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함양에서 안의까지(2006년 6월 3일)

 

함양행 시외버스에 오르니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벌써부터 뜨거운 햇살이 느껴진다. 요 몇 일 한여름 날씨가 지속될 거라고 하더니 한낮도 아니고 차안인데도 열기가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은 더위와 한바탕 해야할 듯.

 

함양에 도착하니 이런, 걷기는커녕 땡볕에 일분도 채 서있지 못하겠다. 배낭을 짊어진 등뒤로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무조건 쉬기로 하지 않았어도 이거야말로 쉬어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날씨다. 다만 함양에 왔으니 가까운 곳에 위치한 상림에서 쉬어가야 할텐데 그곳까지 몸을 이끌지 못하는 게 다 저 뜨거운 햇살 때문이다.

 

결국 읍내 한 패스트푸드점에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이곳은 어린아이들의 놀이마당이다. 생일잔치를 하는 아이들이 벌써 두 팀이다. 첫 번째 팀은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이 섞여 한참 동안 매장안을 휘젓고 다니며 소란을 피우더니 두 번째 팀은 남자아이들만 대 여섯이 들어와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며 서로 쑥스러운 모양으로 선물을 건네주고, 받고 한다. 어쩜 저리도 예쁠까. 너무너무 사랑스러운 모습들이다.

 

4시가 넘어 출발했는데도 땅 밑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로 숨이 턱턱 막힌다. 걷기 시작한지 이제 한 시간도 안됐는데 옷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고 발바닥은 후끈후끈 하다. 땀도 식히고 쉬어갈 겸 부야마을 부야상회에 들어가는데, 인심 좋은 아주머니 덕에 비록 찬밥과 쉰 김치이지만 생각지도 않게 허기까지 달랠 수 있다. 오랜만에 다시 느껴보는 푸근한 시골 인심이다.

 

함양에서 안의로 이어진 24번 국도변에는 정여창고택과 옥계신도비, 허삼둘가옥 등이 있는데 모두 지나쳤고, 그렇게 한 눈 팔지 않고 걸었는데도 안의에 도착하니 해가 완전히 저물어 사방이 어둡다. 읍내에는 여관이 몇 눈에 띄기는 하나 미리 준비해 둔 민박집에 전화를 걸고는 찾아 나서는데.

 

<덕유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송계사를 찾아 가는 길에 만난 황산마을>

 

푸근한 인상을 가진 할머니 한 분이 저만치서 마중을 나오시는데, 귓속말로 “집에 방이 없어. 어찌 마루에서라도 잘텨? 딴데 가서 야그하면 안 되는데. 다믄 만원만 주고 자”하신다. 우리로서는 마다 할 이유가 없다. 해서 오늘은 단돈 만원으로 숙박을 해결한다.

 

둘째 날, 안의에서 덕유산 아래 송계사까지(2006년 6월 4일)

 

땡볕에 걷는 것을 피하고자 오늘은 아침과 저녁나절에만 걷기로 했다. 해서 5시에 일어나 어제 저녁 준비해 둔 과일과 빵으로 이른 아침을 해결하고는 길을 나선다. 하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서인지 몸이 뻐근하고 졸음이 쏟아진다. 길가에 앉아 스트레칭도 해보고 한참을 쉬기도 하나 여전히 몸은 무겁기만 하다.

 

바래기재를 넘어 고학리에 도착하니 예전 같았으면 이제 일어났을 시간인 7시 30분. 약수정 식당에서 맛난 청국장에 아침을 먹고 급한 화장실도 해결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조금 전과는 달리 한결 다르게 몸도 가볍다. 역시 사람은 먹고, 싸고를 해결해야만 하는가보다. 하지만 졸음은 먹고 나서인지 더 쏟아진다.

 

점심을 먹으면서 쉬기로 했던 수승대까지의 길은 오가는 차도 많은데다 길을 내기 위해 여러 곳에서 공사를 하는 바람에 공사차량까지 질주를 해 무척 걷기 힘들다. 그리고 중간중간 거창군에서 펴낸 관광안내도에 나온 명소들 구경을 잔뜩 기대를 했지만 그다지 볼거리들은 아닌 듯하다.

 

장풍숲은 길가에 있다는 것 빼고는 남도지방이라면 쉽게 볼 수 있는 적송 숲으로 이루어져있어 시시한데다 석재상, 기와공장, 기도원, 모텔 등이 제각각 주변에 몰려 있어 영 마뜩치 않다. 또 수승대는 국민관광지라는 요란한 이름으로 입장료까지 받고 있지만 어째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명색이 계곡이라지만 썩 맑지 않은 물도 그렇고 눈썰매장까지 갖춘 모양새도 그렇다. 하지만 벌써부터 아이들이 계곡에서 물장난을 치는 걸 보면 한여름 피서철로는 어떨지 모르겠다. 해서 우리는 수승대 못 미쳐 만날 수 있는 이름 모를 적송 숲 속에서 늘어지게 낮잠도 자다가 책도 보다가 하면서 4시까지 쉬어간다.

 

햇볕이 한 숨 죽었거니 하고 나왔는데 아직도 땡볕이다. 불볕더위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그 땡볕에 황산마을 고가촌 돌담길을 걸었으이 고즈넉한 맛은커녕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라 아쉬움이 크다. 에둘러 마을길을 길게 돌고 또 논길을 따라 걸으며 눈으로 담아둔다.

 

 

<에둘러 둘러봐야 할 황산마을 돌담길>

 

황산마을을 지나 송계사 입구까지의 길은 오전에 걸었던 길과는 달리 오가는 차도 거의 없고 소나무 숲과 벚꽃나무, 그리고 은행나무가 번갈아 가며 이어지고 있어 걷기에 참 좋은 길이다. 게다가 햇볕도 많이 잦아든 데다 북상면 13경 몇 몇은 쉬엄쉬엄 둘러보며 눈요기를 할 수 있어 아침과는 다르다.

 

송계사 입구에 도착하니 해는 이미 저물었다. 다행히 며칠 전 새로 문을 연 송계산장이 있어 거창이나 낮에 지나쳐왔던 수승대로 나가지 않아도 될 듯하다. 게다가 속리산 자락에 들어와서인지 하늘 가득 별이 반짝인다. 기분 좋은 밤이다. 하지만 늦은 저녁에 동동주로 목을 축이니 눈까풀이 자꾸만 내려앉아 오랜만에 하는 별 구경이 짧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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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7 21:34 2009/07/07 2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