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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이여 돌아가자!

<매월당 김시습>에서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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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가는 것이 아니었다. 세월은 오는 것이었다. 병이 깊어지고, 꿈이 얕아지고, 몸이 무거워지고, 생각이 가벼워진 것으로써, 그 동안 세월을 흘려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월에 매달려서 온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렇다. 매월당 자신이 오고 와서 이만큼 늙어 버린 것이었고, 세월이 스스로 오고 와서 이만큼 낡아 버린 것이었다.

하늘에는 북녘으로 돌아가는 새들이 며칠째나 무리를 지어서 날아가고 있었다.

덧없이 그새 이월로 접어들어 벌써 초엿새라나 초이레라고 하니, 그러고 보면 새들이 가고 싶어할 때가 되기도 한 것이었다.

매월당은 하늘의 새소리가 아녀자들이 먼 데서 앙살거리는 소리처럼 들리거나, 새들의 그림자가 눈앞을 한꺼풀 걷어가듯이 후딱 가로질러 갈 때마다 얼른 고개를 들어 새 떼를 쫓아가곤 했다. 하지만 그것이 고니인지, 물오리인지, 기러기인지, 두루미인지는 번번이 넋을 놓고 바라보면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새들이 줄을 지어서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약간 비슷하기는 해도 매월당이 언뜻 떠올렸었던 것처럼 겅그레나, 쳇다리나, 가새나, 곱자 따위와 같이 굽거나 가지를 친 어떤 물건의 모양이 아니었다. 새들은 사람들이 살림살이에 만들어서 쓰는 그런 도구의 형상을 시늉하면서 가는 것이 아니었다. 새들은 산의 능선을 그리거나, 굽어도는 들길을 그리거나, 휘어나가는 모습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것이었다.

매월당은 오늘도 가벼운 생각에 잠기어 있었다.

들앉으나 나앉으나 그렇게 묵은 일들을 되새기고 곰새기고 하는 것이 요즈음의 소일이었다.

생각하면 그 동안 걸어온 길은 아득하도록 길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내일 모레가 이순(耳順)인 것을.

매월당은 이제 몇 달만 더하면 나이가 육순이라는 것을 하루에도 몇 번씩 느끼는 것이 이 봄에 들면서 새로 붙은 습관이었다.

오늘은 느닷없이 울릉도를 생각하였다. 그러자 자연히 삼십여 년 전에 떠나간 천석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에 곁들여서 시도 한 수 떠올랐다.

 

삼신산 이야기 들을 만큼 들은 터라                            玄洲篷島飽曾耳

신선놀음이나 하면서 한세상 잊자 하니                        思欲仙遊謝世氛

마침 울릉도가 알맞다는 말 있어                                人說羽陵?避隱

높이 올라 바라보니 아득하기 구름일레.                       登高試望渺如雲

 

금오산에 살면서 한동안 동해로 나와 노닐 적에, 선사의 성류굴(聖留窟)을 거쳐서 평해의 월송정(越松亭)과 망양정(望洋亭)을 노래하던 끝에 <우릉도를 바라보며(望羽陵島)>로 제하여 천석이의 일을 잠깐 생각해 봤던 시였다. 천석이는 그 후로 아무 소리가 없었다. 뜻을 이루었기에 다른 말이 없으려니 하는 것이 옳을 터였다.

그러나 심기가 마냥 흐뭇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천석이의 일만 보더라도 신선이 정녕 따로 없지 않은가 싶을 때마다, 유문(儒門)을 열지 않았으니 유가(儒家)도 아닌 듯하고, 불문을 열지 않았으니 불가도 아닌 듯하고, 도문을 열지 않았으니 도가도 아닌 듯하고, 그 셋이 뒤범벅이 되어 두루뭉실한 무엇인가 하면 그도 아닌 듯하고, 아닌 듯하면서도 아닌 것이 아닌 듯하고, 그렇게 듯하고 듯해서 듯하고 듯한 몰골로 그럭저럭 나이 육십의 턱밑에 다다른 현실을 느낄 때마다 허망하고, 허무하고, 허전하기 이를 데 없는 심사가 되는 것이었다.

