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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독도 폭격 사건'을 아시나요?...“73년간 묻혀 있는 억울한 넋"

[논설위원의 단도직입]'미군 독도 폭격 사건'을 아시나요?...“73년간 묻혀 있는 억울한 넋"

도재기 논설위원 jaekee@kyunghyang.com

  • 입력 : 2021.06.09 06:00 수정 : 2021.06.09 08:34
  •  ‘미군 독도 폭격 사건’ 유족 김상복·연구자 홍성근
    ‘미군 독도 폭격사건’ 73주년을 하루 앞둔 7일 사건 희생자 유족인 김상복 속초연탄은행 대표(왼쪽)와 홍성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울릉도 도동항에서 조속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추모사업 방안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도재기 논설위원

    ‘미군 독도 폭격사건’ 73주년을 하루 앞둔 7일 사건 희생자 유족인 김상복 속초연탄은행 대표(왼쪽)와 홍성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울릉도 도동항에서 조속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추모사업 방안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도재기 논설위원

     
    ‘미군 독도 폭격사건’은 미 군정기이던 1948년 6월8일 낮 12시쯤 주일 미군 B29 폭격기들이 독도 일대를 폭격, 미역 채취와 고기잡이를 하던 어민들이 죽거나 다친 사건이다. 사건 발생 73주년이지만 진상규명은커녕 세인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최근 들어 유족과 연구자를 중심으로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8일 독도에서 ‘6·8 독도 미공군 폭격사건 어민 위령행사’가, 전날엔 울릉도에서 ‘독도 6·8사건 추모 사업의 과제와 방향’이란 주제의 토론회가 열린 배경이다. 한국 현대사에 반드시 기록해야 할 사건이다.
     

    해방 이후 격동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시나브로 잊힌 비극적 사건들이 있다. 각계의 관심으로 ‘제주 4·3사건’(1948년), ‘노근리 사건’(1950년) 등은 조명을 받았지만 아직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밝혀지지 않은 사건들이 더 많다. 최근 활동을 시작한 정부의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 규명을 신청한 건수가 전국에서 3636건에 이른다. 민간인 희생, 인권 침해 등 진상을 밝혀내야 할 사건들이 지금도 이 숫자만큼 잊히거나 묻혔다는 의미다.

    미 군정기이던 1948년 6월8일 주일 미군 B29 폭격기들이 독도 일대를 폭격, 바다에서 조업 중이던 어민들이 희생당한 ‘미군 독도 폭격사건’도 그중 하나다. 사건 발생 73주년이지만 진상규명은 이뤄지지 않았다.

    8일 독도에서 개최된 ‘6·8 독도 미공군 폭격사건 어민 위령행사’, 앞서 7일 울릉도에서 열린 ‘독도 6·8사건 추모 사업의 과제와 방향’이란 주제의 토론회는 독도 폭격사건을 애써 기억하고, 진상규명에 한발이라도 더 다가가려는 노력이다.

    토론회·위령제에서 독도 폭격사건의 희생자 유족인 김상복 속초연탄은행 대표(76·강원 속초시)와 독도 전문가이자 이 사건을 연구해온 홍성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52)을 만났다. 김 대표는 사건 당시 현장에서 미역 채취 중 사망한 김해도씨의 아들이다. 폭격사건 이후 울릉도를 떠나 속초에서 자수성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연탄은행과 무료급식소 등을 운영하며 봉사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홍 위원은 10여년 전부터 폭격사건 관련 유족 인터뷰, 논문 발표 등을 해오고 있다. 홍 위원은 고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의 조카이다.

    ‘독도 폭격사건이 73년이나 됐는데 진상규명이 제대로 될까’란 물음에 김 대표와 홍 위원은 “정부와 지자체, 국민들, 학계 연구자들이 지금부터라도 관심을 가져준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 김 대표는 “이제 피해 당사자들은 모두 타계하고 나 같은 1세대 유족도 늙었다”며 “시간이 많지 않다”고 밝혔다.

