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 덕유산에서 길을 잃다(2006년 6월 5일)

 

    <횡경재 오르는 길>

<횡경재 오르는 길>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할 시간이다. 4시 30분. 하지만 어제 저녁 부탁해 놓은 된장국에 아침을 먹고 나니 어느새 산 정상에서부터 서서히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 마중이다.

 

덕유산은 처음인데다 준비한 등산지도들이 제각각 이어서 걱정이다. 게다가 너무 이른 시간 이어서인지 문 잠긴 매표소에는 안내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출발이다. 매표소를 지나 조금 오르니 비구니 한 분이 내려오신다.

 

“저. 길 좀 여쭐게요. 혹시 송계사에서 백련사로 넘어 가는 길을 아시나요?”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네요. 조금 올라가시면 오늘 산행을 하신다는 분들이 있거든요. 그 분들에게 한번 물어보시겠어요?”

“예”

 

대답만큼은 씩씩하다.

 

송계사 못미처 만나게 되는 철조망을 지나자 이내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크게 급하지 않은 산길인데다 길옆으로는 계곡 물이 흐르고 있고, 햇살은 아직 나무들 틈 사이까지 비추지 않고 있어 오히려 뒷동산에 오르듯 걷기에 좋다. 어째 출발은 좋다.

                                                                                                                                                         

횡경재까지 오르는 길은 초행길이지만 지루하지도 힘이 들지도 않을 만큼 완만한 오르막길과 계곡과 나무들이 어울려있다. 아침을 든든히 먹기는 했지만 슬슬 배가 고파오는 것을 빼고는 정말 기분 좋은 산행이다. 하지만 곧 닥쳐올 힘겨운 산행이 기다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횡경재에서 만난 사람들을 따라 무작정 산길을 나섰던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등산로를 미리 확인해두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을까? 비구니의 말을 따라 산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지 않아서였을까? 횡경재를 두고 무려 세 시간을 산 속에서 헤매었다. 가파른 능선을 오르락내리락, 마주치는 아주머니들에게 길을 물어물어 등산로를 찾았는데도 아직 그 자리다. 별수 없다. 다시 처음 길을 나섰던 횡경재로 되돌아가 본다. 헌데. 이런 길이 두 갈래가 아닌가. 동네 뒷산의 산책길 같은 등산로를 놔두고 엉뚱한 길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산 아래에 있을 시간인데 이제야 길을 확인하다니.

 

향적봉과는 반대편 길로 30분쯤을 가니 지봉안이다. 여기서 다시 길을 확인하는데 어째, ‘등산로 없음’을 알리는 나무표지판과 계곡 아래쪽으로 난 방향표지판이 같은 것 아닌가. 어쩌라는 거지? 덕유산 국립공원관리사무소로 전화를 해보지만 이건 첩첩산중일 뿐이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백련사로 내려가는 길은 없다고 한다. 분명 나무표지판에는 내려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는데. 준비해간 세 장의 지도와 여기 두 개의 표지판, 그리고 관리사무소 이야기가 모두 틀리다. 턱없이 부족한 예산 탓에 그리될 수밖에 없는 국립공원의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등산로 표지판 정도는 잘 해놔야 하는 거 아냐?’는 생각에 조금은 화가 난다.

                                                                                                   

그렇게 한참을 어찌할까 씩씩대며 고민하는데, 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는다. 일단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방향을 나타내는 표지판을 믿기로 한다. 대신 조금이라도 길이 좁아진다거나 하면 다시 되돌아오기로 한다. 하지만 이런, 갈림길에 얼마 내려오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길도 좁아지고 숲도 울창한 것이 좀 전에 헤매던 상황과 비슷하다.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이러다 정말 조난이라도 당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다행이다. ‘조금만 더 내려가 보자’며 계곡 쪽으로 길을 잡으니 최근에 이 길로 산행을 한 듯 한 이들이 드문드문 이정표를 해놓은 리본들이 알록달록 보인다.

