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미양요’ 이후 미 정부의 비밀 외교 및 공식 문서를 중심으로

 

지금으로부터 151년 전인 1871년 ‘신미양요’로 미국과 조선이 최초의 전쟁을 벌인 뒤 2022년 3월 중순 현재까지 미국과 한반도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역사를 어떻게 살피느냐 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것은 눈앞의 현실인 현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미국은 남한에서 고마운 존재, 혈맹관계로 일컬어진다. 미국이 6.25 한국전쟁에 참전해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희생을 당했고 그 이후 미군 주둔에 의해 한반도 안보가 보장이 되면서 한국이 엄청난 경제적, 정치적 기적을 이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견해도 있다.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정책은 신미양요 이래 최근까지 미국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보는 시각에 따라 양쪽 주장에 대한 찬반이 갈리는데 그 판정은 역사적 사실관계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난 70여 년 동안 한미동맹에 대한 문제제기는 국가보안법 처벌 대상이었다.

한미동맹 정상화 당위성 커져

그러다보니 근현대사에서 한미관계에 대한 무식과 무관심이 일반화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동북아를 포함한 세계정세는 한미관계를 정상화시켜야 할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연재는 그런 작업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객관적으로 한미관계 151년을 조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국내에서 한미역사관계에 대해 많은 연구결과 등이 존재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부분에서 자료 부족이나 검증 미흡 탓인지 정확한 사실관계 등이 밝혀지지 않거나 애매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미국이 미화되거나 그들의 과오 등은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 바로잡는 것은 미래의 정상적인 한미관계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한미관계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파악하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신뢰할만한 것은 두 나라의 외교 또는 비밀문서 등의 기록이다. 그것은 대부분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연재는 그래서 미국의 외교 문서나 비밀이 해제된 자료, 미국 공시 문건 등을 토대로 소개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미국 측의 자료를 소개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지만 미국 쪽 자료가 발견되지 않은 제주4.3, 여순사건과 같은 경우 국내의 공신력 있는 기관 등의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원고지 1천 여 매에 달하는 전체 연재 내용은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미국 3.1독립운동 철저히 외면

- 신미양요 이후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에 따라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승인한 사실을 미국 정부 자료 중심으로 소개했다. 미국이 제국주의 후발국가로 동북아에서 이권을 챙기기 위해 일본의 한반도 강점을 인정하는 대가로 필리핀 강점을 챙긴 것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른바 ‘가스라 데프트 밀약’이다.

이 밀약이후 미국은 한‧일 강제병합을 승인하고 3.1운동이 발생하자 서울, 동경 공관에 훈령을 보내 ‘조선인의 독립 운동에 미국이 동조, 지원하는 인상을 절대 주지 말도록 각별히 유의하라’고 했으며 해외 독립 운동가들의 지원 요구 등에 등을 돌렸다.

- 미국이 일본과 태평양전쟁을 벌이면서 일본의 항복 이후 등에 대한 정부 대책이 무엇이었나 하는 것을 비밀 해제된 미국의 자료를 중심으로 소개했다. 미국 정부의 극동부처간지역위원회(IDAFZ)가 그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나타나고 그 밖에 미 국무부, 미국 외교관들의 국무부 보고사항 등이 관련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 자료를 보면 미국은 한반도가 일본에 병합되었다는 사실을 중시하는데 이런 시각은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미국의 태평양 전쟁 종전 이전 한반도 점령 계획은 지극히 단순한 원론 수준에 머물렀다. 미국은 한반도를 연합국과 협의해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하고 일본 항복 이후 한반도 주재 일본군인, 민간인들을 본국으로 송환시킬지 여부 등을 검토했을 뿐이다. 한반도가 일제에 부당하게 강점당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다각도로 투쟁했다는 사실 등은 고려 대상에 아니었다.

미국 태평양전쟁 종전 이전 한반도 정책 주먹구구

- 미국 정부의 태평양전쟁 종전 이후 한반도 점령 대책을 검토한 자료를 보면 전체적으로 미 점령군의 남한 진주 계획은 주먹구구식 수준이었다. 미국 정부나 군부는 연합국과 공동보조를 취하면서 한반도를 전혀 중요시 하거나 주목해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미국은 태평양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소련의 개입을 희망하면서도 소련이 동북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것을 우려했다. 그런 이유로 소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한반도 정책 수립은 기피했다. 미국은 연합국과 함께 일본 항복 시 연합군 참가국들이 점령할 지역을 배정하는 등 전후 계획을 수립했다.

- 미국은 일본의 항복이 임박한 상황에서 핵탄두 실험에 성공하지만 이 사실을 소련에 알리지 않고 일본 두 개 도시를 핵 공격했다. 이는 소련이 유럽에서 승전한 뒤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뒤 관동군을 순식간에 궤멸시키고 만주를 거쳐 한반도 북부까지 진격한 뒤 일본 열도를 점령할 기세를 보이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소련은 미국의 핵무기에 긴장하게 되고 미국이 북위 38도를 소련과 미국의 군대 진출 경계선으로 삼자고 제안하자 수락했다.