    미역 채취 중 타계한 김해도씨 아들
    김상복 속초연탄은행 대표

    현재 독도 희생자 위령비에는
    ‘조난어민’이라 새겨져 있어
    당국에서 조속히 바로잡고
    사건이 제대로 알려졌으면

    “그냥 일을 하다가 (사망한 게) 아니라 미군의 독도 폭격으로 돌아가셨으면 진상을 규명해야지. 그리고 그 사실을 알리는 표식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야 후손들이 ‘아, 이렇게 돌아가셨구나’ 하고 알지. 사람들도 ‘이런 사건이 있었네’라고 알고….” 김 대표는 특히 독도에 현재 서 있는 당시 희생자들 위령비의 문제점을 거듭 강조했다. “위령비에 ‘독도조난어민위령비’라 새겨져 있다. 조난이 아니라 폭격이지. 잘못된 것을 울릉군이든 경상북도든 중앙정부든 바로잡아 줬으면 좋겠다. 사건이 제대로 알려져야지. 유족으로서 바람은 그것이야.”

    김 대표는 “폭격사건은 제가 워낙 어릴 때라 구체적 경험이 없다”며 “젊은 시절엔 객지 생활을 하며 힘들게 사느라 사건에 관심을 두지도 못했다”고 밝혔다. “아버님이 20대 초반에 돌아가셔서 어머니는 19세에 혼자되셨다. 고생을 많이 하셨다. 먹고살기 위해 가족들이 고향을 떠나 속초로 이사했다. 저도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고 놀림도 받았다. 객지에서 생활하느라 진상규명 작업에 나서질 못했다.”

    독도 전문가
    홍성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2018년 울릉도·울진·속초 등서
    사망자 유족 6명 찾아 현지조사
    실체 모르고 고통 간직한 채 살아
    모임이나 단체도 결성 안 된 상태

    홍 위원은 “먹고살기 워낙 힘든 시절이던 당시 가장이 희생되거나 피해를 입은 유족들의 삶은 더 힘들고 황폐해졌다”며 “김상복 선생도 다른 유족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2018년 4차례에 걸쳐 울릉도와 경북 울진, 강원 속초·묵호 등에 살고 있는 독도 폭격사건 사망자 유족 일부인 6명을 찾아 현지조사를 했다. 조사 당시 유족들은 사건의 실체를 잘 모르고 그저 그날의 고통을 간직한 채 살아오고 있었다. 진상규명 노력에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던 셈이다.”

    실제 독도 폭격사건의 사상자 유족과 가족들은 모임이나 단체도 아직 결성하지 못했다. 사건 피해자나 유족들의 정신적·육체적 고통도 컸다. 울릉도 시민단체인 ‘푸른울릉독도가꾸기회’와 한국외국어대 독도연구회가 1995년 실시한 생존자·유족 면담에서 피해자 공두업씨의 아들 태우씨는 “아버지는 폭격 현장에서 사람들을 살리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한스러워했고, 다른 유족들의 통곡을 애써 피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어머니가 아버지 얘기는 삼가시는 바람에 6~7년 전 ‘푸른울릉독도가꾸기회’와 홍성근 박사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독도로 미역 따러 갔다가 돌아가신 것으로만 알았다”며 “이제라도 폭격사건이 명백하게 밝혀지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래서 그 사실을 제대로 알리는 위령비가 세워지고, 현장에 안내판이라도 있기를 바란다”며 “부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홍 위원은 “일본이 여전히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상황에서 독도 폭격사건의 실체적 진실 규명은 향후 독도 관련 연구, 독도를 둘러싼 한·일관계 등 여러 측면에서 중요하다”며 “당국과 학계의 관심이 요구된다”고 밝혔다. 그는 “진상규명을 통해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고, 독도가 평화와 인권 신장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면서 독도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확장도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군 독도 폭격사건’ 73주년을 맞은 8일 독도 동쪽섬 선착장에서 시민단체 ‘푸른울릉독도가꾸기회’와 울릉군이 마련한 ‘6·8 독도 미공군 폭격사건 어민 위령행사’가 열리고 있다.   도재기 논설위원