무릇 육십줄에 바짝 다가선 나이란 대자로 재거나, 줄자로 재거나, 곱자로 재거나 간에 앞날은 더이상 재기가 어려울 뿐더러, 마땅히 계한(界限)은 있을지언정 기약이란 없는 나이인 것이었다. 그 아무 무엇도 아닌 몰골로 그렇게 이르렀다고 한다면, 앞으로 그 무엇이 기어이 되리라거나, 그 무엇에 영 못 미치리라거나, 그 무엇에서 오히려 지나치리라거나 하는 따위의 앞날에 대한 어떤 기약도 막연해지는 나이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것은 대체 무엇이더란 말인가.

매월당은 그에 대한 답도 생각하고 있었다.

다된 미완성.

아직까지는 그것이 답이었다.

그러나 매월당은 또 물었다. 그리고 또 답을 하였다.

그러면 다된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고 해서, 이냥 이대로 있기만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이냥 이대로 있기만 한다고 한들 이냥 이대로 있기만 할 수 있는 날은 또 얼마나 된다는 것인가.

이날토록 걷는다고 걸어왔지만, 그 걷다가 미끄러졌던 길이 바로 이 길이 아니었던가.

걷는 사람들이 이른바 산행야숙(山行野宿)을 꺼렸던 것은, 산길을 가던 이가 날이 저물었다고 하여 산에서 가까운 곳에다 잠자리를 정할 경우, 네 발가지 짐승들에게 사냥감이 되어 주기가 십상인 까닭이었다.

매월당 자신도 그것을 경계해 왔다. 가다가 때로 자리를 잡고 쉬더라도 반드시 도회에서 쉴자리를 찾지 않았으니, 머리 검은 짐승들의 사냥감이 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머리 검은 짐승들이 먹이감이 되는 꼴 그 한 가지만은 마침내 면한 셈이 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다음은 또 무엇이었더란 말인가. 그리고 지금은 무엇이 있으며, 앞으로는 무엇이 더 있을 것이란 말인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냥 이대로 있기만 할 수 있는 날마저 얼마 안 되리라는 것이, 그것도 짐작만으로 겨우 하나 있다면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일찍이 웃으면서 지하로 돌아갔던 사람들과, 울면서도 굳이 늦도록 지상에 남아 있는 사람과의 차이였더란 말인가.

'혼이여 돌아가자 어디인들 있을 데 없으랴(魂?歸來無四方)'.

매월당은 그 귓글을 자주 되뇌었다. 소쩍새는 으레 돌아감만 못하다고 이르고, 그 자신은 으레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갈 곳이 없다고 읊었다.

그러나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은 언제나 옛임금의 혼이었지 매월당 자신의 혼은 아니었다.

어이하여 돌아갈 곳이 없겠는가. 산이 있지 않은가. 강이 있지 않은가. 구렁텅이가 있지 않은가. 바다 밖이 있지 않은가. 어이하여 이 내 한몸 버려 둘 곳이 없을 것인가. 소쩍새는 또 으레 서쪽을 부르면서 울부짖었지만, 옛임금의 혼이 아닌 바에야 구태여 서쪽만을 찾을 것도 없는 일인 것 같았다.

혼이여 돌아가자.

매월당은 어느덧 설악산에서 내려가고 싶은 생각을 혼자서 키우고 있었다. 겨우내 몸져 누워 자리보전을 하는 동안에 슬며시 움텄던 생각이었다.

다시는 못일어나게 할 줄 알았던 병이 설을 쇠면서부터 누꿈해지더니, 이제는 뜰에 나와서 볕을 쪼이며 돌아가는 새 떼를 여겨볼 만한 여유까지도 주고 있었던 것이다.

매월당은 그 여유를 전에 없이 귀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틈만 나면 설악산에서 떠나보고 싶은 마음을 더욱 도스르게 된 거였고, 들앉으나 나앉으나 묵은 일들을 되새기며 가벼운 생각으로 소일을 하는 것도, 그렇게 마음으로 하고 있는 떠날 채비 가운데의 하나인 것이었다.

 

(298~301쪽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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