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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버, 국가론에 대한 단상[펌글]

적린님의 [그레이버, 국가론에 대한 단상] 에 관련된 글.

 

관련글: 잠정적 자율지대: 혹은 마다가스카르의 유령-국가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단상들』 중간의 몇 페이지(pp.65-70)를 번역한 것.

 

현존하지 않는 과학의 몇몇 교의들(Tenets of a Non-exsistent Science)

 

여기서는 아나키즘 인류학이 탐험할 만한 이론의 영역 몇 가지를 개괄해 보려 한다.

 

1) 국가에 대한 이론

 

국가는 독특한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다. 국가는 제도화된 침략 혹은 갈취 형태임과 동시에 유토피아적 기획이다. 첫 번째 성격은 어느 정도 자율적인 공동체라면 어떤 곳이든 국가를 실제로 경험하게 되는 방식을 반영한다. 하지만 두 번째 특징은 국가가 문자화된 기록 속에서 나타나는 방식이다.

 

어떤 의미에서 국가는 무엇보다 "상상된 총체성"이며, 역사적으로 보면 국가론에 포함된 대부분의 혼란은 이 점을 무능력 또는 거부감 탓에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유래했다. 대부분의 경우 국가는 이념(idea)이었고, 사회질서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자 통제의 모델로 상상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페르시아, 중국, 고대 그리스 어디에서 왔건, 사회론과 관련된 최초의 저작들이 언제나 국정운영법의 형태를 취했던 이유가 된다. 이로 인해 두 개의 파괴적 효과가 발생했다. 첫째는 유토피아주의가 모욕의 이름이 된 것이다. ("유토피아"라는 말이 처음으로 연상시키는 것은 대개 완벽한 기하학적 구성을 지닌 이상적 도시의 이미지다. 이 이미지는 왕실의 병영에 기원을 둔다. 단일한 개인의 의지가 전체로 뻗어 나간 기하학적 공간, 전면적 통제에 대한 환상.) 이 모든 것은 최소한으로만 말해도 무시무시한 정치적 결과를 가져왔다. 두 번째는 국가, 사회질서, 심지어는 사회가 서로간에 상당한 수준으로 조응한다고 추측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가장 웅장하고 심지어는 편집증적인, 세계-지배자들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들이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우주론적 프로젝트라면 무조건, 아주 거칠게 말해도, 지상에 있는 무언가와는 실제로 대응된다고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5줄 정도 생략]

 

그렇다면 적실한 국가 이론은 각각의 경우에 해당되는 지배의 이상(아무 것이나 다 될 수 있다. 군대식의 규율을 강제할 필요성, 다른 이들을 고무시킬 은혜로운 삶을 극적으로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능력, 계시를 피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인간 심장을 신에게 바쳐야 할 필요 등등), 그리고 지배의 메커니즘을 서로 구분하는 것이며, 이들 사이에는 일치/대응(correspondence)이 필연이라는 가정을 버리는 것이다. (일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점은 경험적으로 확인해야 하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보자. "서구"(the West)의 신화 대부분은 복종과 절대권력의 이상에 기초한 페르시아 제국과, 시민적 자율성, 자유, 평등의 이상에 기초한 아테네와 스파르타 같은 그리스 도시 사이에 발생하는 신기원적 충돌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묘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런 아이디어들(특히 아이스킬로스와 같은 시인이나 헤로도토스와 같은 역사가들의 생생한 재현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아마 그런 것 없이는 서구 역사를 이해조차 할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바로 그 중요성과 생생함 때문에, 역사가들은 점차 분명해지는 현실 앞에 눈이 멀어 왔다. 즉, 이상이 무엇이건간에 아키메네스 제국(Achaemenid Empire → 원문에는 Achmaenid라고 되어 있음)은 그 신민(subject)의 매일매일의 삶에 대해서는 매우 가벼운 간섭만을 했었다는 것이다. 이 점은 특히 아테네인들이 노예들에게, 스파르타인들이 자신의 농노였던 라코니아 인구의 절대 다수에게 행사했던 통제력의 정도와 비교하면 훨씬 더 사소해 보인다. 이상이 무엇이건간에 관련된 대부분의 사람에게 현실은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진화인류학이 발견해 낸 가장 충격적인 사실 중 하나는 물리적인(mechanical) 의미에서의 국가가 전혀 없어도 왕과 귀족, 모든 종류의 외적 군주제의 포위가 완벽하게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주권" 이론에 대해 그토록 많은 잉크를 소비한 정치철학자 모두에게 흥미로운 사실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만도 하다. 대부분의 주권자들은 국가의 수장이 아니며 그들이 선호하는 기술적 용어들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이상 위에 구축되어 있다는 점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 이상 속에서 왕의 권력은 실제로 그 자신의 우주론적 구실들을 주어진 영토의 인구에 대한 진정한 관료제적 통제로 변환시키는 데 성공한다. (서유럽에는 이와 비슷한 무엇인가가 16세기와 17세기 무렵 출현하기 시작했지만, 시작되자마자 주권자의 인격적 권력은 "인민"(the people)이라고 일컬어지는 허구적 인격으로 교체되며, 관료제가 거의 대부분을 점령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인식하는 한에서 정치철학자들은 이 주제에 대해 아직까지 별로 할 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점에 대해 나는, 용어를 너무 잘못 선택한 탓이 크지 않을까 의심해 본다. 진화인류학자들은 완성된 강제적 관료제 형태가 없는 왕국(kingdom)을 "추장제"(chiefdom)라고 일컫는데, 이 용어는 솔로몬왕이나 경건왕(Louis the Pious), [중국의] 황제(the Yellow Emperor)보다는 제로니모[아파치 추장]나 시팅불[Sitting Bull, 수 인디언의 대추장]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용어다. 그리고 물론 진화론적 틀 자체는 그런 구조들이 국가에 대안적인 형태라거나 심지어는 국가가 변화하여 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대신, 국가 출현의 바로 전단계인 것으로 여긴다.

