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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에서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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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은 우가 비우고 간 자리를 지우려고 좁쌀로 담가서 내린 소주를 서너 구기나 떠다가 한종발에 비운 터라 베개를 돋우고 누워서 얼근한 기분으로 들었다.
- 오늘 내려간 유도령(우)은 어떻다고 하십니까요?
도의는 우에게서 들은 말이 있는 기미로 그렇게 운을 떼었다.
매월당은 우의 말을 들어보려고 묻는 말에 토를 달지 않고 대답했다.
- 그놈이 여기 와서 있은 것은 그놈이 있을 만해서 있은 것이요, 그놈이 오늘을 기하여 내려간 것은 그놈이 내려갈 만해서 내려간 것이라. 그로 보면 알 것은 약간 아는 속인 듯하니, 그놈이 나이가 아이라서(15살) 아이지 실상은 나이보다 여러 해 일찍 팬 놈일러라.
- 제가 치러보니 깊기가 녹록찮아서 제 얇은 소견에도 터럭이 세기 전에 학문을 이룰 성싶사온데, 다행히벼슬을 하게 되면 학문을 중동무이하기 십상이라 과공(科工)은 아예 아랑곳없다더군입쇼.
- 그놈이 그리 여긴다면 작히나 좋겠느냐.
- 그래서 제가 묻기를, 공부만을 팔작시면 가업을 놓치기 쉬운데, 그렇다면 장차 우리 신사(神師, 매월당)를 닮겠느냐 했더니 도리어 고개를 절레절레 하더군입쇼.
- 네 그건 또 무슨 소리더냐?
- 그래서 제가 또 묻기를, 남들은 밥과 옷과 집이 모두 공부에서 나오는데 유도령의 공부는 우리 신사의 학문이니 장차 밥과 옷과 집이 어디서 나오느냐 했습지요. 그랬더니 유도령의 답인즉 밥과 옷과 집은 괭잇자루나 가랫자루같이 한길짜리 자루 쥔 사람들의 것을 한뼘짜리 붓자루 하나 쥔 사람들이 훔친 장물인지라 쳐다볼 것이 아니라고 하굽쇼. 또 자신의 공부는 다만 마음을 다스리고자 하는 채비에 불과한 것이며, 마음이란 몸을 부리는 장본인 까닭에 되우 다잡아서 다스리지 않으면 절도를 강도로 키우는 버릇이 있는 바, 이를 깨친 것이 여기 와서 신사를 모신 보람이라고 하더이다.
- 그놈이 내게 대들던 소위로 보면 정녕 제 오장에서 우러난 소리렷다.
도의는 문득 마른침을 삼켰다. 보아하니 입에 고인 말을 자칫 흘릴세라 단속하는 태도였다.
- 남은 말이 있거드면 마저 이르고 어서 건너가 쉬어라. 겨우내 옹송그리고 있다가 두나절에 다 폈으니 삭신인들 오죽 되겠느냐.
도의는 매월당의 다그침에 마지못한 듯이 입을 열었다.
- 실인즉 사뢰옵기 미안하여 덮어 둘까 했사온데, 분부 또한 중한지라 사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도령더러 우리 신사를 닮겠느냐고 떠봤더가 도령이 마치 무슨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양으로 고개를 젓던 것이 못내 삭지 않고 걸렸댔습지요. 그래서 작별할 임시에 한번 더 묻기를, 우리 신사는 대현(大賢)이시냐 했더니......
도의는 저야말로 무슨 못 들을 말이라도 듣고 온 듯이 쭈뼛거리면서 말씨까지 어눌하였다.
매월당은 도의가 그러는 것이 더 재미져서 넘겨짚어 말했다.
- 그야 익히 듣던 소리 아니더냐. 그놈 역시 양광(佯狂, 거짓 미친 체함)이라고 했으리라.
- 아니올시다. 도령의 말을 들은 대로 전주하오면, 현인이란 누항(陋巷)에서 밥 한 그룻에 물 한 바가지로 즐기는 법인데, 신사께서는 호매(豪邁)하시고 쾌활은 하시되, 다만 주어진 대로 즐기시기보다는 문득 어디랄 것 없이 으르대시고 부르대시는 터이시라 대현에는 미급하시다 운운했사옵니다.
- 허허헛......
매월당은 오래간만에 유쾌하게 웃었다.
매월당이 우의 일을 기억할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 것도 그날 그렇게 크게 한번 웃어 봤던 여운이 아닌지 모를 일이었다.
(321~323쪽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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