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부터 여러분들을 모두 방면합니다. 나는 반역으로 몰려 죽을지도 모르지만 내 혼이 480명의 가슴 속에서 지킬 것이니 새 사람이 되어 주십시오. 선량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말입니다."
1950년 7월 안종삼 구례경찰서장(1903~1977)이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구금하고 있던 보도연맹원 480명을 사살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고심을 하다가 명령을 어기고 이들을 석방하며 한 이야기이다(보도연맹은 과거 좌익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가입시킨 조직으로, 한국전쟁 직후 있었던 이들의 학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3. "죄 지을지 모르니 미리 죽인다", <한국일보> 2020년 8월 25일자 참조).
"나에게 고마워할 필요 없습니다. 대신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1950년 8월 제주의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1897~1966)이 구금 중인 221명의 보도연맹원을 사살하라는 지시를 어기고 석방하며 한 이야기이다.
그렇다.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당했지만 자신의 양심에 따라 명령에 불복종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구한 경찰들도 있다. 언론에서는 이들에 대해 '한국의 쉰들러'라고 부르기도 한다. 쉰들러는 공직자가 아니었고 따라서 상부의 사살 명령을 직접 어기고 목숨을 구한 것은 아니었기에, 이들은 '쉰들러 그 이상'이다.
의인의 '등급'을 매기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만, 비교를 하자면, 자신의 아들과 친척을 죽인 가해자들의 목숨을 구한 여수의 손양원 목사와 영광의 박남도 씨가 최고 수준이다('손호철의 발자국'15. "좌익의 우익 학살 또한 똑같이 비판받아야 한다", <한국일보> 2020년 11월16일자 참조). 자신의 목숨을 걸고 명령을 불복종하며 수많은 목숨을 구한 안 서장, 문 서장 등이 그 다음이고, 쉰들러는 그 다음일 것이다.
인민군이 장악했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한 구례 지역으로 안 서장이 돌아와 보니 구례는 다른 지역과 달리 '피의 보복' 없이 평온했다고 한다. '恩深洞庭湖 德高方丈山(은심동정호 덕고방장산 : 은혜로움이 동정호 같이 깊고 덕이 방장산 같이 높도다)'. 1951년 그가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나자 마을 사람들은 10폭 병풍과 함께 써줬다는 한시다. 그는 이 시구의 끝 자를 따서 호를 호산(湖山)으로 지었고 이후 전남도의원 등으로 활동했다(오세구의 블로그, '구례-안종삼 서장').
2012년 7월 24일, 그가 480명의 목숨을 살린 지 정확히 62년이 되는 날, 구례경찰서는 그의 동상을 세웠다. 그 동상 앞에 서자 존경심에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제주 지방경찰청에도 규모는 작지만 문형순 서장의 흉상이 설치되어 있다. 제주4.3평화공원 기념관에는 '집단학살 속의 의로운 사람들'이란 부분에 그의 사진과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모퉁이에 문 서장이 "부당하므로 불이행"이라고 써서 답신한 학살명령서이다. 많은 친일 경찰들과 달리 평안도 출신으로 일찍이 만주로 넘어가 만주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운동을 했던 그는 해방 후 남쪽에 내려와 경찰에 투신했다.('손호철의 발자국', "토벌대의 두 얼굴 : 차일혁과 김종원", <한국일보> 2020년 12월 7일자에서 지적했듯이, 독립군 출신 경찰과 군인 대부분이 '친민중적'이었다면, 백선엽, 김종원 등 학살의 주범들은 대부분 일본군출신이었다). 4.3 때도 모슬포경찰서장으로 지역좌익 1백 여 명의 명단을 입수하고도 이들을 처형하는 대신 설득해 자수시켜 훈방시켰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 제주도에서 병사한 그는 제주시 평안도민 공동묘지에 묻혀있다. 그곳을 찾았지만 특별한 표시판이 없어 한참을 헤매다가 평안도민회 총무에게 전화를 해 간신히 찾았다. 그의 인품만큼 커다란 나무가 감싸 안고 있는 그의 묘 앞에서 그의 용기와 인간미에 존경심을 표했다.
