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무주군 설천면에서 민주지산 아래 조동리 산촌마을까지(2006년 7월 1일)

 

중독이다. 장마전선이 북상하고 주말에는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사나흘 전부터 있었고, 오늘 아침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고서도 기차에 앉아 있는 걸 보니. 이젠 연휴나 휴가만이 아니라 주말만 다가오면 부쩍 마음이 동하고, 몸이 근질근질하니.

 

천안역을 지나면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대전역을 지나니 제법 굵어진다. 당연 비옷과 우산을 준비했고, 비가 오더라도 ‘오늘은 무조건 걷자’며 나섰지만 그래도 걱정이다. 영동역에 내리니 이건 굵은 정도가 아니라 장대비고, 우산을 펼쳐들었지만 금세 옷이 다 젖는다. 늦은 점심도 해결할 겸 역 앞 분식집에 들어가니 무주로 가는 버스 시간이 바로 코앞이다. 허겁지겁 깁밥 몇 줄 집어 들고는 버스에 오른다.

 

무주에서 한 번 더 버스를 갈아타고 설천에 도착하니 다행히 빗줄기가 조금은 가늘어졌다. 비옷을 걸치고 길을 나서니 걱정보다는 되려 ‘시원하다’.

 

설천을 출발한지 30여분 만에 충청북도로 들어선다. 일곱 번째 여행에서 전라북도로 넘어와 다시 여덟 번째 여행부터는 경상남도의 길을 걸었는데 이제 열 번째 여행에서 충청북도에 발을 디딘 것이다. 다시 쏟아지는 빗줄기에 옷이며 신발까지 다 젖었지만 서로 안아주며 다독인다.

 

맑은 날이었다면 민주지산을 바라보고 걸었을 텐데 지금은 세찬 빗줄기 너머 산허리 구름만 보일 뿐이다. 그래도 지나는 차하나 없어 길을 전세 낸 마냥 걸으며 목청 높여 노래도 불러본다.

 

민주지산 아래 산촌마을로 유명한 조동리에 도착하니 아직 해가 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 시간이 넘게 빗속을 걸은 덕에 속옷까지는 아니지만 신발이며, 바지 등이 축축이 젖어 서둘러 민박집을 정한다. 주인 아주머니가 손수 해주신 맛난 저녁을 먹고 나니 어둑어둑하다. 들어설 때는 꽤나 넓은 방인 거 같았는데 두 짝의 젖은 신발 속에 신문지를 한 줌씩 말아 넣고, 두 짝의 위, 아래 젖은 옷가지들을 방바닥에 죽 펼쳐 늘어놓으니, 겨우 둘이 나란히 누울 수 있는 자리만 남는다. 내일은 비가 그쳐야하는데.

 

<저 오솔길 아래가 하룻밤 묵어갔던 조동리 산촌마을이다>

 

둘째 날, 해발 800m 도마령을 넘어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과 호두나무를 따라 황간까지(2006년 7월 2일)

 

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신발도 뽀송뽀송 말랐고, 비도 그친 데다 길은 오르막이지만 맑은 주위 풍경에 몸과 마음 모두 가뿐했으니. 헌데 오르막길을 30여분 올랐을까?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더니 이내 장대비가 내린다. 버스정류장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데 마치 우리를 유혹이라도 하듯 몇 시간에 한 대씩 온다는 시내버스가 저 아래서 올라온다. 어쩔까.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까.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까. 어제 일기예보는 오전까지만 오고 그친다고 하던데.

 

우리 앞에 서 있었던 버스가 저만치 고갯길을 내려 보이지 않지만 한참을 멍하니 서있다 다시 길을 나선다. 비가 그치지는 않았지만 버스도 떠난 마당에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굽이굽이 해발 800m에 자리 잡고 있는 도마령을 향해 한참을 오르니 비구름 속으로 들어와서인지 비는 그치고 안개가 잔뜩 긴 것 마냥 바로 코 앞 길마저 분간하기 힘들다. 날이 좋았다면 멀리 어제 지나온 길들과 포도밭이 발아래 펼쳐질 텐데, 것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아쉽다.

