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이끄는 의열단은 한·중·일 삼국을 무대로 일본인과 일제 기관에 폭탄을 던지고 총탄을 발사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약산 김원봉 평전>은 "일제 군경과 관리들에게 의열단원은 염라대왕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다"며 "언제 어디서 의열단원이 나타나 폭탄을 던지고 권총을 들이댈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김원봉은 일본인과 일본 기관에 대한 개별적 폭탄 공격만 한 게 아니다. 그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대 조직도 갖추었다. 후삼국 시대의 견훤과 궁예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독립군 군대를 만들었다. 조선의용대라 불린 이 군대는 한때 300명을 넘는 병력을 보유했다.
권혁수 중국 요녕대 교수의 논문 '중국항일전쟁과의 연관성으로 본 조선의용대 항일 업적의 역사적 의미'는 "1940년에 이르러 조선의용대는 총대부(본부) 및 세 개의 지대를 포함한 314명으로 발전"(<충청문화연구> 제10호)했다고 설명한다. 외국 땅에서 총 한 자루, 폭탄 하나를 구하기도 벅찼을 텐데, 무려 300여 명을 무장시켰다는 것은 그가 민족 독립을 위해 얼마나 헌신적으로 뛰어다녔는지를 짐작게 하고도 남는다.
기득권 포기하고 김구 중심 좌우합작에 참여
▲ 조선의용대 참립 기념 사진. | |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
더 대단한 것은 그만한 병력을 이끌고 스스로 광복군에 편입됐다는 점이다. 물론 중국 측의 압력도 있었지만, 기득권을 포기하고 임시정부 광복군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그가 민족해방이라는 대의 앞에서 스스로를 기꺼이 희생했음을 의미한다. 자기를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이 아니라 김구를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인데도 가슴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후보 단일화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는 한국 현대사에서 잘 드러난다. 라이벌을 대통령으로 밀어주고 자신은 후보직을 사퇴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다.
김원봉은 그런 일을 해냈다. 라이벌일 뿐 아니라 이념적으로도 맞지 않는 김구와의 통합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및 광복군으로 기꺼이 들어갔다. 좌우합작과 통합의 정신을 이처럼 모범적으로 보여준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조선의용대라는 군대를 만든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야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라이벌 김구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 대의를 위해 야심을 접을 수도 있는 큰 그릇이었던 것이다.
보수 야당들의 비판과 달리 문 대통령은 김원봉을 높이 띄우지 않았다. 김구와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김원봉과의 통합을 언급했을 뿐이다.
사실, 김원봉의 실제 활약상을 생각한다면, 문 대통령이 김원봉을 좀더 직접적으로 칭송했다 해도 별 문제 될 게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어떤 격찬을 한다 해도 그의 희생과 용기에 보답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를 강렬하게 격찬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아쉬울 정도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