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영동군 황간면에서 용산면까지(2006년 7월 29일)
 
일기예보로는 지루한 장마가 끝나고 이제 한여름 무더위가 시작된다고 하던데, 수원에서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평택에 들어서자 제법 굵어지고 있다. 비옷이고 우산이고 어느 하나 준비하지 않았는데, 걱정이 앞선다. 다행이 대전을 지나면서부터는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있기는 한데, 비구름이 여전히 하늘을 덮고 있어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황간에 도착하니 산허리에 잔뜩 먹구름이 끼어 있고 굵지는 않지만 빗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서둘러 역사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저 멀리 민주지산에 걸린 비구름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래도 어째 오늘은 해 구경하기 힘들 듯 하다. 그래도 빗줄기가 더 굵어지지 않는 게 고마울 뿐이다. 뜨거운 햇빛을 가리기 위해 준비해 온 모자로 대충 빗줄기는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월류봉을 지나 긴 오르막길(위)을 지나고 나니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하늘이 맑아지는데 아예 덥다(아래)>
 
읍내를 벗어나자마자 오른편 저쪽에서부터 왼편 월류봉 아래로 제법 거센 흙탕물이 흐른다. 몇 주간 쉴 틈도 없이 내린 장맛비 때문 일게다. 들리는 소식에는 이곳에도 많은 비가 내렸고 곳곳에 산사태에 도로가 끊겼다고는 하는데, 우리가 걷는 이 길엔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비 때문인지, 원래 보수를 하려고 한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곳, 딱 한 곳을 지나쳤다.
 
월류봉을 지나니 곧 오르막길이다. 제법 긴 오르막길인데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쉬지 않고 내리는 비로 옷마저 축축해 무척 힘이 부친다. 게다가 지나는 차들은 길을 걷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 듯 물살을 일으키며 질주하고 있어 조금 걷다 갓길 저만치로 피하고, 조금 걷다 또 갓길로 저만치 피하고 하는 바람에 발걸음이 더디기만 한다.
 
고갯길을 넘고 나니 어느새 비가 그치고 먹구름 사이로 간간이 따가운 햇살이 머리를 비추는데 이건, 좀 전까지는 비 때문에 걸음이 늦어졌다면 이제는 햇빛 때문에 걸음이 늦어지는 꼴이다. 아무래도 잠시 쉬어가야겠다. 용암리 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에 잠시 배낭을 벗어 던지고는 어깨며, 발목을 번갈아 가며 주물러준다.
 
황간을 출발한지 두 시간이 조금 넘어 용암 삼거리에서 514번 지방도로로 바꿔 탄다. 오늘은 옥천군 청산면까지 가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는데 아무래도 이 속도라면 다 못 갈 듯 싶다. 큰일이다. 황간면에서 청산면까지는 하루 밤 쉬어 갈만한 곳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니. 그런데도 이상스레 몸이 무거울 뿐만 아니라 발걸음마저 더디기만 한다.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쉬어가면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다.
 
결국 용산면소재지에서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한다. 혹 근처에 민박집이 있을까 해서 이리저리 전화도 돌려보지만 마땅히 쉴 만한 곳을 찾지 못하고 대신 저녁이나 해결할까, 중국집에 들어선다. 하지만 허기진 뱃속과는 달리 잠자리 걱정 때문인지 자장면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른다. 어쩔 수 없다. 영동이나 옥천으로 나가는 수밖에. 이리저리 재고자시고 없이 가장 먼저 도착한 버스에 올라타니 영동으로 나가는 차다.
 
둘째 날, 옥천군으로 넘어와 청산면까지(2006년 7월 30일)
 
용산행 첫 차가 5시 50인데 아침에 눈을 뜨니 5시 20분이다. 세면은커녕 서둘러 옷만 갈아입고는 버스정류장으로 허겁지겁 달려간다. 이른 아침인데다 일요일 이어서인지 오가는 차도 없고 버스를 타는 사람도 우리 둘 이외에 딱 두 명이 더 있었을 뿐이다. 어제는 30분이 조금 넘게 걸린 길을 오늘은 1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용산에 당도하니 사방이 자욱한 안개다. 물가 쪽에는 물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있고 산허리 쪽에도 안개가 자욱하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날씨가 우리의 여행을 도와주지 않는 듯하다. 발걸음이 계속 무겁다. 게다가 용산을 벗어나자마자 시작되는 길이 국도라 오가는 차량도 많아 불편하기 짝이 없다.
 
법화리에서 한 번 쉬고 나니 고갯길이고, 고갯길 정상에 오르니 옥천군이다. 멀리 ‘인삼의 고향 옥천’이라는 커다란 입간판이 보이는데 아니나 다를까 열 번째 여행 내내 길 양옆으로 짙은 포도향을 내던 포도송이들 대신 이번엔 끝없는 인삼밭이 펼쳐져 있는 게 아닌가. 내리막길에, 빨갛게 핀 인삼 꽃구경에, 오랜만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당초 10시 이후에는 걷지 않기로 했지만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도 벌써부터 땅 밑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보통이 아니다. 간간이 구름들이 햇빛을 가려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머리 위로 내리쬐는 따가운 햇살에,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등 뒤로 땀이 ‘주르륵’ 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출발하기 전 준비했던 물마저 바닥이다. 또 마을은 보이지도 않는다. 조금 걷고 그늘에서 쉬고, 또 조금 걷고 그늘에서 쉬고 하니 시간만은 잘도 가는데 진도는 나가지 않는다. 조금 더 지나면 정말 땡볕 속에서 걸어야 할 텐데.
 