 

결국 오전 6시부터 산행을 시작해 반대편 백련사까지 내려오는데 무려 8시간이 넘게 걸렸다.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고 오늘은 더 이상 걷기 어렵겠다. 무주구천동에 있었던 14개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백련사에서 잠시 쉬면서 대웅전을 비롯해 명부전이니, 원통전이니, 삼성각, 범종각, 천왕문 등등을 구경한다. 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꿀맛 같은 아이스크림까지 하나씩 입에 물고는 ‘백련교’를 넘어 다시 1시간 30분 넘게 구천동계곡을 따라 내려와 점심인지 저녁인지 알 수 없는 밥을 먹으니 파김치다. 에라, 남의 눈치 볼 것도 없이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펴고 누워 세상 모르게 잠에 빠져든다.

                                                                                         

넷째 날, 구천동계곡을 따라 무주군 설천면까지(2006년 6월 6일)

 

어제는 산 속에서 헤매는 바람에 백련사부터 시작되는 구천동 33경 가운데 사자담, 인월담, 월하탄 등 19경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하고 내려왔다. 해서 오늘은 남은 14경, 만조탄, 파회, 수심대, 세심대, 수경대 등등은 꼭 찾아보아야 한다. 하지만 어제 산에서 헤매다 늦게 내려 온데다 반가운 벗을 만나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여서인지 10시가 다되어서야 겨우 일어났고, 아침을 먹고 나니 벌써 11시가 훌쩍 넘어섰다. 땡볕에 걷지 않으려고 했는데, 지금부터 걷지 않으면 설천까지 갈 수 있을지 장담 못하니 14경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있을런지. 몸도 마음도 바쁘기만 하다.

 

심곡마을에서는 마을 입구에 있는 커다란 평상에 누워 땀을 식히기도 했지만 낮 1시가 넘어가자 더 이상 걷기가 힘들 정도다. 갈 길은 멀지만 구천동 제11경과 제12경이 한 자리에 있는 파회와 수심대에 이르러서는 계곡 아래로 내려가 자리를 펴고 누울 수밖에 없다. 여기저기서 고기 굽는 냄새가 요란하지만 굴하지 않고 번갈아 가며 낮잠을 자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니 좋기만 하다. 그렇게 햇빛이 잦아들 때까지 한가로이 쉬어간다.

 

<왼쪽, 오른쪽으로 무주구천동 14경이 이어지는 걷기 좋은 길>

 

3시. 다시 출발이다. 설천면까지의 길은 몇 안 되는 정말 걷기 좋은 길임이 틀림없다. 오가는 차도 없는데다가 구천동의 절경을 따라 걷는 길이라 더욱 그렇다. 다른 데서는 보기 힘든 적송나무 길에, 전나무 길에, 벚꽃나무 길에, 모자까지 벗어들고 걷는다. 또 두길리 마을 입구에서는 맛난 라면에 발을 뻗고 누워 쉬기도 하고, 이름 모를 마을 입구에서는 입이 까맣게 되도록 버찌열매를 따먹으며 쉬어가기도 하니 한편으론 발걸음이 더디다.

 

신라와 백제의 사신들이 오고가는데 관문 역할을 했던, 구천동 33경의 마지막 라제통문(羅濟通門)을 지나니 잠시 여행을 멈추어야 할 설천면 소재지인데, 때마침 지난 사 일간 우리를 괴롭혔던 햇살도 잦아들고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 아홉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함양에서 안의를 지나 장풍숲까지는 3번과 24번 국도를 따라 걷다가 장풍 숲에서부터 송계사까지는 37번, 1001번 지방도로로 바꾸어 걸었다. 송계사와 백련사를 이어주는 산길을 걸어 덕유산 자락을 넘었고 무주구천동 관광특구에서 설천까지는 37번 국도를 타고 구천동 33경을 훑어 내려갔다. 거리로는 첫째 날 대략 18km, 둘째 날 28km, 셋째 날 13km, 마지막날 20km이고, 시간으로는 첫째 날 4시간, 둘째 날 8시간, 셋째 날 10시간, 넷째 날 7시간이다.

