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쉬엄쉬엄 마저 걷는 인월-금계 구간(2017년 4월 29일)
 
긴 연휴입니다. 물론 노동절과 석가탄신일과 어린이날을 징검다리로 하는 3일을 쉬니 생기게 된 연휴입니다. 헌데 사람마음 참 간사합니다. 촛불에 쫓겨난 대통령을 다시 뽑는 9일과 일요일 사이 8일에도 놀았다면, 하는 생각이 다 드니 말입니다. 그런데요. 딴 나라에선 한 달 여름휴가 간다고 하던데. 어찌된 나라에선 며칠 쉬는 것 가지고도 사람을 이리 갈라서 서로 헐뜯게 만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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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부산을 떨며 온 보람이 있습니다. 사흘 간 짐 맡기고 걸을 요량으로 잠 잘 곳도 미리 정하고 밥도 푸짐하게 먹었는데도 아직 해가 많이 남았으니 말입니다. 사실 처음 둘레길에 왔을 땐 더위 때문에 고생을 했고. 두 번짼 산행에 혀를 내둘렀더랬습니다. 해서 요번엔 하루에 딱 한 구간씩만 걷기로 하고 짐도 가볍게 하자 맘먹었던 겁니다.
 
장항마을 입구에 내리니 아직은 햇볕이 좀 따갑긴 하지만 바람이 시원하게 붑니다. 인월에서 숙소를 잡지 않고 왔다면 일찍 더워진 날씨에 땀 좀 흘렸겠지만요. 버스 한 번 더 타고 시간 좀 지체했다 싶은 게, 마침 걷기 딱 좋은 시간에 도착했습니다. 모내기 준비에 바쁜 농부님들을 뒤로 하고 당산소나무를 지나 가파른 산길로 바로 올라섭니다.
 
전해져오는 얘기일 뿐인지, 진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한때 운봉은 호수였다고 합니다. 그때 배가 넘다들던 물길이었다는데서 생겨난 곳이 여기 배너미재인데요. 가만, 이곳까지 물이 들어왔었다구요. 그럼 대체 호수가 얼마나 크고 깊었단 말입니까. 지금은 주촌이라 불리는 배마을, 배를 묶어뒀다는 고리봉, 배를 내려다보던 갈대밭이었던 노치마을까지 넓혀보면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요, 여긴 좀 높은데요.
 
그래도 재를 넘고 나니 내리막길과 평지길입니다. 늦은 보리밥을 든든히 먹어 그냥 지나치긴 했지만요. 산청, 함양 쪽에선 없었던 쉼터도 두 개나 있구요. 좀 더 산길을 올라가야 하는 황매암 쪽과 포장길을 따라 수성대를 지나 광천을 따라 가는 쪽이 갈리는 곳까진 말입니다. 그러니 처음 30여 분이 힘들지 그 뒤론 사뿐사뿐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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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에서 등구재를 넘어 왔으니 망정이지요. 인월에서 중군마을을 거쳐 아스팔트를 왔더라면요. 아마 열에 일곱은 왜 황매암쪽으로 왔을까, 했을 겁니다. 올라야 할 길이 만만치가 않거든요. 뭐 둘레길 걷는 재미를 산길이라고 한다면야 모르겠지만.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 정말이냐를 물을 정도니, 말 다했지 않습니까.
 
다행히 황매암을 지나고 긴 내리막길을 지난 후, 일 끝내고 돌아가는 트럭들이 오가는 중군마을부터는 평지입니다. 대신 깔끔하게 포장된 길이 걷기엔 좋지 않듯 발바닥이 아프네요. 더구나 인월교까진, 한가롭게 풀 뜯으며 놀고 있는 소떼들 아니었음 많이 지루했을 긴 제방길이 이어졌으니요. 그저 빨리 숙소로 가고 싶은 맘뿐입니다.
 
둘째 날, 걷고 또 걷는 제방길(2017년 4월 30일)
 
어제 중군마을을 지나면서 만났던 제방은 그야말로 세발에 피였습니다. 나중에 지도로 확인한 걸로는 부층탑이 조금 지난 곳부터 서림공원까지 대략 4km 이던데요. 나무가 심겨있긴 한데 키가 작아 그늘을 만들기 역부족인데다. 낮에 길을 걸어 해가 머리위에서 정면으로 넘어오는 바람에 좀체 속도가 안 납니다. <국악의 성지>가 아니었으면, 비전마을과 신기마을 앞 쉼터가 아니었으면 녹초가 됐을 겁니다.
 
