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1년 냉전 해체 과정에서 채택된 남북 기본합의서 30주년을 맞아 합의서 채택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 북한과 미국 간 적대관계 해소가 한반도 문제의 해결 방안이라며 미국의 결단을 촉구했다.
13일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한반도평화포럼 및 동아시아문화센터 공동 주관으로 열린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3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기조강연을 맡은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미국과 북한의 적대관계가 해소되고 비핵화와 미북 관계 개선이 이뤄져야 한반도 문제 해결의 길이 열릴 수 있게 될 것"이라며 "미국의 결단이 문제 해결의 열쇠"이라고 말했다.
그는 통일 과정을 화해‧협력, 남북연합, 통일국가 완성의 3단계로 규정한 '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 현 상황을 대입했을 때 남북은 아직도 1단계인 화해‧협력에 머물고 있다면서, 정치적‧법적 통일은 아니지만 경제‧사회‧문화적으로는 통일된 것과 비슷한 남북연합 단계로 가기 위해서는 남북한과 미국, 중국의 4자 평화회담을 조속히 개최하여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 전 장관은 이러한 맥락에서 "지난 30년의 역사는 한반도 문제가 민족 내부 문제인 동시에 미국이 깊이 개입한 국제문제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남북 간의 노력만으로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라며 미국이 이와 관련해 보다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 전 장관은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당시에도 남북 간 경색국면이 있었지만 △1991년 9월 남북 유엔 공동 가입 △주한미군의 핵무기 철수 선언 △중국의 권고와 북한의 결단 등의 배경으로 협의가 다시 급물살을 타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중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김일성 주석은 그해 10월 6일 즉각 당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여 남북협상을 조속히 타결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나진·선봉 지역에 경제특구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또 국제 핵사찰을 수용하되, 핵 문제를 미국과 수교를 위한 협상카드로 활용하기로 하는 방침을 정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임 전 장관은 당시 남측도 협상 타결을 위한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며 "북핵문제를 기본합의서 채택과 연계시키지 않고 병행하여 해결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또 팀스피리트 한미 연합 훈련도 중지하기로 했다. 북한의 핵사찰 수용을 중시한 미국도 우리 측의 훈련 중지 제의에 동의했다"고 소개했다.
이처럼 당시에는 남북 간 안보 문제에 있어 수용가능한 입장을 제시하고 합의하면서 남북기본합의서라는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합의서 채택 이후 위기도 있었다. 임 전 장관은 "1993년 팀스피리트 군사훈련 재개로 남북고위급회담이 중단됐고 새로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핵을 가진 자와는 악수할 수 없다'며 남북관계는 냉각되고 남북기본합의서는 묵살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렇게 냉각됐던 남북관계는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출범으로 해빙기를 맞게 되고 남북기본합의서도 다시 빛을 보게 됐다"며 "김대중 정부는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을 위한 '햇볕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클린턴 행정부를 설득하여, 한미 공조로 냉전구조를 해체하기 위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했다"고 말했다.
임 전 장관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언급하며 "이 땅의 주인인 우리는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제시한 바 남북관계 개선‧발전‧노력을 통해 미북관계 개선을 견인하고, 한반도 냉전구조를 해체하기 위해 인내심과 일관성을 갖고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주도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남북기본합의서, 보수 적잖은 반발 있었지만 대승적 합의
이날 학술회의를 공동 주최한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은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관계의 역사적 전환점이 된 사건으로 저의 선친, 노태우 전 대통령도 가장 가치있는 인생 업적으로 생각하셨던 일"이라며 "한국의 역대 정부도 '남북기본합의서'를 토대로 남북한 관계에 많은 정책을 통한 실천으로 발전을 거듭해 오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노 원장은 남북기본합의서와 같은 남북 간 합의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한 내 여야 정치권 및 국민적 합의라고 강조했다.
그는 "남북기본합의서 추진 당시에도 대북 강경책을 고수하는 보수의 적지 않은 반발도 있었는데, 당시 정책결정자들은 최종적으로 냉전의 남북관계를 '갈등과 반목'에서 '화해와 협력'으로 전환하는 대승적 결론을 냈다"며 "이는 당시 여야 지도자들이 합의를 통해 이룬 대통합의 결과물"이라고 규정했다.
노 원장은 "결과적으로 여야의 큰 합의는 국민적 지지를 이끌었고, 국민 통합을 기반으로 남북관계의 역사적 결과물도 창출해냈다"라며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되돌아보면, 정치적 이해와 진영 논리를 초월하여 국민과 한반도의 평화와 발전이라는 큰 틀에서 서로 협력해야 한다고 본다"고 조언했다.
그는 "얼마 전 선친을 파주 통일동산에 모셨다"며 "평소의 고인이 가졌던 의지가 작은 불씨가 되어 다시 남북 화해와 교류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길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행사에는 노 원장의 이러한 바람을 반영이라도 하듯 여야 대선 주자들이 축사를 통해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내놨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남북기본합의서는 '대결과 갈등'의 남북관계를 '화해와 협력'으로 전환하는 과감한 정책이었다"라며 "이러한 대승적 결론에 합의한 정책결정자들과 여야 정치 선배님들의 모습을 지금의 정치인들은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노태우 전 대통령께서는 반목과 대결의 남북관계를 극복하고 화해와 협력을 통한 통일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라며 "오래된 냉전 구조의 해체라는 국제질서의 변화를 정확히 예측한 노 전 대통령의 통찰력과 추진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윤 후보는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을 통해 통일을 향한 기틀이 마련됐지만, 지난 30년 동안 남북관계는 많은 부침을 겪어온 게 사실"이라며 "특히 최근 북한의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 핵무기 재개발과 미사일 실험 등 비상식적인 무력 도발이 연이어 발생하며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다"고 말해 남북관계에서 북한의 행태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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