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레인으로 조심스레 파내려가다가 직사각형 모양의 녹슨 철관의 형체가 나오기 시작할 때 권씨는 공사를 중지시킨 뒤 학계에 알렸다. 인부들이 손으로 조심스럽게 파내려가 철관의 형체를 보존시키면서 유골을 수습할 때였다.
"어? 그런데 왜, 두개골이 안 보이노? 빨리 두개골 찾아봐라."
그는 꿈속에 본 모습이 떠올라 또다시 섬뜩했다고 했다. 하지만 구석진 자리에서 뒤늦게 발견된 두개골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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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장을 위해 파묘하기 전 권오설 선생의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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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설 선생의 양자 권대용씨(사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파묘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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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설 선생의 묘에서 붉게 녹슨 철관이 발견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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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가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을 철관에 넣어 매장한 현장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지 78년만에 확인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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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였죠. 원래 합장하려던 날인 4월 17일(권오설 선생의 기일). 비가 억수로 쏟아졌어요. 억장이 무너질 정도로 슬프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철관을 보았을 때에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틀 뒤에 창밖을 보며 폭우보다 더 많은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생가터] 양반유림 가문의 빈농... 까치구멍집
가일마을 입구 회화나무를 지나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병곡종택과 수곡고택의 담장을 따라 걸으면 남천고택 담장 안쪽에 권오설 선생 생가터가 있다. 해방 후에 불이 났고, 지금은 참깨 묘목이 자라고 있다. 작은 텃밭만 봐도 당시 권오설 선생의 가난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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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생가터. 권오설 선생 생가 흔적은 사라지고 밭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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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초가삼간이었죠. 초가집 용마루 양 옆에 구멍이 있어서 일명 까치구멍집이라고 불렀습니다."
권대용씨의 말이다. 권 선생의 부친 소암 권술조는 서당 훈장을 지내는 양반 유림이었는데, 빈농이었다. 권 선생은 부친의 한문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1907년에는 남명학교를 다니며 신학문과 한학을 익혔다. 1916년 대구 고등보통학교(경북고등학교 전신)에 입학했지만, 3학년 때 퇴학을 당했다. 친일교사 배척, 동화적 노예교육을 반대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했다는 이유였다.
"집안이 가난해서 학비 낼 돈도 없었지만, 요즘말로 하면 소위 '운동권'이었나 봅니다. 권술조 할배가 쓴 제문을 보면 이 때 당시를 묘사하며 '루에 오르던 자의 사다리를 뗐다'고 절망했습니다. 학교를 그만뒀지만, 일본인 교장도 부친의 재능을 아껴서 경주 부잣집에 가정교사를 하도록 배려해줬다고 하더라고요."(권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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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융희 황제(순종) 장례일(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한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권오설 선생의 양자 권대용씨가 고인의 아버지가 작성한 제문(축소판)을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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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설 선생은 그 뒤 상경해서 중앙보통학교와 경성부기학교 등을 다녔지만 중도에 그만뒀고, 지인이 자리를 알선해 전남도청에서 근무하다가 3·1운동을 맞았다. 권대용씨는 "그 때 부친이 광주 시위를 주도한 배후로 지목돼 체포된 뒤 6개월의 형을 살았다"고 말했다. 권 선생은 목포에서 복역했다.
[원흥의숙] 100년 뒤에 들어선 한옥책방 '가일서가'
가일마을 입구 두 갈래 길에서 왼쪽 길로 올라가면 '노동서사'가 나온다. 1770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문중 위패를 모시던 제사 공간이었고 서당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1919년 11월, 고향 가일마을로 돌아온 권오설 선생은 이곳에 '원흥의숙'이라고 불리는 원흥학습강습소를 세워 마을 청소년을 교육했다.
"많게는 학생들이 200명이 넘었다고 하더라고요. 부친은 교장 겸 교사였지요. 월급을 타면 필기구를 사라고 아이들에게 다 나눠줬답니다. 일직면에는 '일직서숙', 풍산에는 '풍산학술강습회' 등 분교를 열어 교육운동을 했지요. 목소리가 하도 카랑카랑해서 멀리 떨어진 산에서도 들렸다고 합니다."(권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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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이 고향인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에서 원흥학술강습소를 운영했던 노동서사. 오른쪽 건물은 학생들의 숙소로 사용된 노동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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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숙식도 했던 노동서가 바로 옆 건물 '노동재사'에는 작은 한옥 서점이 들어서 있다. 이가람, 김현정 부부가 문중의 허락을 받아 차린 '가일서가'다. 책만 파는 게 아니라 노동서가 한쪽 방에서 글쓰기를 교육하고, 가일서가에서는 문화 프로그램도 진행하는 인문 사랑방이었다. 지난 2일에도 사진작가를 초대해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
"운명으로 받아들였죠. 1919년에 이곳에서 원흥의숙이 시작됐는데, 100년 뒤인 2019년에 가일서가를 열었으니까요.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일제의 불공정한 지배에 대해 깨우쳐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건물을 함부로 대할 수 없어요. 한번은 국회도서관에서 이곳을 소개해달라고 해서 '막난 권오설에 부치는 편지'라는 글을 썼는데, 선생님의 아드님(권대용)이 고맙다고 전화까지 주셨어요."(가일서가 김현정씨)
[조선공산당] "왜놈들과 맞선 항거의 무기"
권오설 선생이 100여 년 전에 가일마을에서 시작한 건 교육운동만이 아니었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 펴낸 자료총서 '권오설2'에 따르면 1920년에는 가곡농민조합을 조직했다. 안동청년회 집행위원, 일직면금주회 회장,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입회, 풍산청년회 결성 등 청년·농민·노동운동을 벌였다.
그 뒤 풍산소작인회 대표 자격으로 서울로 간 권오설 선생은 1924년 신흥청년동맹과 한양청년연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됐다. 조선노동총동맹 상무위원을 거쳐 책임자로 올랐다. 서울에서는 인쇄직공조합을 조직하고 양말직공·고무직공·양화직공의 파업을 지도했다. 1925년 4월 17일에는 김재봉·김찬·조봉암·박헌영·김단야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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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권오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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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은 일제에 의해 지도자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와해됐지만, 권오설 선생은 조직 재건을 위해 박헌영 다음으로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맡았다. 당시 그는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에서 들어오는 자금도 관리하고 있었다.
"8·15 때 해방된 것은 친일파였지, 독립운동가는 아니었습니다. 반민특위가 뒤집어진 뒤 부친의 이름 앞에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었죠. 그래서 서훈도 늦게 받았어요. 하지만 부친이 활동할 때에는 남북이 갈리지도 않았죠. 당시 78%의 민중이 사회주의를 옹호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려면 많은 정보와 자금이 필요했고, 조직을 통해야만 가능했어요. 사회주의는 왜놈들과 맞선 항거의 무기였죠."(권대용)
1926년 9월 1일 발표된 조선공산당 선언에도 "당면한 투쟁 목적은 일본제국주의의 압박에서 조선을 절대로 해방함에 있다"고 적혀있다. 당면 정치 요구로는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되 국가의 최고 및 일체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조직한 직접, 비밀, 보통, 평등의 선거로 성립한 입법부에 있을 일 ▶일본의 군대, 헌병 및 경찰을 조선에서 철수할 일 ▶무제한의 양심,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을 내걸었다. 권대용씨의 말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2편
] "안동이 발칵...'철관' 내려올 때 까마귀 떼 바글바글" http://omn.kr/1tswl
[관련기사] "
중기관총으로 겁박... 좌-우익이 함께 만세 불렀다" http://omn.kr/1tp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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