 

이 모든 사실들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주된 역사적 과제가 될 수도 있을 듯하다.

 

2) 국가 아닌 정치체(political entity)에 대한 이론

 

그래서, 그건 한 개의 프로젝트가 된다. 즉, 국가를 유토피아적 상상체, 그리고 도주와 습격의 전략(strategies of flight and evasion)이나 약탈하는 엘리트, 조절과 통제의 역학을 포함하는 혼란스러운 현실 사이의 관계로 재분석하는 것이다.

 

이 모든 문제들은 또 다른 프로젝트의 필요성을 강조해 준다. 이를테면 우리가 국가로 보는 데 익숙해져 있는 많은 정치체들이 최소한은 베버적 의미에서 국가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지 물어보게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정치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또 어떤 함의를 갖는가?

 

어떤 면에서 그러한 이론 문헌이 아직까지 없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내가 짐작하기로는, 우리가 국가주의 틀의 바깥에서 생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징표인 듯하다. 여기에 딱 맞는 좋은 사례는 국경이라는 제한을 없애자고 주장해 온 "반세계화" 활동가들의 지속적인 요구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세계화(globalize)할 것이라면, 우리의 주장은, 정말로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국경을 없애자.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오고 가게 하며, 맘에 드는 곳에서 살 수 있게 하자. 이 요구는 종종 일종의 세계시민권(global citizenship)이라는 개념과 관련된 용어들로 제시되곤 한다. 하지만 즉각적인 반대 또한 떠오른다. "세계시민권"에 대한 요구는 일종의 세계국가를 요청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그런 것을 원하나?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국가 바깥의 시민권을 이론화할 수 있을지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는 종종 심원하고 극복 불가능한 딜레마로 취급되곤 한다. 하지만 만약 문제를 역사적인 방식으로 고려한다면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하기는 어렵다. 근대 서구(Modern Western)의 시민권과 정치적 자유의 개념은 대개 두 전통으로부터 유도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고대 아테네에서 기원하고 다른 하나의 주요 줄기는 중세 잉글랜드(마그나 카르타나 권리청원 등등에서 왕에 대한 귀족의 특권을 선언하는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향이 있고, 그 이후에는 동일한 권리가 나머지 인구까지 점진적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사실상 역사가들은 고대 아네테나 중세 잉글랜드가 국가이기나 했는지의 문제에서도 합의를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선은 시민권이, 그리고 둘째로는 귀족의 특권이 그토록 잘 정립되어 있었는지도 불분명하다. 정말로 존재했던 최소한의 국가장치가 시민층이 집합적으로 소유하는 노예들에 의해서만 구성되었다는 점을 고려하기 시작하면 국가장치에 의한 힘의 독점을 행사하는 존재로서 국가가 아테네에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아테네의 경찰력은 현재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수입된 스키타이 궁수들로 구성되었고, 그들의 법적 지위와 유사한 것은, 아테네의 법률에 따르면, 고문(torture)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닌 노예의 증언은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될 수 없었다는 사실로부터 수확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런 정치체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추장제"? 전문적이고 진화론적인 의미에서 존왕을 "추장"이라고 서술할 수도 있을 법 하지만, 페리클레스에게 그 말을 적용하는 것은 정말 우스워 보인다. 고대 아테네가 아예 국가가 아니었다면 "도시국가"라고 계속 부를 수도 없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적 도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똑같은 문제가 국가형태, 혹은 보다 최근에는 국가와 유사한 정치체들에 대한 유형학에도 적용된다. 스프루이트(H. Spruyt)라는 이름의 역사가는 16세기와 17세기의 영토국가들이 유일한 선수(only game in town)이기는 힘들었다고 추측한다. 최종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게 되었지만(최소한 즉각적으로는) 본래적인 유효성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 다른 가능성들도 있었다(실제로 국가였던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주권에 대해 전적으로 다른 개념을 포함했던 상인연합인 한자동맹 등). 나 자신은 영토 국민국가가 승리하게 된 까닭은, 이 초기의 세계화 단계에서, 서구 특권층이 국가의 이상에 부합하는 균질한(uniform) 인구를 지녔던, 당시로서는 유일한 국가였던 중국을 모델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균질한 인구는 유교 용어들을 빌면 주권의 근원이고 고유한 문학의 창조자이며, 단일한 법률에 종속되고, 고유한 문학으로 수련받아 그 덕성에 따라 선출된 관료들에 의해 행정이 진행되는 존재다... 현재의 민족국가가 겪고있는 위기, 그리고 국가와 같은 일을 많이 하지만 훨씬 덜 추악한 국제 제도들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 바로 옆에서, 그에 맞서는 형태로 정확히 국가는 아님에도 여러 면에서 그만큼이나 추악한 국제 제도들이 급증하는 현상을 볼 때, 그런 이론의 결여는 진정한 위기가 되어 가고 있다.

 

이담에 오는 주제들(tenets)은...

 

3) 또 다른 자본주의론

4)권력/무지, 혹은 권력/멍청함

5) 자발적 연합의 생태학

6) 정치적 행복감에 대한 이론

7) 위계

8) 고통과 쾌락: 욕망의 사유화에 관하여

9) 소외에 대한 하나 이상의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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