- 일본이 항복했을 당시 미군 주력부대는 오키나와에 있었기 때문에 육상에서 군사작전을 펴는 소련의 공격 속도보다 매우 느렸다. 미국 주력부대가 해상으로 일본, 한반도로 이동하려면 시간이 많이 소요될 수 밖에 없었지만 소련은 한반도 전역은 물론 일본 열도를 점령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이었다.

소련이 북위 38도 이남으로 진격하지 않을 것에 동의하자 미국 정부는 1945년 9월 초 미 점령군을 남한에 보내는데 해당 미군 부대는 전투부대로 남한 점령 시 민간행정 부문을 담당할 직원이 전무했다. 심지어 한국어 통역조차 구하지 못해 일본군과 함께 포로로 잡힌 조선인 전쟁포로에게 그 역할을 대신하도록 했다.

-일본 항복 이후 미소는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아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진군했다. 그에 따라 미국 정부는 미 점령군이 한반도 북위 38도선 이남과 일본 열도로 진주하도록 맥아더 장군에게 명령했고 맥아더는 그것을 이행했다.

미국 정부는 당시 한반도에서 일정기간 신탁통치를 실시하고 여건이 되면 독립을 시키기로 다른 연합국과 합의했을 뿐 한반도가 어떻게 독립할지에 대해서는 그 계획이 전무했다.

맥아더, 미국 정부 지휘 받아 일본, 한반도 군정 실시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일본 점령 사령관 맥아더의 지시를 따랐는데 맥아더는 미 대통령, 전쟁부, 합동참모본부의 지휘를 받았다. 사진은 미군 해군본부의 필름사진이며,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군사령관이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당시 MT MC KINLEY(AGC-7)함에서 James H. Doyle 해군소장, E.K. Wright 육군준장, Edward M. 육군 소장 등과 함께 웃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출처 - 전쟁기념관]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일본 점령 사령관 맥아더의 지시를 따랐는데 맥아더는 미 대통령, 전쟁부, 합동참모본부의 지휘를 받았다. 사진은 미군 해군본부의 필름사진이며,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군사령관이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당시 MT MC KINLEY(AGC-7)함에서 James H. Doyle 해군소장, E.K. Wright 육군준장, Edward M. 육군 소장 등과 함께 웃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출처 - 전쟁기념관]

-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일본 점령 사령관 맥아더의 지시를 따랐는데 맥아더는 미 대통령, 전쟁부, 합동참모본부의 지휘를 받았다. 흔히 맥아더를 일본 점령의 주인공처럼 추켜세워 영웅시 하지만 이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 맥아더는 민간 행정경험이 전무한 직업군인이었고 그는 미 정부의 지휘체계에 따라 상부의 지시를 수행했을 따름이었다.

맥아더가 본국 정부로부터 받은 일본 점령 직후의 정책은 남한에도 대부분 그대로 시행되었다. 미국 정부는 한반도를 일본 식민지로 여겼을 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 미국은 연합국과 합의한 신탁통치 방침에 따라 남한에 미군이 진주한 뒤 상해임정이나 일본 항복 이후 자생한 인민위원회 등을 일체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로 여겨 미 점령군이 일본과 남한 지역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 작업을 거의 동일한 원칙으로 수행토록 맥아더에 지시했고 그에 따라 남한에서 일본 총독부 관리가 중용되고 친일세력들이 권력기구로 복귀하게 되었다.

- 남한 점령군이 일본 총독부의 관리, 경찰을 맡았던 친일세력을 원상복귀시킨 것은 미국 정부의 결정이었고 맥아더에 의해 일본과 남한에서 실시된 것이다. 오늘날까지 한국 사회의 과제인 친일 미청산의 원인 제공은 미국 정부이고 이승만이 친일세력이 해방정국의 가장 강력한 권력집단이라는 점을 주목해 친일잔재 온존 정책을 펴면서 그 독기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미국은 다른 연합국과 합의한 대로 남한에서 신탁통치를 실시하기 위해 상해 임시정부나 당시 국내에서 발족한 인민위원회 등을 일체 인정치 않았다. 대신 미 점령군이 최고 결정권자 행세를 하고 친일세력들이 복귀한 일제 공조직을 그 하부 구조로 이용했다.

맥아더는 일본을 소련, 중국 등 공산세력을 저지할 방어지역으로 삼기 위한 점령정책을 펴면서 우익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보정치도 병행했다. 미 정부의 이런 정책은 남한에서도 미 군정기간 동안에 강행되었고 결국 친미적인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강행으로 이어졌다. 미국이 제주 4.3을 소련 등 공산주의 세력의 배후 조종이라는 가짜뉴스를 만들어 친일세력과 함께 무자비한 군사작전을 전개해 제주도민 1/10 정도가 희생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친일파 발호 원천 책임은 미국, 이승만 하수인 격

- 미 군정하에서 권력기구에 충원된 친일 세력이 발호한 것은 미국이 주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되어야 하고 이승만은 그 하수인 역할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이승만과 친일세력의 역사적 범죄가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미군정은 친일세력을 중요하면서 이에 대한 반대를 외면했는데 심지어 친일경찰 청산을 주장한 경찰 간부를 파면하기도 했다.

