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백성

역사 소설 <매월당 김시습>에서 발췌한다.

 

===========================================================

 

기러기 떼가 소리로 점을 찍어 가며 건너간 하늘에 노송 한 그루가 빈자리를 메웠다. 솔은 제물에 삭아서 떨어진 삭정이의 마들가리에 곰이 피도록 늙더라도 머리는 언제나 청솔이어서, 반쯤 취하여 먼발치기로 건너다보면 마치 금방 단장을 마치고 일어나 울짱너머로 밖을 엿보는 앳된 기녀의 운계(雲髻)가 아닌가 싶을 때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취안에 얼비친 객기의 잔재에 불과한 것일 뿐이었다. 솔은 노송일수록 청운(靑雲)을 형용할 때가 많았다. 송라(松蘿)가 켜켜로 뒤덮은 노송은 송운(松韻)이 길었고, 송운이 긴 노송은 송도(松濤)도 또한 힘졌다. 그러나 청운이란 것도 객기의 잔재에 지나지 않았다. 송홧가루가 안개처럼 자욱하고 는개처럼 휘날려 흩어지고 나면, 한 덩이의 청운도 신록을 빌어서 치장한 한 그루의 청송으로 돌아가 있게 마련이었다. 매양 두고 보아 왔기에 알지만, 사람이란 대저 미욱스럽기가 한량이 없어서 비록 저도 모르게 미혹에 빠지기를 동짓달 야삼경에 물마시듯 하더라도, 솔은 소담하고 아리따운 운계라거나, 일찍이 시들어서 못내 가슴이 저린 지난날의 청운으로 착각할 만큼 그리 신기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노송은 또 그 허다한 산지일모(山之一毛, 초목)의 한가지로 가벼이 치부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하다가 못다한 듯한 느낌이 접히는 것도 일쑤 겪어 본 감정이었다.

매월당의 망막을 차지하고 있던 노송이 율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곧 <영마루의 노송(嶺上老松)>으로 제영(題詠)하였다.

 

모든 초목이 겨울을 타는데                                   歲寒百初彫零後(세한백초조령후)

영마루의 솔 하나 그대로구나                                只有嶺上松獨秀(지유령상송독수)

줄기는 비바람에 늙을수록 굳세고                          幹排風雨老逾壯(간배풍우노유장)

너럭바위에 뿌리내려 기운 채로 견딘다                    根盤石上偃不仆(근반석상언불복)

혹이 있으니 먹줄은 맞지 않을 터                            臃腫不中繩與墨(옹종부중승여묵)

생김새가 그런 것도 신령의 보호라                          奇怪怡受鬼神祐(기괴이수귀신우)

그대 보지 않았던가 봄을 다투던 것들                    君不見春前桃李競嬋姸(군불견춘전도이경선연)  

봄바람에 며칠 안 가 지고 말던 것을                        不日又被春風瘦(불일우피춘풍수)

보굿마다 터져서 이끼는 끼었지만                           紫鱗慘裂襯莓苔(자린참열친매태)

굵은 가지 흰 것으로 장수할 걸 알겠구나.                  大枝輪囷知汝壽(대지륜균지여수) 

 

=============================================================

 

(150~151쪽에서 발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