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괴산의 화양구곡, 선유구곡을 지나 문경의 선유동계곡까지(2006년 9월 30일)
 
근 10여 일에 가까운 연휴다. 다행히 연휴의 뒤쪽에 추석이 있어 앞쪽의 5일을 온전히 걷기여행을 위해 쓸 수 있게 됐다. 물론 아껴둔 여름휴가 일주일 가운데 하루를 쓴 덕이긴 하지만. 해서 여지껏 여행보다도 긴 일정의 여행이 될 듯하다. 하지만 그만큼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챙겨가야 할 것도 많다. 덩달아 가방 무게도 제법이다.
 
<먼저 만나는 화양구곡>
 
화양구곡과 선유구곡은 계곡의 크기만큼이나 사람들의 발길이 제 각각이라는 데서 상반된다. 예컨대 화양구곡이 그 크기만큼이나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는 곳이라면 선유구곡은 반대로 그 크기만큼이나 발길이 잦지 않은 곳이다. 그래도 처음엔 화양구곡의 크고 깊은 아름다움에 반해 걸음이 늦어지는가 싶더니 후에는 선유구곡의 아기자기한 맛에 아예 발걸음을 멈추고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을 수 없어 재미가 쏠쏠하다.
 
<뒤이어 선유구곡이.....>
그렇게 세 시간이 넘도록 18구곡의 풍경에 빠져있다 정신을 차리니 이번엔 하, 중, 상관평을 거쳐 경상도 땅으로 이어지는 긴 오르막의 517번 지방도로가 우리를 기다린다. 예전에는 이곳까지 길이 나지 않아 물길을 건너 청천 읍내에 장을 보러 다니셨다는, 관평슈퍼 앞에서 만난 할머니와 두런두런 지나온 길을 이야기하며 잠시 숨을 고르는데 해가 산머리에 걸린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텐데, 할머니께서 ‘용추계곡까지는 갈 수 있겄네. 저기 저 보이는 산만 넘으면 되니께’ 하신다. 안심이다.
 
충청도와 경상도를 이어주는 숯가마골을 넘어 용추계곡에 도착하니 말씀대로 아직은 해가 남아있다. 헌데 이런. 마땅히 숙박할 만한 곳이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날은 조금씩 어두워 오고, 동네 개 짖는 소리는 점점 요란해지고. 어쩌나. 아무래도 오늘은 문경이나 점촌으로 나가야 할 듯한데, 때마침 읍내로 나가는 맘씨 좋은 부부를 만나 무사히 나올 수 있다. 또 점촌 사람들의 친절한 길 안내에 쉬이 잠 잘 곳을 찾을 수 있다.
 
 
둘째 날, 용추계곡에서 문경읍내까지 쉼 없이 걷다(2006년 10월 1일)
 
점촌에서 첫차를 타고 부지런히 움직여 어제 저녁 우리의 발목을 잡았던 용추계곡 입구에 당도했는데도 시계를 보니 9시가 넘어도 훌쩍 넘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발걸음을 빨리 하지 않으면 안 될 듯하다. 그래도 이강년 생가 구경이며, 비록 볼일이 급해 발을 들여놨지만 작고 예쁜 희양분교 구경이며, 250년 된 느티나무 아래 멀리 노랗게 익어 가는 벼 구경이며, 이제는 찾는 이 없어 고즈넉이 서 있는 가은역 구경에 점심때마저 놓친다.
 
 
 
가은 인근은 예전 탄을 캐던 곳이 곳곳에 있었던 만큼 석탄박물관이 널리 이름이 알려졌으나 구경하지 못하고 늦은 점심만 간단히 해결하고 곧 출발이다. 그래도 진남역 주변에는 전에는 탄을 실어 날랐던 철로의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어 눈길을 잡아끈다.
 
부지런히 걸어서인지 어둠이 내리기 전 문경읍까지는 들어갈 수 있을 듯하다. 오늘은 새재 아래까지가 목표였는데 아침에 늦게 출발한 탓인지라 아무래도 오늘은 문경읍내에서 머물러야겠다. 들판 너머 읍내 불빛들은 꽤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데 그래도 걸음으로는 한참이다. 대신 늦은 저녁 생각에 발걸음만은 빠르다.
 
