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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꿀 수 있는 100권의 책 57

《세기와 더불어》에 나타나는 3가지 사상 (마지막 회)
 
김갑수 | 2018-02-09 19:07:0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좌경 교조와 민족 자주(3)

페이스북에서는 요즘도 툭하면 마르크스 – 레닌 – 스탈린을 주워섬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1926년 김일성이 동만 오가자에서 조선독립단 출신 변대우 노인을 만나 나눈 대화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너희들은 맹목적으로 이것도 숭배하고 저것도 숭배하는 식으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 무엇 때문에 러시아가 어떻고 스탈린이 어떻소 하면서 남의 나라의 말만 하는가? 매사에 러시아의 본을 따라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노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 이런 것이었다. 요컨대 제 정신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었다. 노인은 자기 일도 없이 남들의 명제를 맹목적으로 외워가지고 다니며 거들먹거리는 것에는 기어코 해보겠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변 노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변 노인뿐 아니라 김일성도 좌경교조주의자들을 끔찍이 싫어했다. 《세기와 더불어》 전 편을 통해 좌경교조를 저주하다시피 하는 말은 수십 번도 더 나온다. 그 중 일부만 소개하기로 한다.

- 동만지방에서 활동하던 종파사대주의들은 대중을 조직화하려는 사업에서도 혹심한 좌경적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그들은 ‘계급혁명론’을 부르짖으며 빈고농들과 노동자들만을 조직에 받아들였다. 그 밖의 계층에 대해서는 다 혁명과는 인연이 없는 대상으로 보았다. 그래서 조직에 들지 못한 사람들은 공산주의란 바로 저런 물건짝이구나, 쌀의 뉘만큼만 한 홑잠뱅이들만 모여서 쑥덕거리고 나머지는 다 따돌리는 것이 공산주의구나 하는 말을 돌리며 분개하기까지 하였다.(2권 196)

- 우리를 제일 놀라게 한 것은 동만지방 혁명가들의 활동에서 열병처럼 만연되고 있는 좌경 바람이었다. 좌경병은 유격구를 건설하는 사업에서 특별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넓은 땅에다 공농정권을 상징하는 쏘비에트 깃발을 띄워놓고 간부들은 “혁명, 혁명” 하면서 무사분주하게 돌아갔다. 유격구 앞에서 싸움은 별로 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니 ‘무산자사회건설’이니 하는 허공중에 뜬 구호만 연방 외치면서 얼렁얼렁 하루하루를 보냈다.(3권 28)

- 좌경을 경계하고 용납하지 말아야겠다는 나의 결심은 간도 땅에 와서 더 굳어졌다. 나는 그때부터 일생 동안 좌경과의 투쟁을 하여왔다. 간도 시절의 체험은 해방 후 우리가 좌경을 예방하고 관료주의를 청산하는 투쟁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3권 63)

이처럼 김일성은 “일생 동안 좌경과의 투쟁을 하여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좌경교조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무산자사회건설'을 허공중에 뜬 구호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마오쩌뚱의 경우도 거의 같았다. 좌경 교조들이 마르크스 레닌과 코민테른을 들먹거리며 끊임없이 혁명을 방해한 것은 중국이나 조선이나 매한가지 현상이었나 보다.

이런 현상은 조선의 좌경뿐 아니라 국제당 자체에도 문제가 있기 때문에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차츰 국제당에도 불만을 토로하는 모습을 보인다.

- 국제당이 자기의 사명을 원만히 감당하려면 승리한 사회주의 진지를 굳히는 데 모를 박으면서도 다른 나라의 공산주의운동, 특히 제국주의의 억압 속에서 신음하는 식민지 약소국가 인민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그들의 혁명투쟁을 진심으로 도와주어야 했다. 그러나 국제당은 이 요구에 낯을 잘 돌리지 않았다. 국제당의 일군들은 큰 나라의 혁명 문제에 대해서는 요란하게 떠들면서도 작은 나라의 혁명 문제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보거나 제멋대로 처리하였다.(3권 100)

김일성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 속에서 혁명의 주체는 자기 자신의 힘이며 자기 나라 인민의 힘이라는 자주적 입장에서 떠나 큰 나라들을 쳐다보는 사대주의자적 경향과 대국본위적 경향을 낳게 하였다"라고 지적했다.


동녕현성 전투에서 얻은 연대 합작의 교훈(4)

1933년 9월 상순, 중공동만특별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왕청유격대와 훈춘유격대는 구국군과 연합하여 동녕현을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당시의 동녕현성은 동녕현 3차구진에 위치, 동으로는 중쏘변경과 가까운 변경의 작은 진이였다.