 

도마령을 넘어 산 아래로 조금씩 내려오니 구름 아래라 그런지 또 비가 내린다. 어설프게 구름 중간에 있느니 아예 구름 속으로 들어가던가 저만치 구름 아래에 있던가 해야 할 듯하다. 해서 발걸음을 빨리 해 산 아래로 내려간다. 얄궂은 이름의 고자리를 지나 고자천을 따라.

 

 

<도마령을 힘겹게 넘으니 하루종일 걸어야 겨우 차 한, 두대 지나가는 호젓한 길을 만나게 된다>

 

논이 조금씩 있는 걸 보니 산 아래로 많이 내려온 듯하다. 헌데 어째 지나는 마을마다 가게 하나 보이지를 않고 쉬어 갈만한 곳도 보이지 않는다. 버스 정류장도 어제 넘어온 길보다 더 뜨문뜨문 있고 지나는 차도 없다시피 하다. 게다가 4시간이 넘게 걸었는데도 아직 골짜기에 있는 듯한 느낌이고 산을 돌아서면 너른 들이 보이겠거니 하며 많은 산을 돌아섰는데도 또 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아직 다 여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실컷 포도와 호도도 구경하고, 깊은 산세를 느낄 수 있기에 힘든지 모른다.

 

1시가 넘어서야 상촌면 면소재지에 도착했다. 그 사이 비는 그쳤고 구름 사이로 간간이 따가운 햇볕이 비치는 가운데 5시간이 넘게 걸으면서 발을 뻗으며 쉬지 못한지라 몸이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뜨거워서 시원한 올갱이국밥과 차가워서 시원한 냉콩국수로 배를 채우고는 파출소 옆 쉼터에서 한참을 쉬고 나니 살 것 같다.

 

구름 사이로 자꾸만 얼굴을 내미는 해를 피해 그렇게 3시까지 쉬다 다시 길을 나선다. 하지만 도마령 넘어 딱 한 번 밖에 보지 못하고 있는 이정표 때문에 길을 걷는 게 여간 지루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얼마나 가야 황간인지, 얼마나 걸어왔는지 알 수 없는 데다 가지고 있는 지도마저 그 거리를 가늠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까짓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야 이정표 없어도 몇 킬로미터는 금방 이겠지만 걷는 이들에게는 한나절이고, 배려가 아쉬울 뿐이다.

 

황간을 바로 코앞에 두고 다시 소나기를 만났는데, 어제오늘 함께 한 비옷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거의 뛰다시피 해서 터미널에 겨우 도착하니 길 위에 퍼붓듯이 쏟아지는 비가 오히려 시원하다.

 

* 열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 첫째 날 : 무주군 설천면 사무소에서 민주지산 바로 아래 충청북도 영동군 조동리 산촌마을까지 약 10km. 걸은 시간 2시간 30분.

- 둘째 날 : 조동리에서 끝없는 포도밭과 호두나무를 따라 황간까지 49번 지방도로를 따라 약 32km. 걸은 시간 8시간 40분.

 

* 가고, 오고

영등포에서 무주군 설천면까지는 기차와 두 차례의 버스 갈아타기 끝에 도착할 수 있다. 영동역까지는 열차편이 금방금방 있어 쉬이 갈 수 있으나 영동에서 무주, 무주에서 설천으로의 이동은 버스시간이 거의 한 시간 간격이어서 시간 맞추기가 어렵다. 미리미리 준비를 잘 해두어야 한다. 황간에서는 구미발 강남터미널행 고속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오후 1시 30분과 저녁 8시 달랑 하루 두 차례밖에 없는 기차보다 편하다.

 

* 잠잘 곳

도마령을 넘기 전에는 조동리 산촌마을과 민주지산 휴양림 인근에 민박을 쉬이 구할 수 있으나 음식점은 민박집에 부탁을 해야 한다. 조동리에서 도마령을 넘어 황간까지는 상촌면과 매곡면 면소재지를 제외하고는 음식점은커녕 슈퍼하나 찾아볼 수 없다. 하니 조동리에서 출발한다면 그곳에서 간식과 물 등을 단단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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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30 21:45 2009/07/30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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