셋째 날, 문경새재를 지나 마폐봉을 넘어 월악산 덕주사까지(2006년 10월 2일)
 
오늘은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문경새재 옛길을 걷다가 지금은 마역봉으로 불리나 예전에는 마폐봉으로 일컬어졌던 산자락을 넘어야 한다. 새재 길이야 잘 정비된 길이고 사람들도 많이 왕래하는 길이라 걱정이 없지만 마폐봉을 넘어 가는 산행 길이 아무래도 걱정이다. 백두대간을 지나는 길목이라 지도상으로는 쉬이 찾아볼 수 있지만 조령 3관문인 조령관에서부터 정상으로 오르는 길과 반대편 월악산 국립공원 사문리 매표소로 내려가는 길은 그리 만만치 않은 듯해서다. 해서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다.
 
읍내에서 새재 입구까지는 생각보다 먼 길인데다 10월 햇살 같지 않은 따가운 햇빛에 무척 힘이 든다. 그래도 새재 입구에 당도하니 제법 가을을 맛볼 수 있는 낙엽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마음은 한결 가볍다.
 
새재 1관문인 주흘관서부터는 흙 길이다. 마음 같아서는 신발에 양말까지 벗어 던지고 걷고 싶으나 발걸음을 빨리 해야 하는 탓에 흙 길의 느낌을 맛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더구나 이른 아침이어서 인지 오가는 이들이 없어 오랜만에 한가로이 길을 걸을 수 있다.
 
<새재길은 1관문인 주흘관을 시작으로 2관문 조곡관, 3관문 조령관까지 이어진다>
 
2관문 조곡관까지는 그리 길지 않은 길인데다 가파르지도 않아 금방이다. 그래도 아침부터 움직인 탓에 몸이 뻐근하다. 잠시 숨도 고르고 몸도 풀고는 길을 나서는데. 이런. 가을 소풍이라도 온 것일까?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무더기로 내려오는데 이건 끝도 없다. 아니 급기야는 유치원 아이들까지 가세한다. 결국 그렇게 사람 구경만 하다 제3관문인 조령관에 도착하니 12시가 조금 넘었다. 이제부터는 산행을 해야 하는데 아침을 든든히 먹어서인지 아직은 배도 고프지 않고 그동안 길러진 체력 탓에 거뜬하다.
                                                                                                   
마폐봉 오르는 길은 생각만큼이나 그다지 어려운 길은 아닌 듯하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1시간 조금 넘게 오르며 간간이 미끄러운 곳을 만나기는 했어도 쉬이 올라왔으니 말이다. 정상에 서니 내려가는 길 멀리 월악산 영봉이 보이고, 올라온 길 멀리 꾸불꾸불 새재길이 보인다. 잠시 숨도 고르면서 좋은 풍경을 배경 삼아 사진도 찍고 싶지만 허기진 배만 채우고는 서둘러 길을 나선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온 것과 달리 거리도 길고 그만큼 시간도 많이 걸린다고 들었기에.
 
산을 내려오기 시작한지 한 시간 반 만에 사문리 매표소에 당도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걷기여행을 하도록 마음먹게 해 준 아름다운 길이다. 미륵사지 입구에서 시원한 동동주까지 얻어 마셨던 식당이며, 덕주사 입구에서 하루 머물렀던 민박집이며, 계곡 물에 손을 담그며 물장난을 쳤던 송계계곡이며, 오티마을로 넘어가는 지도에도 나오지 않은 오티고개며, 꼬부랑길을 한참을 걸어서야 만날 수 있었던 예쁜 마을 물태리까지. 그때 걸었던 길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감회가 새롭다.
 
미륵사지터는 지난번에 둘러보았기에 구경하지 않는 대신 동동주에 파전까지 시켜놓고는 느긋한 점심을 즐긴다. 헌데 입이 즐거운 만큼 몸은 고생이라고, 점심 후 발걸음이 자꾸만 늦어진다. 좋은 길을 걸으며 좋은 경치를 감상하는 탓도 있지만 아무래도 술기운이 발걸음을 잡는 것 같다. 잠시 쉬어가야겠는데 닷돈재 너머 멀리 덕주사 입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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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4 23:22 2009/11/14 2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