당시 3차구에는 일본괴뢰군 2,000명이 주둔해 있었고 그중 일본군은 500명이였다. 이외에도 괴뢰경찰과 괴뢰자위단이 적지 않았다. 적들은 대포와 장갑차 등 현대화무기를 갖고 있었고 주위는 견고한 방어공사를 구축하였기에 공략하기 어렵고 수위하기 쉬운 곳이었다.

김일성이 인솔하는 왕청유격대와 항일구국군 시세영, 사충항부 및 반일부대 금산부 등 1,500여명은 제 시간에 집결지점에 도착하였다.(최현의 훈춘유격대는 연락 차질로 상황이 종료된 후 도착) 왕청유격대는 방어공사가 제일 견고하고 경비가 제일 삼엄한 서산포대를 3면으로 포위하고 적의 포대를 향해 맹렬한 화력을 퍼부었으나 적들의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유격대는 우회적인 전술로 적의 화력을 분산시킨 후 돌파구를 찾아 다시 맹렬한 공격을 하여 끝내 적의 요새를 점령하였다. 유격대는 방향을 바꾸어 서대문으로 쳐들어가 남문과 동문으로 돌입한 구국군과 회합, 격렬한 시가전을 펼쳤다.

이 전투에서 120명의 일본괴뢰군이 죽거나 상했으며 항일군 측은 52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이 전투는 항일부대에서 조선 유격대의 위신을 대대적으로 높였으며 특히 김일성 유격대가 총탄우속을 헤치고 구국군 대장 사충항을 구한 사실은 구국군 장병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동녕현 전투 후 유격대와 각 반일부대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이른바 반일 연대 합작이 실현된 것이었다.(이상 연변일보 참조)

작년 민중연합당과 민중의 꿈이 통합하여 민중당으로 출발한 직후 새로운 대표로 선출된 분들이 정의당을 찾아가 ‘형제당’을 운운하면서 합작 및 통합을 언급한 적이 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명분도 없고 실현 가능성도 없는 짓을 왜 하는지 안타까웠다.

위에 소개한 동녕현성 전투는 당시 동만에서 활동했던 각종 반일부대들이 연대 합작하여 승전을 일궈낸 일대 쾌거였다. 특히 김일성은 조선 유격대의 합법화가 이 전투의 결과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보아 연대 합작에 온갖 노고를 기울였다. 아무튼 연대 합작도 전투도 모두 성공적 결과를 낳았고 이 과정에서 조선인 유격부대의 공로가 단연 제1이었음을 모두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전투에 대해 김일성은 긴 회고담을 남겼다. 그 중 연대 합작과 관련된 부분은 생각 없이 연대 합작을 구걸하다시피 하는 오늘의 소수정당에 의미심장한 교훈을 준다.

- 오의성, 사충항과의 (연대 합작) 담판을 통하여 우리가 새롭게 깨달은 것은 공동전선도 자기의 주체적 힘이 강해야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1932년의 남북만 원정과 1933년의 크고 작은 전투들에서 자체의 군사적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거나 유격대를 승승장구하는 무적의 철군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더라면 오의성은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문밖에서 쫓아버렸을 것이다.

오 사령과의 합작이 그렇게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힘이 강했고 정치도덕적 풍모가 구국군보다 우월했기 때문이며 우리의 열렬한 애국심과 국제주의적 우애심, 자기 신념의 정당성이 그를 공감시켰기 때문이었다. 나는 구국군과의 합작을 실현한 그때부터 통일전선을 위한 최상의 수단은 주체적 힘이라는 것, 이 힘을 키우지 않고서는 어떤 우군이나 우방과도 연합하여 투쟁할 수 없다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고 혁명의 주체를 튼튼히 하기 위한 투쟁을 일생 동안 벌여왔다.(이상 3권 184)


김일성은 좌파일까 우파일까 (5)

- 나는 새 사회안전부장이 임명될 때마다 매번 우경을 범해서도 안 되지만 좌경을 경계하며 민생단의 교훈을 잊지 말라고 경계하고는 한다. 좌경은 정치적 사기꾼들과 야심가들이 새 형의 민생단 소통을 창출해낼 수 있는 온상이다. 이 온상의 주인들은 남들보다 10배나 20배쯤 더 높은 목소리로 혁명을 운운하고 충실성을 운운한다. 이러한 초혁명성이 지난 날 유격구에서 사람들의 정치적 생명을 제멋대로 농락하던 좌경분자들의 소행과 무엇이 다른 점이 있는가? 우경이 공개적인 반혁명이라면 좌경은 은폐된 반혁명이고, 우경이 암이라면 좌경은 그에 못지않은 독버섯이다.(4권, 71쪽)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다 보면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색거리 중의 하나가 과연 그는 좌파일까 우파일까 하는 의문이다. 그는 갑부건, 지주건, 기독교인이건 가리지 않고 포용했다. 그가 동지의 기준으로 삼는 데에는 이념이 개입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애국항일이면 모두를 동지로 받아들였다. 오히려 그는 이념적 좌경이라고 할 수 있는 마르크스 – 레닌주의자들에 대한 거부감을 더 많이 토로했다.