 

* 가고, 오고

서울에서 함양까지는 동서울터미널과 남부터미널에서 출발하는 거창, 안의 경유, 시외버스가 다수 있으며, 무주에서는 서울로 올라오는 차편이 많지 않은 편이므로 가까운 영동이나 대전으로 나오는 것이 오히려 편할 수 있다. 참고로 우리는 설천공용터미널에서 19시 05분에 출발한 시내버스를 타고 무주로 들어와, 무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19시 25분에 영동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이용했으며, 다행히도 영동역에서 20시 16분에 출발하는 부산발 서울행 열차를 탈수 있었다. 영등포역에 22시 50분 못미처 도착했으니 모두 3시간 40분 정도 걸린 셈이다.

 

* 잠잘 곳

안의 읍내에는 여관이 몇 있다. 우리는 여관보다는 민박을 선호하는 편이라서 읍내를 조금 벗어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교복민박에서 단돈 만원에 숙박을 해결했다. 송계사 인근은 송계산장 이외에는 전혀 숙박을 할 만한 곳이 없을뿐더러 음식점도 그 곳 한 군데뿐이다. 다만 수승대 인근에는 음식점과 민박이 다수 있다. 무주는 구천동 관광특구와 리조트를 중심으로 번잡스러울 정도로 음식점과 숙박시설이 매우 많다. 하지만 리조트를 지나 설천까지 이르는 길에는 음식점과 민박집이 뜨문뜨문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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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6 21:15 2009/07/16 21:15

첫째 날, 함양에서 안의까지(2006년 6월 3일)

 

함양행 시외버스에 오르니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벌써부터 뜨거운 햇살이 느껴진다. 요 몇 일 한여름 날씨가 지속될 거라고 하더니 한낮도 아니고 차안인데도 열기가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은 더위와 한바탕 해야할 듯.

 

함양에 도착하니 이런, 걷기는커녕 땡볕에 일분도 채 서있지 못하겠다. 배낭을 짊어진 등뒤로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무조건 쉬기로 하지 않았어도 이거야말로 쉬어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날씨다. 다만 함양에 왔으니 가까운 곳에 위치한 상림에서 쉬어가야 할텐데 그곳까지 몸을 이끌지 못하는 게 다 저 뜨거운 햇살 때문이다.

 

결국 읍내 한 패스트푸드점에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이곳은 어린아이들의 놀이마당이다. 생일잔치를 하는 아이들이 벌써 두 팀이다. 첫 번째 팀은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이 섞여 한참 동안 매장안을 휘젓고 다니며 소란을 피우더니 두 번째 팀은 남자아이들만 대 여섯이 들어와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며 서로 쑥스러운 모양으로 선물을 건네주고, 받고 한다. 어쩜 저리도 예쁠까. 너무너무 사랑스러운 모습들이다.

 

4시가 넘어 출발했는데도 땅 밑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로 숨이 턱턱 막힌다. 걷기 시작한지 이제 한 시간도 안됐는데 옷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고 발바닥은 후끈후끈 하다. 땀도 식히고 쉬어갈 겸 부야마을 부야상회에 들어가는데, 인심 좋은 아주머니 덕에 비록 찬밥과 쉰 김치이지만 생각지도 않게 허기까지 달랠 수 있다. 오랜만에 다시 느껴보는 푸근한 시골 인심이다.

 

함양에서 안의로 이어진 24번 국도변에는 정여창고택과 옥계신도비, 허삼둘가옥 등이 있는데 모두 지나쳤고, 그렇게 한 눈 팔지 않고 걸었는데도 안의에 도착하니 해가 완전히 저물어 사방이 어둡다. 읍내에는 여관이 몇 눈에 띄기는 하나 미리 준비해 둔 민박집에 전화를 걸고는 찾아 나서는데.

