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거철입니다.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홍보영상물이며 연설이 흘러나오고. 색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노래에 맞춰 이리저리 몸을 흔들고 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으니요. 또 되도 않는 공약(空約)과 사탕발림 말잔치로 골목골목을 헤집고 다니는. 몇 달 전만해도 어림도 없다는 식으로 치부했던 무상급식이며 무상교육을 뻔뻔히 자기네도 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선거만 끝나면 통 보이지도 않는, 어깨에 힘 ‘빡’ 들어가는 동네 유지들을 보고 있자니요.
 
여기 강원도로, 춘천으로 오고 나서 첫 선거이니. 관심이 꽤나 갑니다. 간간이 들려오는 진보정당 혹은 시민운동 활동들이 있어서였을까요. 은근히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 후보들이 있나 살펴보게 되더라구요. 그리구. 그래요. 부르주아 선거판에서 표 찍는 것이 민주주의의 전부인 양 선전해대는 보수 언론들. 정치꾼들. 그래서 이런 선거는 의미가 없다, 고만 하기엔. 삶이 너무 팍팍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때론 신자유주의자들과 손을 맞잡는 정치적 자살행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관심을 둘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요.     
 
2.
종종 생태학과 경제학은 서로 상극인 것처럼 얘기되곤 합니다. 하지만 프란츠 알트가 쓴 <생태적 경제기적>의 추천사를 쓴 헤르만 세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 삶에 대한 원초적인 물음, 즉 ‘현재와 미래의 인간 존재를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이해의 출발로 ‘생태학’은 지구상의 외적인 조건이 지속적이고 믿음직하게 작용하는 것, ‘경제학’은 이 조건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방식이라 한다면 경제와 생태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둘 사이의 화해가 중요한 것도 아니며 단지 나쁜 경제와 좋은 경제, 즉 생태적인 경제와 비생태적인 경제 사의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경제는 생태의 하위 부문이다. (<생태적 경제기적>, 프란츠 알트, 6-7쪽)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생태라는 것이 그저 자연을 보호하자, 자연을 그대로 두자, 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 자연과 조화로운 삶이 지속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시각을 바탕으로 한 생태적인 노동, 태양에너지로의 전환, 생태적 교통정책, 생태농업을 통한 완전고용이라는 주장은. 생태를 경제보다 우선시하는. 생태를 경제의 상위 부문으로 위치지우는 일이구요. 또한 작금의 경제위기를, 대량실업의 사회를 극복하는 길은 생태적인 상상력을 활짝 열어젖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지구적인 생태적 사고와 윤리를 기반으로 생태적인 경제기적을 이룩하자’는 알트의 주장은 금세 큰 울림을 얻습니다. 
 
3.
너도나도 경제 이야기입니다. 보수꼴통들도 경제를 살리자, 진보정당들도 경제를 살리자. 누가 베꼈는지 모를 정도로 기업 유치에, 일자리 창출, 대규모 국책 사업, 초고층 아파트 건설까지. 어찌 이리도 한결 같은지요. 한편으론 살기가 참 팍팍하다, 는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대체 언제까지 이 죽일 놈의 ‘성장’, ‘개발’, ‘건설’이 화두가 되어야 하는 건지요. 하긴 강원도 도지사로 나섰다는 이가 여전히 “자연보호가 중요하지만, 쑥부쟁이 때문에, 전국에 수억 마리가 있는 도룡뇽 몇 마리 죽는다고” 설쳐대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말이지요.
 
원자력대신 태양광, 바람, 물, 바이오매스로부터 얻어지는 에너지로의 전환을 이야기하고, 자동차를 기반으로 하는 개인 교통수단 말고 철도와 버스, 자전거에 더 많은 돈을 쓰자는, 토양과 물과, 공기와 동물, 식물과의 평화로운 생태농업에서 미래를 보자고 말하는 이들은.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노동이 아니라 영적인 발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노동하자는 후보자들은. 정말 없는 것인지요.      
 