- 맑스 고전들을 한 배낭씩 지고 다니는 축들은 적군 속에 혁명 조직을 꾸린다는 것은 일종의 계급 협조와 비슷한 우경적인 탈선이라고 비평하였다.... 지금 청년들이 들으면 코 막고 답답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겠지만 당시로서는 이런 일면적인 입장이 상당할 정도로 득세하였다.... 행세식 맑스주의자들은 무조건적인 비타협성을 혁명가의 특질로 보면서... 계급 옹호와 계급적 비타협성의 구호 밑에서 계급의 이익 일면만을 고창해왔다. 좌경분자들과 교조주의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혁명에 등을 돌려대고 적의 진지로 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막아내지 못하였다.(4권, 215쪽)

김일성은 왕청 5구 회의에서 소비에트를 폐기하고 ‘인민혁명정부’로 대체하였다. 그는 공농유격대는 반일인민유격대로, 적위대는 반일자위대로 개명했다. 이것은 이념의 색깔을 완전히 지워버린 조치였다.

- 번지르르한 혁명적 언사와 초당적인 구호의 뒤에서 좌경은 항상 대중을 우롱하고 억누르고 기만하여 공명과 출세를 꿈꾼다. 그 공명과 출세를 위하여 자기를 언제나 최전선에서 돌진하는 땅크나 장갑차로 묘사하는 것이 좌경이다.(3권, 63쪽)

김일성이 좌경을 거부한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을 사대주의자들이라고 보았던 데에도 있었다. 그가 유격전을 채택하려 했을 때 그것이 러시아 혁명의 방침이 아니라고 하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은 중국 마오의 경우도 똑같이 당한 일이었다.

김일성은, “레닌은 유격전을 이미 실지로 폭동에 이르렀을 때나 또는 국내 전쟁에서 대전투와 대전투 사이에 얼마간 중간기가 닥쳐왔을 때 불가피적으로 나타나는 보조적인 투쟁 형태로 규정하였다. 레닌이 유격전을 기본 전투 형태로 보지 않고 일시적이며 보조적인 투쟁 형태로 본 데 대하여 나는 매우 아쉽게 생각하였다”라고 말함으로써 어조는 완곡하지만 레닌이 (최소한 만주에서는) 옳지 않다는 것을 명확히 지적했다.

오히려 김일성은 한 발 더 나아가 곽재우, 신돌석, 김응서, 정문부, 서산대사, 최익현, 유인석 등 조선 의병장들의 용감성과 다양한 전투 방법이 자기를 매혹시켰다고 토로했다.

김일성이 동만 현지 최고의 마르크스 – 레닌주의자 박소심과 벌인 논쟁은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박소심은 “맑스 – 레닌 고전가들이 역사 발전의 여러 단계에서 포르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각이한 측면에서 해석한 명제들을 한참이나 뜬금으로 쭈르르 외우는” 사람이었다. 김일성은 박소심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1. 맑스 – 레닌 고전들에서는 노동계급의 계급적 해방이 선차이고 민족적 해방이 후차라고 했지만 우리나라는 우선 일제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

2. 종주국에서의 혁명이 식민지 나라들의 혁명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일본 노동계급이 혁명에서 승리해야 독립할 수 있단 말인가?

3. 조선의 형편과 10월혁명이 일어나던 러시아의 형편은 크게 다른데 어떻게 우리가 러시아처럼 무산혁명 같은 것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김일성의 의문 제기가 지극히 합리적이며 창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은 ‘자주성’이다. 과연 김일성은 우파였을까 좌파였을까? 나는 이런 질문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런 논의는 애초부터 결말이 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김일성은 마르크스 - 레닌에 종속되지 않은 ‘자주적인 항일 민족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세기와 더불어》에 나타나는 3가지 사상 (6) 마지막 회

- 1946년 1월 1일 평양에서 신년회가 열렸다. 허가이(친소파)가 박헌영에게 러시아 말로 “신년을 축하합니다”라고 하자 박헌영도 러시아말로 되받아 인사했다고 한다. 박은 김일성에게도 러시아 말로 인사를 했다. 김일성은 웃으면서 우리말로 “정초 인사까지 소련말로 하겠습니까?”라고 농담을 건네자 좌중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이북에서는 전후 1955년 무렵까지 정월 초하루 신년 인사를 러시아말로 할 정도로 ‘소련풍’이 심하였다.(박병엽 구술,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35쪽)

이제는 남쪽에도 어지간히 알려졌듯이 《세기와 더불어》는 중국 동북을 중심으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의 기록이다. 이 무장투쟁은 동북항일연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역사적 명칭으로 표상된다. 이 무장투쟁이 값진 이유는 하도 많아서 모두 나열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일단 부도덕한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한 것은 민족과 정치를 초월하여 인류의 보편적인 윤리를 실천한 것이라는 점이 전제되어야 하겠다.

