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통일 원로 김영식 선생 팔순잔치

 

 

 

패륜의 분단 역사를 끝내야 한다!
 
통일 원로 김영식 선생 팔순잔치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3/04/07 [23:59]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스스로 김영식의 선생의 아들딸이고자 하는 통일의 자손들 © 이정섭 기자

자하철1호선에서 9호선까지 빠짐없이 돌고 돌며 ‘우리민족끼리 화목 하게’를 외치는 할아버지의 어깨띠에는 “남북이 하나 되어 6.15선언으로 10.4선언 이행으로 우리민족끼리 화목하게 살아갑시다.”라는 구호가 적혀있다.

언제나 어디서나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우리민족끼리 통일을 외치며 분단과 예속에서 벗어나 동족을 적으로 삼지 말고 단군할아버지 자손으로 하나 되어 화목하게 살자고 외치는 ‘통일열차 할아버지’(기자가 붙여본 이름) 김영식 선생의 어깨에 오늘은 띠가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덥수럭 하던 수염도 말끔히 깎았다. 김영식 선생에게 4월 7일은 특별한 날이다.
바로 80회 생신이기 때문이다. 김영식 선생의 팔순을 기념하기 위한 생신 잔치가 7일 오후 1시부터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진행 되었다.

▲ 업는 사람도 업히는 사람도 행복한 모습은 통일조국의 미래의 모습이 아닐까? © 자주민버보 이정섭 기자

기자가 낙성대에 도착하니 웃음소리가 담장 밖을 넘어 하늘에 울려 퍼졌다. 급히 가방에서 시진기를 꺼내 들고 들어가니 김영식 선생을 업고 집안을 한바퀴씩 돈다. 아들도, 딸도, 손주도, 서로 업고 달려보겠다고 등을 들이민다. 과묵하기만 한 선생님의 얼굴에는 행복의 웃음이 가득하다. 업고달리는 알들, 딸, 손주들의 성은 각각 다르다. 하지만 이들은 생물학적 혈육이 아니라 정치적 생명체로 굳게 맺어진 동지이자, 혈육이다.

선생이 잔치상에 조용히 앉는다. 선배 동지인 양원진 선생도 곁에 앉고 잔치가 시작 됐다.

김영식 선생님의 얼굴은 행복 속에서도 가느다란 회한과 아쉬움이 흐른다. 아마 조국 분단의 아픔과 분열로 인해 생긴 가족과의 생이별이 선생의 행복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리라.

더욱이 외세에 의해 70년이라는 기나긴 고난의 민족의 수난사가 이어지고 있는 조국의 현실이 비수가 되어 선생의 가슴을 후비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기자의 가슴도 아프고 쓰리다.

함께한 동지 선후배들이 이내 눈치를 채고 김영식 선생에게 오늘만큼은 웃어보라고 강요(?)한다.

선생이 실 낱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웃음이 슬픔으로 보이는 분단이라는 야만의 시대를 어찌 할까?
▲ 친구로, 정치적 생명의 유기체로 함께 해 온 동지들이 조국통일로 김역식 선생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자고 결의했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오늘 잔치는 양심수 후원회와 민가협,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가 함께 마련했다고 한다.

십시일반이라고 음식도 여기저기서 준비해 푸짐했다. 음식보다 푸짐한 것은 주고 또 주고 싶은 정이 아닐까?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이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 “선생님이 고향을 떠나 일가친척이 한분도 안 계신 이곳에서 팔순을 맞이하셨는데 많은 선후배 동지들이 오셨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신 것은 김영식 선생님의 인품이 뛰어나셨기 때문이라고 본다.”며 “선생님은 많은 교육을 받지 못하셨지만 타고난 도덕의리와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정의로움 속에 실천으로 살아가시고 계신다.”고 선생의 애국애민을 기렸다.