최근 제주를 들를 일이 있어 간 김에 문 서장의 묘를 다시 찾았는데, 제주경찰서가 새 비석을 설치해 찾기가 쉬워졌다. 문제는 그 후에 발생했다. 공동묘지로 들어가는 길은 비포장도로 내리막길로 풀로 덮여 있었는데 풀 밑은 완전히 진흙 밭으로 렌트한 SUV가 빠져나오지 못해 구난차를 불렀지만 구난차도 빠져 나오지 못해 거금을 주고 다시 오프로드 차를 불러 8시간 만에 간신히 빠져나왔다.
하루 종일 굶고 일정 망치고 예상 밖의 거금까지 날리고 말았는데, 문 서장 같은 '의인'이 아니라 '악인'을 찾아갔다가 그랬다면 열 받아 쓰러졌을 것이다.
"여보, 그들을 풀어주세요."
"그러면 내가 죽는대."
"그들을 죽여 놓고 당신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이 죽더라도 그들은 살려야 지요."
모든 의인들의 생애가 해피엔딩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이들에 비해 구한 사람들의 수는 적지만, 충북 영동의 이섭진 용화지서 주임(1921-1989)도 의인 중의 한 명이다. 상부 지시에 의해 마을의 농민 등 40명의 보도연맹원을 소집해 놓고 그는 고민에 빠져 부인에게 상의했다. 그는 부인의 설득에 따라 이들을 풀어주고 이들을 가둬 놓은 곳이 허술해 이들이 도망쳤다고 허위보고했다(박민순, "총살 직전 보도연맹원 40명 목숨 구한 시골지서 주임", <오마이뉴스> 2018년 1월22일).
그는 명령을 어기고 사람들을 구한 것이 소문이 나서 영동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고, 변두리 보직만 맡다가 일찍 옷을 벗어야 했다. 용화리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에 낡은 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세월에 파여 이제 읽기조차 어려워진 글귀에 '지서주임 이섭진'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 글이다.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영원히 잊지 않는 비'라! 목숨을 구한 가난한 농민들이 십시일반으로 곡식을 모아 세운 소중한 비석이다.
충북 괴산군 증평면 증평지서장 안길룡은 더욱 비극적이다. 충북도경 보안과에 근무했던 윤태훈 씨의 증언에 따르면, 안지서장은 보도연맹원 중 억울한 사람들을 풀어줬다가, 헌병대에 의해 근처로 끌려가 즉결 처분 당했다고 한다.
증평지서를 찾아가 물어봤지만, 그런 사람이 근무했었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종삼 서장, 문형순 서장이 '인권 경찰'의 표상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것과 너무 대조적이라, 안타까웠다. 나는 증평지서 앞에서 물었다. "과연 나는 안 지서장처럼 나의 목숨을 버리고 무고한 사람들을 구할 용기가 있는가?" 자신의 양심에 따른 이유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안 지서장에게 묵념을 드리고 무거운 마음으로 증평을 떠났다.
이 같은 양심적인 명령 거부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안병하 치안감(1928-1988)이다. 보도연맹원 학살 거부로부터 30년 뒤인 1980년, 전두환 등 신군부가 광주에서 시민 학살을 자행할 때, 안병하 전라남도경찰국장은 진압 경찰관의 무기 사용과 과잉 진압을 금지했다. 그 때문에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면직 당했으며, 병마에 시달리다 1988년 사망했다. 2017년 정부는 시민 보호의 정신을 높이 평가해 그를 치안감으로 특진추서했고 2020년에 그의 평전도 나왔다.
이와는 다소 결을 달리하지만, 일부에서는 제주 4.3과 관련해 제주주민 학살을 위한 출동을 거부한 여수14연대의 '항거'(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14. "국가보안법의 단초가 된 여순사건의 비극" <한국일보> 2020년 11월 9일자 참조), 부마항쟁에 대한 박정희의 강경진압 노선에 저항해 박정희를 사살한 김재규의 10.26 거사 역시 이 같은 양심적 명령 거부의 예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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