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폭발이 났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가 아직도 또렷합니다. 먼저, 결국 일이 터졌구나, 탄식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든 생각은, 맞습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이전에 있었던 스리마일 섬과 체르노빌 사고가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던 것인데요. 대량으로 누출된 방사능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폭을 당한데다. 사고 인근 지역은 아직까지도 폐쇄된 채 언제 복구가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후쿠시마에 살고 있던 200만이 넘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이 피난구역으로 지정했던 반경 20-30km 내에 있는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면서도 더 걱정이 됐던 건.
 
상대적으로 방사능 피폭에 취약한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이었습니다. 가급적 빨리, 다른 무엇보다 우선 대피시켜야 한다. 20-30km가 아니라 50km, 100km까지 방사능 수치를 조사해 평상시보다 높으면 싹 다, 신속히 비워야 하는 거 아닌가 말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일본 정부도 같은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핵발전소를 중심으로 20킬로미터 권역, 30킬로미터 권역을 설정하고 옥내 대피지역, 자발적 피난지역 등을 지정했던 겁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사고 수습은 결코 적절하지도, 세심하지도 아니었음이 곧 드러납니다. 책에서 지적하듯이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피해보다 세심하지 못한 일괄 소개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게 된 겁니다.
 
수송과정에서 사망한 것은 물론이고 집과 땅을 잃었다는 상실감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까지 더하면. 모두를 몰아내는 것은 적절한 방법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아니 무책임한 방법이었다는 겁니다.
 
게다가 정확한 정보를 주지도 않은 상황에서 시행되는 일방적이고도 강제적인 방식은 반발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글쓴이가 살고 있는 미나미소마 시 하라마치 구만 해도 옥내대피역이지만 주민 3만 명 중 80퍼센트가 자발적 피난생활을 택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사사키 다카시 역시 같은 지적을 합니다. 98세의 노모와 치매에 걸린 부인을 데리고 집을 떠나는 것, 그것은 그 자체가 또 다른 재앙이라는 겁니다. 면밀하고 세심하게 주의를 살피며 주민들을 대피시키지 않는 이상 또 다른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사사키가 머물렀던 지역은 방사능 수치가 낮았습니다. 그러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전소로부터 반경 몇 km 이내는 모두 ‘어쩌구, 저쩌구’와 같은 대책들은 세심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반경 안이라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서는 방사능 오염 정도가 다를 수가 있기도 하구요. 경계선을 놓고 한 마을 내에서도 어느 집은 대피지역으로 어느 집은 대피하지 않아도 되는 지역으로 나누어지기도 하니. 엄밀히 말하자면 이런 구분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처음 사고 소식을 접하고 들었었던 생각도, 사고 직후 일본 정부가 취했던 조치들은. 그다지 세심하지 않은데다 사태를 객관적이고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대처하는 모습이 아니었음이 분명해집니다.
 
물론 전대미문의 사태 앞에서, 또 피해 수준을 예상할 수 없는 사고 앞에서는 가장 보수적이면서도 할 수 있는 한의 최대치를 해야 한다는 것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과거에 발생했던 비슷한 사례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되레 그렇기 때문에 좀 더 세심하고 주의 깊은 대처가 있었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태를 신속히 수습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속에서 지속되는 삶은 그 무엇보다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이니까요.
 
다카시가 치매에 걸린 아내와 함께 핵발전의 재앙 속에서 행한 ‘농성’에 대한 기록은 2012년 12월 3일이 마지막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는, 인간 존재와 실존에 대한 물음과 무책임한 국가에 대한 분노, 그것들 말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처럼 “내 삶이 계속되는 한, 내 ‘이야기’는 계속 것이다. 그리고 분노할 것이고, 그 정당한 분노를 에너지 삼아 끝까지 꿈을, 희망을, 이상을 이야기 할 것”(p.313)임은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거대한 사태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배울 게 없을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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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0 15:11 2014/12/20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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