아무튼 그건 길을 한참 걸은 후에 일이니까 조금 있다 얘기하구요. 지금은 인월(引月)부터 얘기부터 해야겠습니다. 애초 인월에 머물기로 했던 이유는 산내 쪽 여기저기를 둘러볼 요량이었는데요. 다행히 다리 하나만 건너면 한집 건너 민박을 하는 월평마을이 있으니 싸고 괜찮은 집을 쉽게 구했습니다. 콘도만큼은 아니어도 뭐라도 해먹을 수 있는 부엌까지 딸린 방이 하룻밤에 3만원이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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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늦은 점심을 푸짐히 먹었던 보리밥집은 둘레꾼이라면 한 번씩은 들렀을 곳이고. 순대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선지로 만들었다는 순댓국집도 좋겠습니다. 손 맛 좋기로 소문난 전라도니 어디라도 밥 한 끼 먹는 데 빠질 수야 없겠지만요. 여기 인월도 들어가는 식당마다 어찌나 맛나는지요. 한 번은 외출한다고 또 한 번은 해 놓은 밥 다 떨어졌다고, 세 번 만에야 청국장찌개를 먹었던 곳도 그랬습니다.
 
산이 좋아 왔다 아예 내려와 자리 잡고 일까지 하고 있다던, 이것저것 묻는 말에 귀찮아하기는커녕 맞장구치고 깔깔 웃으시던 분, 서투른 문자지만 소홀하게 한 건 아닌지 연신 안부를 물어주셨던, 사람 좋은 웃음으로 편하게 쉬다 가시라며 지내는 동안 눈치 한 번 주지 않았던 민박집 아줌씨, 아자씨. 혹여 길을 잃은 건 아닌지 궁금해하고, 좋은 길 잘 다니라 격려해주고. 사람 사는 냄새 물씬 풍깁니다.
 
책장 속 책만 봐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지요. 니어링부부가 쓴 책이며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 할 것인가>이 꽂혀 있는 책장 주인은요. 마을 한 복판에 이런 곳이 다 있나 싶은, 여기가 월평마을이라며 환영한다는 고흐와 2코스는 끝났으니 3코스는 가든지 말든지 “힘들다 빨리 찍고 가라”는 할머니 벽화가 공존하는 곳. 어찌 차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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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출발이 많이 늦습니다. 분명 집에선 일찌감치 나왔는데요. 운봉까진 천천히 걸어도 4시간이면 되겠지만요. 금방 아침 먹은 것 같은데 벌써 점심때입니다. 차라리 점심까지 든든히 먹고 한낮 더위 피해서 걸을까도 싶습니다만. 여유롭게 걷고 싶기도 하고 이것저것 둘러보면서 걷기도 싶어 결국 길을 나섭니다. 다행이 여기 인월이나 운봉이 지대가 높아 햇볕만 따갑지 걷기엔 좋습니다.
 
언뜻 보면 목장 같은데 고사리가 잔뜩 자라고 있는 월평마을 뒷산은 산책길입니다. 밤나무를 많이 심었다던데 밤나무보단 바람에 흔들리는 전나무가 더 눈에 들어오는 야트막한 오르막길입니다. 그래도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평상에 주저앉아 출출한 배를 시원한 열무국수로 채웁니다. 앞으로 운봉까진 식당은커녕 쉼터도 없으니 응당 쉬어가야지요.
 
수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군데군데 길이 다릅니다. 흙길이다가도 자갈길이 나오고, 처음과 끝엔 포장길인걸 보면 모두 포장을 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연휴양림부터 시작된 꼬부랑길이 옥계저수지 아래 람천까지 그렇게 이어지는데요. 하천변 제방도 그렇고 산길도 그렇고. 흙길보단 포장길이 갈수록 늘어만 가니. 덕분에 발바닥이 좀은 아픕니다.
 
몇 년 전부터 여러 지자체에서 하천 정비한다고 하더니 여기도 그런가봅니다. 인월교에서도 탁한 물이 보이기에 어디서 공사하나 싶었는데요. 운봉까지 걸어야 하는데 물이 계속 흐립니다. 여기저기 강바닥에 돌 깔고 콘크리트치고 난리도 아닌 겁니다. ‘지리산생명연대’가 2011년에 낸 보고서에는 천연기념물 수달 서식지라던데요. 다 끝나진 않았겠지만 이래서야 있던 수달도 쉽지 않을 듯합니다.
 
날도 더운데다 그늘 하나 없는 제방길이라 걷는 게 쉽지 않습니다. 해서 더위도 피할 겸 볼일도 볼 겸 <국악의 성지>를 둘러보고자 길을 벗어납니다. 헌데 밖에서 볼 땐 큼지막한 건물이라 좀은 기대하고 들어가 봤는데요. 볼거리보다는 국악 하는 분들 연습하는 장소라고나 할까요. 그나마 판소리 열 두 마당부터 국악 성지 조성 경과를 친절히 설명해주신 어르신이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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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구경한 것도 없는데 한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덕분에 한낮 더위는 피했으니 이 다시 제방 위로 올라서야겠습니다. 그늘 하나 없긴 하지만 비전, 신기마을엔 아름드리나무가 있어 잠깐씩 쉴 수 있습니다. 동학군을 막아섰던 박봉양을 기리는 비석을 큼지막하게도 세워 놓은 서림공원도 있지만요. 거긴 못마땅한 기분에 건너뜁니다. 곧 운봉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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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4 17:20 2020/05/04 1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