예정대로라면 어제 밤 하루 쉬어가야 했을 청산면에 도착하니 9시다. 일단 아침은 먹어야겠는데 더 걸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벌써부터 한여름 찜통인데다 온 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라 그렇다. 아무래도 더 이상은 걷는 게 무리다. 다행히 버스 시간이 잘 맞아 떨어져 시간 낭비 없이 청산에서 영동으로, 영동에서 서울로, 또 무더위를 피해 쉬이 올라올 수 있다.
 
* 열한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 첫째 날 : 영동군 황간면에서 용산면까지 약 12km. 걸은 시간 3시간.
- 둘째 날 : 영동군 용산면에서 옥천군 청산면까지 약 11km. 걸은 시간 어제와 마찬가지로 약 3시간.
 
* 가고, 오고
영등포에서 황간까지는 12시 29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 열차를 이용했다. 옥천군 청산면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은 보은이나 영동 쪽으로 나와야 하는데, 우리는 영동으로 나왔다. 다행이 버스 시간이 잘 맞아서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었으나 아무래도 사전 버스 시간 확인은 필수인 것 같다.
 
* 잠잘 곳
황간에서 당초 머물려고 했던 옥천군 청산면까지는 거의 숙박할 만한 곳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우리가 첫날 도착했던 용산면에는 허름한 여관이 하나 있을 뿐이다. 대신 음식점은 곳곳에 꽤 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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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1 16:02 2009/08/11 16:02

첫째 날, 무주군 설천면에서 민주지산 아래 조동리 산촌마을까지(2006년 7월 1일)

 

중독이다. 장마전선이 북상하고 주말에는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사나흘 전부터 있었고, 오늘 아침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고서도 기차에 앉아 있는 걸 보니. 이젠 연휴나 휴가만이 아니라 주말만 다가오면 부쩍 마음이 동하고, 몸이 근질근질하니.

 

천안역을 지나면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대전역을 지나니 제법 굵어진다. 당연 비옷과 우산을 준비했고, 비가 오더라도 ‘오늘은 무조건 걷자’며 나섰지만 그래도 걱정이다. 영동역에 내리니 이건 굵은 정도가 아니라 장대비고, 우산을 펼쳐들었지만 금세 옷이 다 젖는다. 늦은 점심도 해결할 겸 역 앞 분식집에 들어가니 무주로 가는 버스 시간이 바로 코앞이다. 허겁지겁 깁밥 몇 줄 집어 들고는 버스에 오른다.

 

무주에서 한 번 더 버스를 갈아타고 설천에 도착하니 다행히 빗줄기가 조금은 가늘어졌다. 비옷을 걸치고 길을 나서니 걱정보다는 되려 ‘시원하다’.

 

설천을 출발한지 30여분 만에 충청북도로 들어선다. 일곱 번째 여행에서 전라북도로 넘어와 다시 여덟 번째 여행부터는 경상남도의 길을 걸었는데 이제 열 번째 여행에서 충청북도에 발을 디딘 것이다. 다시 쏟아지는 빗줄기에 옷이며 신발까지 다 젖었지만 서로 안아주며 다독인다.

 

맑은 날이었다면 민주지산을 바라보고 걸었을 텐데 지금은 세찬 빗줄기 너머 산허리 구름만 보일 뿐이다. 그래도 지나는 차하나 없어 길을 전세 낸 마냥 걸으며 목청 높여 노래도 불러본다.

 

민주지산 아래 산촌마을로 유명한 조동리에 도착하니 아직 해가 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 시간이 넘게 빗속을 걸은 덕에 속옷까지는 아니지만 신발이며, 바지 등이 축축이 젖어 서둘러 민박집을 정한다. 주인 아주머니가 손수 해주신 맛난 저녁을 먹고 나니 어둑어둑하다. 들어설 때는 꽤나 넓은 방인 거 같았는데 두 짝의 젖은 신발 속에 신문지를 한 줌씩 말아 넣고, 두 짝의 위, 아래 젖은 옷가지들을 방바닥에 죽 펼쳐 늘어놓으니, 겨우 둘이 나란히 누울 수 있는 자리만 남는다. 내일은 비가 그쳐야하는데.

 

<저 오솔길 아래가 하룻밤 묵어갔던 조동리 산촌마을이다>

 

둘째 날, 해발 800m 도마령을 넘어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과 호두나무를 따라 황간까지(2006년 7월 2일)

 

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신발도 뽀송뽀송 말랐고, 비도 그친 데다 길은 오르막이지만 맑은 주위 풍경에 몸과 마음 모두 가뿐했으니. 헌데 오르막길을 30여분 올랐을까?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더니 이내 장대비가 내린다. 버스정류장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데 마치 우리를 유혹이라도 하듯 몇 시간에 한 대씩 온다는 시내버스가 저 아래서 올라온다. 어쩔까.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까.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까. 어제 일기예보는 오전까지만 오고 그친다고 하던데.