    ‘미군 독도 폭격사건’ 73주년을 맞은 8일 독도 동쪽섬 선착장에서 시민단체 ‘푸른울릉독도가꾸기회’와 울릉군이 마련한 ‘6·8 독도 미공군 폭격사건 어민 위령행사’가 열리고 있다. 도재기 논설위원

     

    미군, 한국에 훈련장 지정 경위 알리지 않아
    학계 ‘일본의 독도 자국 영토화 전략’ 해석
    ‘미군 독도 폭격’과 그 후


    8일 오전 11시 독도의 동쪽섬 선착장에서 동해의 검푸른 파도 소리와 괭이갈매기들의 울음소리 속에 위령제가 시작됐다. 73년 전 바로 이날, 독도 바다에서 폭격으로 희생된 어민들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제다. 잊히고 있는 ‘미군 독도 폭격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자리다. 울릉도 시민단체 ‘푸른울릉독도가꾸기회’와 울릉군이 마련하고 경북도·대구지방변호사회·독도학회가 후원한 ‘6·8 독도 미공군 폭격사건 어민 위령행사’에는 유족과 학계 연구자 등 90여명이 참석했다.

    “‘미군의 독도 폭격사건’을 아세요? 1948년 6월8일 낮 12시쯤, 주일 미 공군 B29 폭격기들이 독도를 훈련장으로 삼아 폭격하는 바람에 미역 채취와 고기잡이를 하던 어민들이 희생됐습니다. 이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독도 전문가인 홍성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사건의 실체가 아직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아 연구자로서 안타깝다”며 “어민들의 희생은 물론 일본의 치밀한 독도 침탈·영유권 주장과도 밀접된 사건이라 사회적 관심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미군 독도 폭격 사건’ 소식을 전한 경향신문 1948년 6월15일자 기사.

    ‘미군 독도 폭격 사건’ 소식을 전한 경향신문 1948년 6월15일자 기사.

     

    사건 이후 증언·보도에 여론 악화
    극동공군사령부 “사고” 일부 인정
    미 군정청, 진상조사 발표 없었고
    어떤 정부도 실체 확인 나서지 않아
    사망자 수 등 사실관계조차 불분명
    8일 위령제서 진상규명 촉구 목소리


    지금까지 확인된 문헌, 학계의 연구 성과, 생존자·유족들의 증언 등을 종합하면, 일본 주둔 미공군 93폭격대대 폭격기 20대가 1948년 6월8일 낮 12시경 독도 일대를 폭격했다. “태극기를 흔들며 살려달라고 외쳤다” “배에 총알 흔적이 있다”는 등 기총소사가 있었다는 증언들도 있다. 사건 발생 당시 신문들은 폭격과 피해 등을 보도하며 책임 규명을 촉구했다. 그해 6월12일자에 폭격사건을 전한 경향신문은 6월15일자에는 ‘독도 맹폭사건 어디로… 민족의 분격 절정에’라는 제목 아래 “불법적인 행동을 한 비행기를 철저히 조사 적발하라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미 극동공군사령부는 부인하다가 뒤늦게 “우발적 사고” “오인 폭격” 등으로 일부 사실만 인정했다. 기총소사는 부인했다. 이후 미 군정청이 피해자 일부를 대상으로 위로금을 전했다는 단편적 기록이 있다. 하지만 미 군정청 등은 약속과 달리 공식 사과나 진상조사 결과 등을 내놓지 않았다. 당시 남조선과도정부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역대 정부가 실체 확인에 나서지 않아 사건 조사 등은 이후 흐지부지됐다.