모처럼 바람 쐬러 갔다 왔더니 어느새 아파트 입구 담벼락에 한결 같은 얼굴 표정들이 끝 간 데 없이 늘어서 있더군요. 그리고 플래카드도 부쩍 늘었구요. 조용히 책이라도 볼라치면 언제 나타났는지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저 아까운 플래카드들 다 걷어다가 내년 농사지을 때나 쓰면 딱 좋겠다는 생각만 드니. 이러다 이거 선거 때, 산에나 가게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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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6 13:13 2010/05/26 13:13
1.
나이가 있으시니 그러게도 하겠지, 싶다가도 어머니 스스로 뭐든 돌아서면 깜빡깜빡 잊으신다는 말씀에 적잖이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었지요. 얘기를 들어보니 누구는 화투를 친다고도 하고, 노인대학에 다닌다고도 하는데. 친구 분들과 함께라면 모를까. 선뜻 이건 어떨까요, 하고 말씀드리기가 조금은 망설여지더라고요. 또 모 방송에선 그림그리기가 좋다고도 하는데, 그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는 건지 막막한 게 또 선뜻 권하기가 쉽지 않구요. 그래 고민고민하다. 그래도 주일이면 빠짐없이 성당에 다니시고. 아침, 저녁으로 묵주기도에 때마다 거르지 않고 이런 저런 기도를 올리시는 게 떠올라 성경쓰기는 어떨까. 그래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침, 저녁 기도하시고 난 후 성경 쓰기를 하시는 건 어떤가, 하구요. 물론 점잖게 말하지만은 않았어요. 뭐든 대답은 잘 하시는 데 나중에 보면 잘 하지 않으시는 게 많았거든요. 해서 다음에 어머니 집에 가게 되면 노트 검사를 하겠다, 하루라도 빠졌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춘천으로 오겠다, 협박(?)아닌 협박까지 했답니다. 헌데. 다음 날이던가요. 바로 공책을 샀다고 하시는데. 이만하면 성공이다, 싶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2.
예수를 생태적, 평화적, 여성적, 민주적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그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성경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기독교이든 천주교인든, 잘은 모르겠지만 수십여 개에 달한다고 하는 그 많은 교단들이 제각기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는 걸까요. 독일의 환경상인 ‘황금제비상 Golden Schwalbe'과 ’유럽태양상 Europaischer Solarpreis'을 수상한 바 있는 독일의 언론인 프란츠 알트 Franz Alt 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한 권 책에 담았는데요. 예수와 관련된 부분들을 걸러서 읽게 되면 그저 여느 환경관련 책과 다를 바가 없지만요, 논리적이지 않으면서 게다가 전혀 신학적이지도 않은,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예수의 말과 행동을 쫒아가며 위기의 시대를 극복할 전망을 제시하는 데에 우직함이 엿보이는,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주 간단명료하다 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지성적이라기보다는 실존적인 것이고. 그러하기에 생태적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을 공부할 필요조차 없다. 그저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다면 충분하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태양과 바람, 물, 성장, 사랑, 신뢰에 대한 예수의 생태적 이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어떤가요. 감이 좀 오나요. 잘 모르겠다구요. 그래요. 쉽지는 않습니다. 생각건대 전부터 예수의 말을 믿고 따랐던 이라면 더 그럴 겁니다. 하지만 우리말로 450쪽이 넘는 이 두꺼운 책을 꼼꼼히 읽다보면 말이죠. 서울을 봉헌하겠다던 이가 믿는 예수하고는 전혀 차원이 다른 예수가 이만치 다가오는 걸 느끼실 겁니다. 
 
3. 
추석이 다음 주라 곧 뵙기는 하겠지만 주말에 의정부엘 다녀왔습니다. 이미 지난주에 다치셨다는데 통 말씀을 하지 않으시니 모르고 있다, 엊그제서야 그걸 알게 돼 급하게 다녀온 겁니다. 다행히 다치신 곳은 꾸준히 병원에 다니신 덕에 얼굴은 좋아 보이셨지만 가뜩이나 어깨가 아픈데다 갈비뼈를 다치셔서 팔을 쓰시기가 여간 불편해 보이더라구요. 그래 기차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어데 웬간하면 지난번에 약속한 성경쓰기를 하셨나, 노트 검사를 하려 했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냥 접고 말았지요. 그리고 보기엔 한 달은 넘어야 겨우 다니시는 곳도 나갈 수 있으니 당분간은 말도 꺼내지 못할 듯한데. 그 순간 성경에 손길이 가는 건. 좀 전에 손을 땐 알트의 이 책 때문 만이었을까요. ‘씨를 뿌리는 사람은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누가복음 4장 14절의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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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12:35 2009/09/30 1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