권오헌 명예회장은 “지하철에서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선생께서는 어깨띠를 두르고 지하철에서 통일선전 활동을 하시는데 선생의 행동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공통적으로 가지는 생각은 선생의 애국 애족의 마음이 너무나 깊고 진정성이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권 명예회장은 “선생께서는 금강산을 다녀오셨는데 당시에는 고향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되돌아 오셔야했다. 얼마 후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희망했는데 이명박 정권 이후 돌아 갈수 없었다. 정세가 아무리 험악하지만 내년에는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하시길 빈다.”고 기원했다.
▲ 김영식 선생님과 동지들 권오헌 명예회장등이 축하빵을 자르며 선생의 만수무강과 통일을 기원했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축하의 말에 이어 김영식 선생이 답례를 하는 순서인데 갑자기 어깨띠를 찾는다. 하루도 안매면 안되는가 보다. 어깨띠를 두르고 김영식 선생은 이내 전철안의 그 목소리 그 모습으로 대사를 외운다 “단군의 자손 아들딸이라면 우리 화목하게 삽시다. 일제 36년 동안 우리민족이 비참하게 살았는데 광복이후 미국이 들어와 우리를 갈라놓고 분열의 고통 속에 빠드린지 70년이 되었습니다.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단군할아버지를 모신 한 자손이면 정신 차리고 행복하게 삽시다. 제 한목숨 편안하게만 살라면 지주에게 달라붙거나 제국주의에 달라붙어 살면 됩니다. 그러나 민족의 운명을 생각하고 조국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통일을 위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국통일 그날까지 만수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꼭 신파극 대사를 외우듯 줄줄줄 대사가 흐른다.

이어 선후배 동지들의 술잔과 절이 이어지고 구성진 우리가락도 잔치 분위기를 돋운다. 멋들어진 사철가는 선생의 한과 설음을 풀어내는 가락으로 이어졌다. 후배 동지들이 덩실덩실 추는 춤은 마치 재롱잔치를 보는 듯하다. 이 얼마나 가슴 뜨거운 장면인가. 제부모도 멀리하고 내다 버리는 세상에 조국애와 민족애를 가진 동지를 친아버지, 할아버지로 모시고 팔순 잔치를 치르는 통일동지들의 모습은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아름다운 미풍이며 도덕의리이다.
▲ 김영식 선생과 통일동지들이 일어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국가보안법피해자모임 회원들은 눈물로 쓴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편지를 목메임 속에 낭독했다.

조선에서 만든 들쭉술과 도토리 술이 한 순배 돌자 흥이 나고 흥 따라 노래 소리가 낭랑하다.

함께 생활하시는 박희성 선생은 두고 온 아내를 한시도 잊은 적 없다며 ‘앉으나 서나 당신생각’을 부르고 김영식 선생은 ‘금강산 타령’으로 화답한다.

동지들은 물론 이웃집 아저씨도 노래와 어깨춤으로 선생의 팔순을 축하했다. ‘분단 조국을 통일 된 조국으로 갈라진 민족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보석보다 귀한 청춘의 시절을 고문과 탄압으로 지세우며 감옥에서 보내야했던 선생의 파란 많은 인생을 어찌 슬픔으로만 보낼 수 있겠는가. 그렇다 이제 끝장을 봐야 한다. 부모와 자식, 부부의 연을 끊는 이 패륜의 역사와 식민의 역사를 하루빨리 끝장내야 한다.
▲ 낙성대 만남의 집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김영식 선생의 팔순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선생의 원한을 풀고 조국의 창창한 미래를 만들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우리 가슴에 품고 실천의장으로 뛰쳐나가자. 외세 없는 자주의 세상으로 우리민족끼리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 그날을 향해 나가자. 이것이 김영식 선생의 팔순이 주는 의미이며 요구가 아닐까?
▲ 김영식 선생이 지하철에서 선전하는 그 목소리, 그모습으로 통일서넌을 하고 있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김영식 선생 이력

1934. 4. 7 강원도 이천군 방상면 가하리 6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1945 조국광복 40년 일제 강제징용당한 부친 귀향

1948 민주청년동맹 가입활동

1950. 6.25전쟁 조선인민군 입대

화천 철원 정선 전투 참여

1953 원산 방어전 참전

1953 12 휴가중 신춘옥 여사와 결혼

1956 군제대 원산수산업사업소 근무 신포 명태잡이

1959 아들 현일 봄.

1960 따님 봄

1962 3월 안내선 무전병으로 울산해안 이르러 체포

88,12,21 27년만에 특별사면으로 출소

88년 출석 이후 채석공, 과수농장 노동으로 일함

2002년 6월 2차 송환 촉구 및 고문사례발표

그 이후 서울 낙성대 나눔의집에 살면서 지하철에서 통일선전활동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