친일세력이 미군정하에서 해방정국의 권력집단이 되어 민족정기 확립에 역행하는 갖가지 만행을 저질렀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친일경찰이 민족반역자 색출과 처벌을 하기 위해 발족한 반민특위를 습격한 사건이었다. 이에 대한 이승만은 자신의 지시라고 주장하면서 친일세력을 옹호했다.

이승만은 친일청산을 주장하는 사회적 요구에 쐐기를 박기 위해 국가보안법이라는 희대의 악법을 만들었다. 이 악법의 최대 수혜자는 친일파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 미국은 한반도 신탁통치 계획 추진이 난관에 부딪히자 유엔을 통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5.10선거를 강행하려 했다. 이에 반발하는 4.3항쟁과 여순사건에 대해 미군이 진압에 앞장서는데 이는 국제사회에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확인시키려는 의도가 작동한 결과였다. 이승만 정부 수립 직후 주한미군이 철수하지만 미군은 군사고문단을 남겨 남한 군부 등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했다.

- 한반도 현대사 최대의 비극인 6.25 한국전쟁 발발 이전의 동북아 상황을 보면 미국은 소련, 중국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는 전략을 앞세웠고 한반도 정책도 거기에 맞춰져 구체화되었다. 미국은 중국에서 장개석 군을 적극 지원했는데도 불구하고 모택동 혁명이 성공한 후 극동 방어전략을 수정해 ‘애치슨 선언’을 하면서 극동 방어선에서 남한을 제외했다.

미국 한국전쟁 중 대북 대대적 공습, 2차대전 독일 보다 피해 심각

-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태도를 바꿔 유엔을 통해 적극 개입을 하게 되는데 전세를 역전시킨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는 일본인이 다수 참전하고 일본은 한반도 전선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면서 전후 복구의 계기를 얻게 된다. 미국은 한국전쟁이 3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될 것을 우려해 제한전쟁 전략을 적용하고 그 과정에서 맥아더가 해임된다.

- 미국은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대대적인 북한 공습을 벌여 2차대전 독일, 일본 도시 보다 더 심각한 피해가 발생했다. 미국은 만주와 북한 일부지역 등에 핵 공격을 할 계획을 세우다가 중단했다. 1953년 한국전쟁이 정전협정으로 총성이 멈췄으나 그 후 70년 가까이 평화협정은 추진이 안 돼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위험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남아 있다.

- 21세기 한미동맹 현안을 점검할 때 한미상호방위조약 그 문제점, 미국의 대북 선제타격 전략, 전시작전권 전환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이 드러난다. 동시에 유엔사와 ‘유엔사 후방기지’가 한‧미‧일 군사관계의 핵심축이 되고 있는 현실, 미국 대북 군사전략은 유엔 정신을 짓밟는 한반도 집단학살 계획이며 이는 ‘작계 5015’, ‘작계 5026’ 등에 압축되어 있다는 점도 확인된다.

- 미국은 대중국 포위 전략을 우선하면서 미국과 일본, 호주, 인도의 비공식 안보협의체인 ‘쿼드(Quad)’에 한국의 동참을 강권하고 있어 동북아 신냉전이 우려된다.

미국은 한반도 비핵화 정책을 미국식 논리로만 추진하겠다고 고집할 뿐 평화협정 체결 등은 후순위로 미루고 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 유엔 제재 등을 통해 마른 수건에서 물을 짜내듯 압박을 가하고 있는데 국방비를 비교하면 북한 보다 미국은 216배, 남한은 30배 많다.

동북아 신냉전 등장 시기, 친미와 반중 외치는 대통령 등장 우려

- 세계 군사력 최강국가 미국과 군사력 6위 한국이 맺고 있는 한미동맹은 미국이 슈퍼 갑이라서 한반도의 예속상태가 심각하다. 미국은 2018년 남북 정상간 교류협력 시행을 중단시키는 등 한미동맹의 역기능이 심각해지고 있다. 한반도 평화통일과 동북아의 평화, 안정을 위해 한국의 군사적 자주권 회복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등장했다.

한국은 세계 경제력 10위 등으로 상징되는 국제적 위상에 걸맞는 국가답게 군사적 주권을 회복해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의 평화와 안전에 자주적 역량을 발휘해야 할 비상한 국면에 처해 있다. 이런 중차대한 시점에 친미와 반중, 반북을 외치는 인사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대단히 우려되는 상황이다.

 

고승우 언론사회학 박사

언론사회학 박사/ 전 민언련 이사장/ 6.15남측위 언론본부 정책위원장/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 전한성대 겸임교수/ 전 한겨레신문 부국장 / 2020년 11월 제2회 민족일보 조용수 언론상 수상 · 제26회 통일언론상 특별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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