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코로나19에 대응하는 한국형 방역모델의 철학적 배경에는 민주주의와 세계주의가 있다. 방역 하나 하는데 뭐가 이리 거창 하나 하겠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민주주의와 세계시민주의를 일상에서 동떨어진 '거창'한 영역으로 멀리 밀어 놓은 것은 아닐까 싶다.
방역을 말할 때 대부분 강제적 통제를 필연적 조건으로 간주한다. 방역의 주체는 정부 권력이고 시민은 그 권력 행사의 대상이 된다. 정부의 통제에 시민들은 모두 감시 대상에 놓이며 위반할 경우 크고 작은 제재도 따른다. 현재 프랑스에서 하고 있는 전면적 통제 역시 방역 효과를 위해 모든 시민을 정부 권력의 감시하에 놓고 있는 좋은 예다. 요컨대 바이러스 전염이라는 위기 속에서 민주주의의 후퇴를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다. 많은 세계의 석학들이 코로나 이후 세계를 말하면서 민주주의 후퇴와 권위주의 등장을 우려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선제조건 ①] 민주주의
한국형 모델은 정반대 방향으로 작용한다. 정부는 국민을 감시하는 기관이 아니다. 주식회사에 비유하자면 정부와 대통령은 임원진과 CEO고 국민은 주주라 할 수 있다. 일정한 임무와 권한을 부여받은 정부는 모든 방역 절차와 결과를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주권자로서 국민은 그 정보를 공유하면서 방역 행정의 주체자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방역 대책에 적극 관여하고 협조한다는 뜻이다. 최근 한국 국민이 보여준 적극적 관여와 협조는 이렇듯 감시와 통제의 대상에 놓인 신민(臣民)이 아니라, 결정과정의 주체인 시민(市民)이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형 모델을 적용하기 위한 선제조건 하나는 민주주의에 집요하다싶은 신념을 지닌 정부와 국민이다.
[선제조건 ②] 세계주의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에 대한 또다른 우려는 폐쇄주의로 회귀하는 것이다. 이미 21세기 유일한 슈퍼파워 미국이 트럼프 대통령의 탄생과 함께 폐쇄주의로 돌아서면서 그에 대한 우려가 커진 상황이다. 여기에 세기적 팬데믹을 겪으면서 경제적 의미의 세계화든, 사회적 의미의 세계주의든 더더욱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마스크와 진단키트 등 의료장비의 수출입을 놓고 국가 간에 벌어지는 서부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무법천지 활극은 21세기 지구촌 연대의 꿈을 더 어둡게 만든다.
이러한 때에 국경폐쇄를 요구하는 일각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공항 검역 강화를 통해 개방주의적 원칙을 고집스럽게 견지하는 한국은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세계주의적 이상을 놓지 않는 거의 유일한 나라가 되고 있다. 물론 대외교역이 국가경제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무역국가로서의 특수성이 한몫 한 것도 사실이다. 어떻든 한국의 방역대책이 세계주의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효과를 발휘하는 모습은 한국보다 수십 년 앞서 세계주의를 실험하고 실행하고 때로는 후퇴하고 다시 수정해 다져 나가다 코로나19 앞에서 힘없이 무너져버린 유럽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고 있다.
[선제조건 ③] 공격적이고 선제적인 검사
▲ 환자와 의료진 일부가 "코로나19" 집담 감염된 것이 확인되어 4월 1일부터 병원 전체가 폐쇄된 경기도 의정부시 가톨릭대 의정부성모병원에서 직원, 환자, 보호자와 간병인 등 2천여명을 대상으로 전수 검사가 실시됐다. | |
ⓒ 권우성 |
▲ 지난 2월 27일 대구시 남구 대명동 영남대학교 병원 선별진료소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검사를 받으러 온 시민들이 차에 탄 채 의료진으로부터 진료를 받고 있다. 영남대 병원 측은 선별진료소 내에서의 감염 예방과 환자 보호를 위해 진료소 운영을 "드라이브 스루(Drive-Thru)" 방식으로 변경했다고 밝혔다. | |
ⓒ 연합뉴스 |
그렇다면 민주주의와 세계주의를 지키면서도 효과적 방역을 할 수 있었던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어려운 답이 아니다. 바로 대대적이고 공격적이면서 선제적으로 확진자를 찾아 나서는 적극적 검사활동이었다. 이미 2015년 메르스 사태 당시 늑장 대응과 비밀주의로 세계에서 세 번째 사망국이라는 오명을 둘러썼던 한국은 똑같은 의료수준, 똑같은 방역요원, 똑같은 방역당국을 가지고도 정책 전환만으로 모든 것을 바꿔놓은 것이다.
아직 국내 확진자가 얼마 되지 않던 지난 1월 설날 연휴, 정부 보건당국은 국내 검사키트 제조사들과 긴급 회의를 열어 최대한 빨리 진단키트 대량생산에 돌입하도록 했다. 당시 얼핏 보기에 비합리적이고 비경제적인 생산 결정처럼 보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31번 확진자가 발생하고 피해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만약 진단키트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아찔하다.
한국형 모델에서 힌트 찾는 유럽
▲ 3월 13일 오후 서울 구로구 구로역에서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역사 방역을 하고 있다. | |
ⓒ 이희훈 |
유럽 국가들이 땅을 치며 분루를 삼키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다수의 서유럽 국가들은 한국보다 환자를 더 많이 수용할 수 있는 의료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적은 부담으로도 대부분 의료혜택을 누릴 수 있는 강력한 건강보험 체계도 있다.
또 한국에 없는 재해 재난에 대한 법적 차원의 강제 장치도 있다. '사전주의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이라 불리는 재난 방지대책은 확실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더라도 발생할 수 있는 피해가 돌이킬 수 없고 규모가 커질 수 있다면 이를 규제할 수 있는 장치다.
이처럼 의료 차원에서 또 법적 차원에서 서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한국보다 못하지 않은 인프라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초기 대응에 실패하면서 평상시가 아닌 비상시 대규모 전염병에 대응할 수 있는 구체적인 준비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1세기 유럽에서 이 정도 전염병이 발생하리라고 상상도 못했던 것일까? 결국 때늦은 대응으로 프랑스를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는 그들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민주주의와 세계주의로부터 몇 걸음 후퇴하는 강력한 계엄령 수준의 전면적 사회 통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 유럽인들이 주시하는 한국형 모델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단기적 효과 차원에서는 중국식 모델, 또는 거기서 좀 더 다듬어진 대만식, 싱가포르식 모델도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정도 규모의 팬데믹 이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경제적 파급효과가 발생한다.
핵심은 효과적인 방역을 하면서도 민주주의적, 세계주의적 평상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앞으로도 있을 수 있는 지구촌 시대의 팬데믹에 대비해서라도, 인류는 이 시대에 맞는, 그러면서도 보편적일 수 있는 표준 매뉴얼을 생각해야 한다. 그 힌트를 세계인은 한국형 모델에서 찾고 있다.
▲ 3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강공원 반포지구에 봄을 맞아 곳곳에 돗자리를 펴고 휴식을 취하는 시민들이 눈에 띄고 있다. | |
ⓒ 이희훈 |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임상훈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장을 거쳐 현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위원 및 사단법인 인문결연구소 소장으로 활동중입니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