이 책은 전 8권으로서 김일성 집필 1~6권과 계승본 7, 8권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계승본이라고는 하지만 필자가 이미 초안을 잡아 놓은 육필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모두 김일성의 저작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 방대한 회고록은 김일성의 성장담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1926년의 타도제국주의동맹을 필두로 동녕현성전투, 마촌작전, 무송원정, 북만원정, 보천보전투, 간삼봉전투, 고난의 행군, 대흥단전투 등 굵직굵직한 대 제국주의 투쟁의 역사가 선명하고도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중국 정부는 신중국을 탄생시킨 3대 혁명투쟁으로 ‘마오를 정점으로 한 중앙당의 대장정’과 ‘대장정에 참여하지 않은 남방 홍군의 유격투쟁’ 그리고 ‘동북에서의 항일투쟁’을 든다. 그런데 대장정은 1년, 남방 유격투쟁은 3년이 소요되었지만 동북무장투쟁은 장장 14년이나 이어진 것이다. 나는 대 제국주의 무장투쟁이 14년이나 중단 없이 이어진 사례를 세계 다른 민족의 저항사에서 아직 찾지 못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동북의 항일투쟁에서 실제적인 성과를 더 많이 낸 쪽은 중국인이 아니라 단연 조선인이었다는 점이다. 남만의 양세봉을 비롯하여 이홍광과 이동광, 북만의 허형식, 박성길, 리학만, 김책, 최용건 그리고 동만과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김일성과 최현, 오중흡 등이 그들이었다. 물론 중국인 쪽에서도 양정우, 조상지, 위증민, 왕덕태, 주보중 등의 걸출한 인물들이 있었다. 다만 조선이건 중국이건 이들은 대표자일 뿐 실질적인 공로자는 무덤도 남기지 않고 죽어간 숱한 무명의 전사들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동북무장투쟁은 뭐니뭐니해도 자주적이었다는 점에서 가장 큰 가치를 지닌다. 일례로 김일성은 러시아말인 소비에트를 ‘인민혁명정부’로, 공농유격대를 ‘반일인민유격대’로 적위대를 ‘반일자위대’로 개명했다. 이것은 조선혁명에서 이념과 함께 사대주의를 탈색시킨 조치였다. 이처럼 그가 시종일관 경계한 것은 좌경교조와 사대주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마오의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의 국부군에게 쫓기느라고 동북에까지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었으며 소련의 국제당은 중국이나 인도 같은 대국의 혁명에는 관심을 두었지만 작은 나라 조선의 혁명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소련이 뒤늦게 동북항일연군과 조신인민혁명군에게 편의를 제공한 것은 일소불가침조약이 깨지자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투쟁은 철저히 인민 중심이었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큰 가치를 지닌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이념보다는 인간이었고 계급보다는 민족이었다. 이런 관점은 《세기와 더불어》 전편에 걸쳐 자주 피력되어 있다. 그들의 투쟁은 철저히 민본이었다. 바꿔 말해서 인민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성공하지 못했을 투쟁이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투쟁은 자연과의 투쟁이기도 했다. 그들은 영하 30~40도의 악조건에서 14년 동안이나 버텼다. 훗날 카스트로가 김일성을 만나 중국 동북 날씨가 이토록 혹한인 줄은 몰랐다고 하면서 “당신들은 대관절 무얼 먹으며 투쟁했느냐?”고 물으며 경탄했다고 한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그들은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며 투쟁했다. 그들은 민폐를 끼치지 않았으며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인민의 전답을 범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민에게 닭 한 마리, 강냉이 한 부대를 받더라도 끝까지 돈을 치렀다.

이런 모든 미덕들을 실천 가능하게 만든 사상은 무엇일까? 먼저 공산주의는 아니다. 《세기와 더불어》에 나타나는 ‘공산주의’에는 실체가 없다. 공산주의는 이상적인 관념적 구호로 사용되었을 따름이다. 이 책의 저자는 ‘변증법’이라는 단어도 한 번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저자는 계급투쟁에도 반대했다. 《세기와 더불어》에 나타나 있는 정신사상은 세 단어로 압축된다. 그것은 ‘민본과 민족과 자주’이다.

[사진] 저자 육필의 7,8권 계승본 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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