 

우리 앞에 서 있었던 버스가 저만치 고갯길을 내려 보이지 않지만 한참을 멍하니 서있다 다시 길을 나선다. 비가 그치지는 않았지만 버스도 떠난 마당에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굽이굽이 해발 800m에 자리 잡고 있는 도마령을 향해 한참을 오르니 비구름 속으로 들어와서인지 비는 그치고 안개가 잔뜩 긴 것 마냥 바로 코 앞 길마저 분간하기 힘들다. 날이 좋았다면 멀리 어제 지나온 길들과 포도밭이 발아래 펼쳐질 텐데, 것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아쉽다.

 

도마령을 넘어 산 아래로 조금씩 내려오니 구름 아래라 그런지 또 비가 내린다. 어설프게 구름 중간에 있느니 아예 구름 속으로 들어가던가 저만치 구름 아래에 있던가 해야 할 듯하다. 해서 발걸음을 빨리 해 산 아래로 내려간다. 얄궂은 이름의 고자리를 지나 고자천을 따라.

 

 

<도마령을 힘겹게 넘으니 하루종일 걸어야 겨우 차 한, 두대 지나가는 호젓한 길을 만나게 된다>

 

논이 조금씩 있는 걸 보니 산 아래로 많이 내려온 듯하다. 헌데 어째 지나는 마을마다 가게 하나 보이지를 않고 쉬어 갈만한 곳도 보이지 않는다. 버스 정류장도 어제 넘어온 길보다 더 뜨문뜨문 있고 지나는 차도 없다시피 하다. 게다가 4시간이 넘게 걸었는데도 아직 골짜기에 있는 듯한 느낌이고 산을 돌아서면 너른 들이 보이겠거니 하며 많은 산을 돌아섰는데도 또 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아직 다 여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실컷 포도와 호도도 구경하고, 깊은 산세를 느낄 수 있기에 힘든지 모른다.

 

1시가 넘어서야 상촌면 면소재지에 도착했다. 그 사이 비는 그쳤고 구름 사이로 간간이 따가운 햇볕이 비치는 가운데 5시간이 넘게 걸으면서 발을 뻗으며 쉬지 못한지라 몸이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뜨거워서 시원한 올갱이국밥과 차가워서 시원한 냉콩국수로 배를 채우고는 파출소 옆 쉼터에서 한참을 쉬고 나니 살 것 같다.

 

구름 사이로 자꾸만 얼굴을 내미는 해를 피해 그렇게 3시까지 쉬다 다시 길을 나선다. 하지만 도마령 넘어 딱 한 번 밖에 보지 못하고 있는 이정표 때문에 길을 걷는 게 여간 지루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얼마나 가야 황간인지, 얼마나 걸어왔는지 알 수 없는 데다 가지고 있는 지도마저 그 거리를 가늠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까짓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야 이정표 없어도 몇 킬로미터는 금방 이겠지만 걷는 이들에게는 한나절이고, 배려가 아쉬울 뿐이다.

 

황간을 바로 코앞에 두고 다시 소나기를 만났는데, 어제오늘 함께 한 비옷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거의 뛰다시피 해서 터미널에 겨우 도착하니 길 위에 퍼붓듯이 쏟아지는 비가 오히려 시원하다.

 

* 열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 첫째 날 : 무주군 설천면 사무소에서 민주지산 바로 아래 충청북도 영동군 조동리 산촌마을까지 약 10km. 걸은 시간 2시간 30분.

- 둘째 날 : 조동리에서 끝없는 포도밭과 호두나무를 따라 황간까지 49번 지방도로를 따라 약 32km. 걸은 시간 8시간 40분.

 

* 가고, 오고

영등포에서 무주군 설천면까지는 기차와 두 차례의 버스 갈아타기 끝에 도착할 수 있다. 영동역까지는 열차편이 금방금방 있어 쉬이 갈 수 있으나 영동에서 무주, 무주에서 설천으로의 이동은 버스시간이 거의 한 시간 간격이어서 시간 맞추기가 어렵다. 미리미리 준비를 잘 해두어야 한다. 황간에서는 구미발 강남터미널행 고속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오후 1시 30분과 저녁 8시 달랑 하루 두 차례밖에 없는 기차보다 편하다.

 

* 잠잘 곳

도마령을 넘기 전에는 조동리 산촌마을과 민주지산 휴양림 인근에 민박을 쉬이 구할 수 있으나 음식점은 민박집에 부탁을 해야 한다. 조동리에서 도마령을 넘어 황간까지는 상촌면과 매곡면 면소재지를 제외하고는 음식점은커녕 슈퍼하나 찾아볼 수 없다. 하니 조동리에서 출발한다면 그곳에서 간식과 물 등을 단단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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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30 21:45 2009/07/30 2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