    사건 발생 후 73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사망자 수 등 기초적 사실관계조차 불명확한 이유다. 사망자는 14명이지만, 그 이상으로도 추산된다. 부상자, 침몰 어선 등의 피해도 마찬가지다. 희생자들은 울릉도와 울진·묵호 등에서 미역 채취 등을 위해 독도 조업에 나선 어민들이다.

    의문점은 또 있다. 당시 주일미군이 일본 어민들에게는 독도 폭격 예고를 하고 한국 어민들에게는 하지 않은 이유, 폭격의 현황과 과정·지휘 체계 등이 그것들이다. 독도를 폭격훈련장으로 지정한 구체적 경위, 훈련장 지정을 한국에는 알리지 않은 이유 등도 확인되지 않았다. 기관총 사격 여부 또한 마찬가지다. 학계는 독도 훈련장 지정이 당시 일본의 치밀한 독도의 자국 영토화 전략에 따른 것으로 본다. 실제 일본 중의원 자료 등에는 미군 활용을 통한 영유권 주장 근거 확보라는 일본의 정치적 속셈이 드러나 있다.

    “저 건너, 비석이 보이나요?” 푸른울릉독도가꾸기회 김대성 부회장이 위령제 행사장 건너편 저 멀리 몽돌해변 쪽을 가리켰다. 독도 방문객이 쉽게 볼 수 없는 자리에 폭격사건 희생자들 위령비인 ‘獨島遭難漁民慰靈碑’(독도조난어민위령비)가 서 있다. ‘조난’이라는 위령비의 비명은 태풍과 같은 재난을 만난 것으로 해석돼 미군 폭격으로 인한 희생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 “진상규명의 필요성·중요성을 비명이 잘 보여주는 셈이죠. 역사적 사실을 담아내는 비명으로 제대로 고치는 것도 진상 확인 작업의 하나입니다.” 이태우 교수(영남대 독도연구소)의 말이다.

    이 사건의 또 다른 희생자들이 있다. 바로 폭격 속에 죽어가는 동료들과 침몰하던 배를 지켜본 생존자들이다. 그들은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호소하다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다. 유족들은 생존에 급급해 진상규명에 나서기조차 힘들었다. 당시는 미 군정 통치기여서 정치·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고, 미국의 잘못을 들춰내는 일이라 정부도 진실 규명을 외면했다. 정부와 지자체의 소극적 태도로 진상규명 작업은 사회적으로도 점차 잊혔다. 당시 미국 측의 조사보고서 등 관련 자료도 부족해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생명권·재산권 침해 사실 등은 확인하면서도 실체 규명에는 이르지 못했다. 학계의 연구는 홍 연구위원을 비롯해 이태우·김태우(한국외국어대)·정병준(이화여대) 교수와 마크 로브모 등의 논문·저서, 푸른울릉독도가꾸기회 등의 일부 증언집이 있다.

    연구자들은 독도 폭격사건을 50여년 만에 결국 진상이 밝혀진 ‘노근리 사건’과 비교하며 관심을 촉구한다. 위령제에 앞서 7일 울릉도에선 ‘독도 6·8사건 추모 사업의 과제와 방향’을 주제로 토론회도 열렸다. 일제강점기 위안부·강제징용 피해자 등의 법률 지원으로 유명한 최봉태 변호사(59)의 사회로 홍성근 위원의 주제 발표와 김병렬 국방대 명예교수, 김윤배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 대장, 이태우 교수 등이 토론자로 나섰다. 토론회에서는 진상규명의 필요성 강조와 더불어 향후 조사연구 과제, 추모시설 조성 방안 등을 모색했다.
     
    [논설위원의 단도직입]'미군 독도 폭격 사건'을 아시나요?...“73년간 묻혀 있는 억울한 넋"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6090600015&code=960100#csidx79a38ad78c9e0b98cc8f208bb2686d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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