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는 한글을 지키는 것이 곧 독립운동이었고 우리 글을 쓰고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삼천리강산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한글날 기념사 중 일부다. 백번 천 번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해방된 지 74년. 한글은 지금 어떤 상태가 됐는지 대통령은 알고 있을까? 목숨을 걸고 지킨 한글. 그분들이 한글을 지킨 이유는 한글이라는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한글 속에 민족의 혼과 정서와 민족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글을 쓰고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삼천리강산을 잊지 않을 수 있고… 글을 깨친 힘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끌 수 있었다…” 대통령의 이 말씀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그러나 고개를 들어 길거리를 보면 참으로 부끄럽고 얼굴이 뜨거워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마음이다. 일본말, 미국말 독일, 프랑스를 비롯해 국적불명의 글자가 간판으로 버젓이 자리 잡고 있어 외래어가 아닌 외국어 전시장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은가? 간판만 그런가? 전광판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글자는 선조들이 목숨 걸고 지킨 우리글인가?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한 573주년을 맞는 한글날 기념식에서 대통령과 이낙연 국무총리의 축사는 그야말로 말 잔치였다. 이 총리는 “요즘 우리에게는 세종대왕께 부끄러운 일이 생기고 있다”면서 그 ‘부끄러운 일’이 소중한 우리말, 글이 아니라 남북한이 함께 만들려고 했던 ‘겨레말 큰사전’을 못 만든 아쉬움 그것이었다. 우리글이 만신창이 되어 있는데 ‘겨레말 큰사전’만 만들면 한글이 더 자랑스러워지는가?
세계적인 언어 정보 제공 사이트인 ‘에스놀로그’(www.ethnologue.com)의 최근 집계에 따르면 ‘현재 지구상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모두 7097개에 이른다.’고 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세기 동안 지구상에서 200여개의 언어가 사라졌으며 전 세계적으로 약 2500개의 언어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적고 있다. ‘위기에 처한 2500개 언어 중 230개의 언어는 이미 1950년부터 소멸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상규 경북대 국문학과 교수는 “인터넷의 발달로 소수자의 언어는 소통에서 열악한 위치에 놓였다”면서 “한국어도 200~300년 후엔 사라질지 모른다”고 조심스러운 의견을 내놓았다.
일제가 왜 한글을 쓰지 못하게 기를 쓰고 말렸을까? 말이나 글은 단순히 소리나 기호로 자신의 의사를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도구가 아님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과 글에는 그 민족이 살아온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말과 글은 없애겠다는 것은 그 민족문화, 민족의 혼, 민족의 역사를 말살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우리는 지금 국내총생산(GDP) 세계 12위를 자랑하고 세계 7위의 군사력을 자랑한다. 그런데 나라 안에는 36년간 일본이 뿌려놓고 간 식민지문화, 왜색문화가 청산 되었는가? 일본의 은혜를 입은 세력들이 식민시대가 그리워 망언을 일삼고 있지 않은가?
이낙연 총리는 ‘조국분단 70년은 남북의 말까지 다르게 만들고 있다’고 걱정하면서도 만신창이 된 한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지금 한글은 중병에 걸려 있다. 청소년들이 쓰고 있는 국적불명의 은어(隱語)와 속어(卑俗語)는 어떤가? 병든 한글을 다듬고 지켜 가꾸어야 할 공중파들은 한글 파괴에 앞장서고 있다. 외국어를 섞어 쓰면 더 유식하고 유능한 사람으로 보이기라도 하는 듯 멀쩡한 우리말 우리글을 두고 국적불명을 말과 글을 자랑스럽게 보급(?)하고 있다.
‘문화·예술·영상·광고·출판·간행물·체육·관광·종교, 국정에 대한 홍보 및 정부발표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고 있는 곳이 문화체육관광부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금 인터넷신문의 광고를 보면 낯 뜨겁지 않은가? 청소년들이 볼까 부끄럽지 않은가? ‘미래를 열어갈 어린이 한 명 한 명에게 꿈과 희망을 키워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일한다’는 교육부는 그런 일을 하는가? ‘심신이 건강한 민주시민으로 자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는가? ‘꿈과 끼를 펼쳐 창의적인 융합인재로 거듭나도록 도와주고…’ ‘학생들이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쾌적하고 안전한 학교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가?
지난해에는 76개 나라, 32만 9,224명이 한국어능력시험 응시해 합격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면서 초등학교 3~6학년 영어 수업 시간을 3시간으로 늘리고 방과후 시간에 한자교육을 늘리면 한글 사랑 마음이 생기는가? 한글을 아끼고 가꾸는데 앞장서야 할 지자체는 지역소개를 위해 누리집(홈페이지)에 ‘블루시티(Blue-city) 거제’, ‘로맨틱(Romantic) 춘천’, ‘원더풀(wonderful) 삼척’, ‘레인보우(Rainbow) 영동’, ‘드림허브(Dream hub) 군산’...과 같이 외국어로 홍보해야 더 돋보이는가? 입으로는 나라사랑, 한글사랑을 외치면서 한글파괴를 모르쇠로 일관하는 정부… 한글날이 부끄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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