 

<덕유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송계사를 찾아 가는 길에 만난 황산마을>

 

푸근한 인상을 가진 할머니 한 분이 저만치서 마중을 나오시는데, 귓속말로 “집에 방이 없어. 어찌 마루에서라도 잘텨? 딴데 가서 야그하면 안 되는데. 다믄 만원만 주고 자”하신다. 우리로서는 마다 할 이유가 없다. 해서 오늘은 단돈 만원으로 숙박을 해결한다.

 

둘째 날, 안의에서 덕유산 아래 송계사까지(2006년 6월 4일)

 

땡볕에 걷는 것을 피하고자 오늘은 아침과 저녁나절에만 걷기로 했다. 해서 5시에 일어나 어제 저녁 준비해 둔 과일과 빵으로 이른 아침을 해결하고는 길을 나선다. 하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서인지 몸이 뻐근하고 졸음이 쏟아진다. 길가에 앉아 스트레칭도 해보고 한참을 쉬기도 하나 여전히 몸은 무겁기만 하다.

 

바래기재를 넘어 고학리에 도착하니 예전 같았으면 이제 일어났을 시간인 7시 30분. 약수정 식당에서 맛난 청국장에 아침을 먹고 급한 화장실도 해결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조금 전과는 달리 한결 다르게 몸도 가볍다. 역시 사람은 먹고, 싸고를 해결해야만 하는가보다. 하지만 졸음은 먹고 나서인지 더 쏟아진다.

 

점심을 먹으면서 쉬기로 했던 수승대까지의 길은 오가는 차도 많은데다 길을 내기 위해 여러 곳에서 공사를 하는 바람에 공사차량까지 질주를 해 무척 걷기 힘들다. 그리고 중간중간 거창군에서 펴낸 관광안내도에 나온 명소들 구경을 잔뜩 기대를 했지만 그다지 볼거리들은 아닌 듯하다.

 

장풍숲은 길가에 있다는 것 빼고는 남도지방이라면 쉽게 볼 수 있는 적송 숲으로 이루어져있어 시시한데다 석재상, 기와공장, 기도원, 모텔 등이 제각각 주변에 몰려 있어 영 마뜩치 않다. 또 수승대는 국민관광지라는 요란한 이름으로 입장료까지 받고 있지만 어째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명색이 계곡이라지만 썩 맑지 않은 물도 그렇고 눈썰매장까지 갖춘 모양새도 그렇다. 하지만 벌써부터 아이들이 계곡에서 물장난을 치는 걸 보면 한여름 피서철로는 어떨지 모르겠다. 해서 우리는 수승대 못 미쳐 만날 수 있는 이름 모를 적송 숲 속에서 늘어지게 낮잠도 자다가 책도 보다가 하면서 4시까지 쉬어간다.

 

햇볕이 한 숨 죽었거니 하고 나왔는데 아직도 땡볕이다. 불볕더위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그 땡볕에 황산마을 고가촌 돌담길을 걸었으이 고즈넉한 맛은커녕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라 아쉬움이 크다. 에둘러 마을길을 길게 돌고 또 논길을 따라 걸으며 눈으로 담아둔다.

 

 

<에둘러 둘러봐야 할 황산마을 돌담길>

 

황산마을을 지나 송계사 입구까지의 길은 오전에 걸었던 길과는 달리 오가는 차도 거의 없고 소나무 숲과 벚꽃나무, 그리고 은행나무가 번갈아 가며 이어지고 있어 걷기에 참 좋은 길이다. 게다가 햇볕도 많이 잦아든 데다 북상면 13경 몇 몇은 쉬엄쉬엄 둘러보며 눈요기를 할 수 있어 아침과는 다르다.

 

송계사 입구에 도착하니 해는 이미 저물었다. 다행히 며칠 전 새로 문을 연 송계산장이 있어 거창이나 낮에 지나쳐왔던 수승대로 나가지 않아도 될 듯하다. 게다가 속리산 자락에 들어와서인지 하늘 가득 별이 반짝인다. 기분 좋은 밤이다. 하지만 늦은 저녁에 동동주로 목을 축이니 눈까풀이 자꾸만 내려앉아 오랜만에 하는 별 구경이 짧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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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7 21:34 2009/07/07 2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