 약한 자를...
-ㅇㅇ 6대에게

 

1.
들국화가 지고 있다.
가을이 지나는 들판
찌푸린 하늘 밑으로
저녁 바람이 엉금엉금 기어오고
여기
어리석은 인간이 하나 있어
지평선 너머로
별빛처럼 한 점으로 비쳐오는
도시를 바라본다.

 

쫓을 수 없는 사랑이란
감정, 씻을 수 없는
죄의 느낌...
꿈도 현실도 아닌
이 차디찬 공간의 어슴프레한
모퉁이에서
아아,
나는 정녕 뉘우쳐야만 하는
못난 이.

 

샛노란 절망으로 치닫는
내 심장의 비통한 절규는
나의 입을 막아 벙어리가 되게 하고
나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되게 하고
내 얼굴을 덮어 표정을 가린 채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나와 나의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있다.

 

목을 메는 간절한 기도로서도
한 나절을 흘리우는 참회의 눈물로도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 없음을
지금 나는 알고 있지만
약한 자의 가슴을 얽어 맨
한 가닥 가냘픈 미련의 끈으로 하여
낮과 밤의 경계에서 무릎을 꿇고
다시 한번 친구들의 이름을 부른다.

 

용서해 다오
나의 친구들이여!

 

2.
손가락을 깨무니 피가 솟아난다.
맑은 적색의 아름다운 피가
내 손 끝으로 흐르고 그것은 이윽고
방울방울 나의 눈물이 되어
떨어진다. 내 모든 친구들의
이름이 거기 하얀 종이 위에
쓰러져 있고 나는 피의 눈물에
젖고 있는 그들을 부르며 눈을 감는다.
(머리 속에는 아직 미운
도시의 그림자가 남아 있지만
이제 나의 사랑과 증오의 허황된 꿈들은
힘겨운 날개짓을 하며 사라져 가고 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다. 피가 흐르고,
눈물이 흐르고, 돌이킬 수 없는
죄의 바다에서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며 나는 표류하고 있다)
잠시 동안의 침묵과 함께 나의
친구들은 선명한 미소로서 내
가슴으로 줄지어 들어서고 나의
감은 두 눈이 자그마한 경련을
일으키자, 우뢰와 같은 함성과 함께
하늘과 땅이 핏빛으로 하나가 된다.
-오오 신이여!
바라옵건대
나의 친구들의 아름다운 영혼이
보다 자유스럽고 진실하게
만날 수 있기를~
(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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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오는 날 아침

끝내고 싶지 않은 교섭 하나
현장 간부들의 성화에 밀려 마지못해 끝냈다.
잠정합의한 날에는
혼자서 다른 도시로 달아나서 밤새고,
끝내 조인을 한 날에는
그로 하여 울분이 가시지 않는
또다른 지부의 간부들에 둘러싸여 술을 푸고
내가 그 지부의 조합원인양 내 몫 이상 싸우겠노라고
약속 하나 내질렀다.
교섭이 막바지에 이르자
술만 마시면 취하는 지부장 앞에서
취할만큼 마시지 못하는
혹은 마셔도 취하지도 못하는
나는 비겁하다.
질긴 놈이 이기리라,
때론 끈덕지게 투쟁하는 것보다는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도 승리를 가져다 주느니 했건만,
버텨 본 자들은 안다, 기약없이 버티는 것이
싸우다가 힘이 딸려 꿇는 것보다
더 억센 투지와 깡다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이지도 않는 가공의 적들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백골단의 폭력보다
더 크고 깊은 공포를 주기도 한다는 것을.
아무리 도리질해봐도
우리가 시나브로 그렇게 길들여져 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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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블로그를 기웃거리다가 만난 시(바보 과대표)

우리학교 1학년에 바보 과대표가 한 명 있다.
술만 먹으면 개가 되고
밍맹몽, 007빵 무얼 하더라도 진짠지 가짠지.
야튼 맨날 걸려 얻어맞으며 헤헤 웃고
벌주 발칵발칵 마시며 배꼽 뚜딜겨
뽕짝 걸판지게 뽀아대는 천하에 바보가 있다.
항상 그 바보 곁에 사람들이 드글거리고

그 수첩에는 120명 동기 이름 모두 적혀있다.
누구누구와 언제 만났고
누구의 고민은 무엇이고
누구와는 아직얘기 못해 보았으니.
멋있는 싯구 하나 없지만 그런 것들이 잔뜩 쓰여있다.
수업 안들어오는 애들 리포트 알려주고
시험때는 쏘스 제비 벌레 물듯 물어와 노놔주고

역사연구반이니, 사회과학 연구반이니
소수의 의식을 위한 것보다
바둑반이니 농구반이니
그런 모임을 만들어 120명 모두를
함께하는 고민으로 자기 과 소모임에 참여시켰다.

일기장에는 자신의 참된 삶의 문제
누구보다 겸허하게 치열하게 고민하였으며
개의 안락에는 추호의 타협이 없었으며
항상 5시간 수면을 철저히 지킬것을 강제했고
서재에는 항일 무장투쟁사가 손 때묻어 간직되어 있었다.

그날
자기 과 친구들에게는 아직 이르다며 본대에 있으라 하고
아스팔트 하이바에 우리 선배 전투조들 떨고 있을때
익살스런 춤 "간다 간다 뽕간다"
신명나게 두려움 누그려주고
전투대장의 진격의 나팔 우렁차게 울리니
그는 누구보다 최전선에서 정확하게 꽃병을 꽃았다.

드디어 놈들이 사나운 이빨 으르렁 거리며 덤벼들때
한 친구 전사는 미끄러지고
모두 안타까이 돌아 섰을 때
그 바보 전사 바보처럼 의연히 달려 나갔다.

다음날 한계레신문에 조그맣게 바보 이야기가 실려다.
고대에서 2명이 화염병으로 잡혀오고 100명이나 친구들이
성북서 항의 방문을 했다고 바보를 풀어 달라고 울부짓었다.
총학생회장님이 잡혀가도 그런 일이 없어는데

그리고 다음날 교문과 식당에서는
바보의 바보같은 친구들을 누구나 만났다
그들 손에는 당구 큐대가 아니라
볼펜이 아니라 오락실 운전대가 아닌
규탄 성명서가 들여있었다.

그리고 며칠 지난 뒤 학생의 날 가투 전투조 사전모임에서
한 1학년 학우의 결의 발표가 나의 심장을 쳤다

"나는 바보의 다른과 친구입니다.
투쟁하란 말은 없어지만
그 친구는 말은 없어지만
저는 아직 짱돌 한 번 던진적 없었지만 바보들 잡아간 놈들
용설할 수 없습니다.
오늘 비록 제가 잡혀간다하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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