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이가 있으시니 그러게도 하겠지, 싶다가도 어머니 스스로 뭐든 돌아서면 깜빡깜빡 잊으신다는 말씀에 적잖이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었지요. 얘기를 들어보니 누구는 화투를 친다고도 하고, 노인대학에 다닌다고도 하는데. 친구 분들과 함께라면 모를까. 선뜻 이건 어떨까요, 하고 말씀드리기가 조금은 망설여지더라고요. 또 모 방송에선 그림그리기가 좋다고도 하는데, 그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는 건지 막막한 게 또 선뜻 권하기가 쉽지 않구요. 그래 고민고민하다. 그래도 주일이면 빠짐없이 성당에 다니시고. 아침, 저녁으로 묵주기도에 때마다 거르지 않고 이런 저런 기도를 올리시는 게 떠올라 성경쓰기는 어떨까. 그래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침, 저녁 기도하시고 난 후 성경 쓰기를 하시는 건 어떤가, 하구요. 물론 점잖게 말하지만은 않았어요. 뭐든 대답은 잘 하시는 데 나중에 보면 잘 하지 않으시는 게 많았거든요. 해서 다음에 어머니 집에 가게 되면 노트 검사를 하겠다, 하루라도 빠졌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춘천으로 오겠다, 협박(?)아닌 협박까지 했답니다. 헌데. 다음 날이던가요. 바로 공책을 샀다고 하시는데. 이만하면 성공이다,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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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생태적, 평화적, 여성적, 민주적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그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성경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기독교이든 천주교인든, 잘은 모르겠지만 수십여 개에 달한다고 하는 그 많은 교단들이 제각기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는 걸까요. 독일의 환경상인 ‘황금제비상 Golden Schwalbe'과 ’유럽태양상 Europaischer Solarpreis'을 수상한 바 있는 독일의 언론인 프란츠 알트 Franz Alt 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한 권 책에 담았는데요. 예수와 관련된 부분들을 걸러서 읽게 되면 그저 여느 환경관련 책과 다를 바가 없지만요, 논리적이지 않으면서 게다가 전혀 신학적이지도 않은,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예수의 말과 행동을 쫒아가며 위기의 시대를 극복할 전망을 제시하는 데에 우직함이 엿보이는,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주 간단명료하다 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지성적이라기보다는 실존적인 것이고. 그러하기에 생태적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을 공부할 필요조차 없다. 그저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다면 충분하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태양과 바람, 물, 성장, 사랑, 신뢰에 대한 예수의 생태적 이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어떤가요. 감이 좀 오나요. 잘 모르겠다구요. 그래요. 쉽지는 않습니다. 생각건대 전부터 예수의 말을 믿고 따랐던 이라면 더 그럴 겁니다. 하지만 우리말로 450쪽이 넘는 이 두꺼운 책을 꼼꼼히 읽다보면 말이죠. 서울을 봉헌하겠다던 이가 믿는 예수하고는 전혀 차원이 다른 예수가 이만치 다가오는 걸 느끼실 겁니다. 
 
3. 
추석이 다음 주라 곧 뵙기는 하겠지만 주말에 의정부엘 다녀왔습니다. 이미 지난주에 다치셨다는데 통 말씀을 하지 않으시니 모르고 있다, 엊그제서야 그걸 알게 돼 급하게 다녀온 겁니다. 다행히 다치신 곳은 꾸준히 병원에 다니신 덕에 얼굴은 좋아 보이셨지만 가뜩이나 어깨가 아픈데다 갈비뼈를 다치셔서 팔을 쓰시기가 여간 불편해 보이더라구요. 그래 기차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어데 웬간하면 지난번에 약속한 성경쓰기를 하셨나, 노트 검사를 하려 했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냥 접고 말았지요. 그리고 보기엔 한 달은 넘어야 겨우 다니시는 곳도 나갈 수 있으니 당분간은 말도 꺼내지 못할 듯한데. 그 순간 성경에 손길이 가는 건. 좀 전에 손을 땐 알트의 이 책 때문 만이었을까요. ‘씨를 뿌리는 사람은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누가복음 4장 14절의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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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12:35 2009/09/30 1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