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이 처음 발표됐을 때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핵발전 비중을 20%대로 낮추는 것을 권고했다기에 말입니다. 이 보다 앞서 산업통상자원부도 ‘수요관리 위주’로 에너지 기본 계획을 바꾸겠다고 했으니. 그럴 리가 없는데, 하면서도 철석같이 그 말을 믿을 뻔 했던 겁니다.
 
역시나. 아니 제대로 낚였습니다. 발표했던 것처럼 핵발전 비중을 20%대로 낮추는 건 맞는 말이었습니다. 22-29%로 ‘대폭 축소’할 것을 제시한 것 말이지요. 헌데 말입니다. 의도적이었던 건지 숨기고 싶었던 건지. 정작 중요한 건 쏙 빼놓았던 거 아니었겠습니까.
 
정부가 ‘수요관리 위주’ 정책으로 전환하겠다고 했으면 그만큼 에너지 수요 전망치도 낮춰 잡았어야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된 안을 보니. 최종 에너지 수요 전망은 물론 전력 수요는 어찌나 높게 잡아놨는지. 결국 비중은 축소됐는지 몰라도 핵발전소는 예정됐던 거에 추가로 더 지어야만 가능한 얘기였습니다.
 
산 너머 산입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가 주최한 에너지기본계획 공청회에서 산자부 에너지자원실장이 핵발전 비중을 권고안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로 해야 한다고 밝힌 겁니다. 지금도 핵발전 비중이 26.4%인 걸 감안하면 사실상 ‘증핵(增核)’하겠단 얘기니. 삼척엔 당연히 핵발전소가 들어설 것이고, 제2, 제3의 밀양이 생길 수밖에요.    
 
2. 
지난여름 핵발전소 부품 비리 사건으로 전력 위기가 발생했을 때, 전기 아끼라는 정부 권고에 말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전력 낭비를 줄이기 위해 요금을 현실화해야 한다고 했을 땐. 사업계는 물론 일반인들도 한 목소리를 냈던 것 같았습니다. ‘아니 위기는 정부가 자초해놓고 왜 값을 올리려고 하나.’
 
그래도 이를 계기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이 많이 드러났지요. 주택용보다 싸게 공급되는 산업용 전기, 전력위기 속에서도 황금알을 낳고 있었던 전력 재벌들, 전력 낭비 주범은 가정보다는 공장, 사무실 등 산업시설이라는 것 등등.
 
하지만 지금처럼 전기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달리 방도가 없다는 사실엔 모두 외면했습니다. 에너지기본계획이 2035년에 80% 이상 전력 수요가 증가할 거라는 예측치를 내놓은 게 이를 반증합니다. 결국 핵발전소는 더 지어야하고 이에 따라 송전선도 더 세워야합니다. 그러니 우선은 정부말대로 아끼고 또 아껴 써야 할 텐데.
 
물론 ‘지금 이대로’를 앞장서 외치고 있는 건 산업계입니다. 전기 과소비 공장들이 즐비한 산업단지도 그렇고 대도시에 밀집된 고층 빌딩들이 주범인 것이지요. 하지만 돌아보면 아파트 베란다에 에어컨 없는 집을 찾아보기 힘들고. 집은 없어도 차는 있어야 하고, 시장도 차 끌고 가야하니. ‘수요 관리 위주’ 정책이 들어설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결국 매년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어 여기저기서 두들겨대고 있기는 하지만. 전국 방방곡곡 전봇대를 세워 전기를 넣어주는 것도 모자라. 발전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전기를 보내주는 한전에 모두가 길들여진 탓입니다. 그러니 민간합동워킹그룹이고 뭐고 간에 이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3.
오래전부터 분산형 그리고 수요 관리 위주 에너지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더 이상 외딴 바닷가에서 전기 만드는 짓 하지 말자. 고압송전선 설치하느라 드는 돈은 물론, 이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도 해소하자는 겁니다. 송.배전 과정에서 생기는 전력 손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수요가 많은 곳 근처에 발전소를 짓고,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에너지 정책 수립으로 전환하면 가능합니다.   
 
전력을 과다 소비하는 대기업들이 전력 대란 속에서 ‘절전보조금’으로 돈을 버는 식의 수요 관리는 있으나 마나 합니다. 또 ‘자가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재벌 기업들에 전력 시장을 개방하는 식의 ‘민영화’는 특혜일 뿐이지요. 환경파괴적인 그래서 ‘재생가능’이라는 말이 무색한  대규모 발전단지를 만들 뿐인 ‘신재생에너지 공급의무화 제도’ 역시 재검토 돼야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급한 건, 앞서 지적한 것들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은. 거꾸로 가는 에너지 정책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 싼 전기에 중독된 사회, ‘절전은 개나 줘라’는 식의 무책임한 목소리를 바꿔내는 겁니다. 더 이상  기업들이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싼 전기가 무조건 필요하다는 생각. 반팔 입고 난방, 냉방하면서 긴팔 입는 습관부터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에너지 수요 전망치부터 낮춰야 핵발전소 폐기든, 재생에너지 확대 보급이든 가능하니까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던진 충격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밀양 할매, 할배들이 던진 외침도 멀리 퍼지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예측도 못할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전기를 물 쓰듯 쓰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까요. 그 소름끼치게 ‘웅웅’거리는 고압송전선 아래에는 가보지도 않으면서 ‘너희는 전기 안 쓰냐?’며 몰아붙이기를 거리낌 없이 하고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이제 불과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민관합동워킹그룹 권고안 보다 나은 안을 정부가 내놓을 거라 예상치 않기에. 사실 그나마 남은 시간도 의미가 있을까도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제대로 낚였다며 허탈해하지 말고 ‘극적’인 에너지 정책 전환이 가능하도록 뭐라도 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절약'이 미덕이라는 덕담말고 우리 미래를 위해 그렇게 하자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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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4 11:44 2013/11/14 1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