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군대가 철퇴한 이후 하기 제 정당 단체들은 공동 명의로서 전조선 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조선 인민의 각층 각계를 대표하는 민주주의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 국가의 일체 정권은 정치, 경제, 문화생활의 일체 책임을 갖게 될 것이다.”
1948년 4월 30일 남북의 16개 정당과 40개 단체는 ‘전조선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 결과를 담은 공동성명서를 발표, ‘외국군대 즉시 철거’, ‘내전 발생, 여하한 무질서 발생 허용하지 않을 것’, ‘통일적 민주정부 수립’ 등을 주창하며 이같이 밝혔다.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4월 30일 오후 2시 경기도 파주시 민족화해센터 대강당에서 개최한 ‘남북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및 남북요인회담 74주년 기념 특강’에서 “분단을 막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써 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남북협상)이 열렸다고 강조했다. 특히 ‘내전 발생’에 대한 심각한 우려도 있었다고 짚었다.
서중석 명예교수는 당시 남북요인들의 전쟁과 분단의 위기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 백범 김구의 ‘3천만 동포에게 울며 호소함’(48.2.10)을 예시했다. “제3차 전쟁은 온양되고 있다... 인류의 양심을 가진 자라면 누가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바랄 것이랴!... 마음 속에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에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이북에 가고 싶다.”
김구는 소원 대로 38선을 넘어 남북연석회의와 남북협상에 참석했고, 우사 김규식도 뒤늦게 방북해 남북협상에 참석, 4월 30일 남북지도자협의회의 공동성명서가 발표될 수 있었다.
서 교수는 “1945년 8.15해방부터 1948년 8,9월 남북에 분단 정부가 들어서기까지 남과 북의 주요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남북협상 뿐이었다”며 “남북협상마저 없었더라면 한국인은 분단을 막기 위하여 어떠한 노력을 하였느냐고 물었을 때 무어라고 답변할 수 있을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남북지도자회의는 민중이 열망한 바였다”며 “한국은 한 번도 분단된 역사가 없다. 분단된다는 게 머릿속으로 상상이 안 가는 거다”라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특히 “분단은 국제전 같기도 하고 내전으로도 보이는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을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으로 예견되었다”며 “1948년 3,4월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글들을 보면 대부분이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고 짚었다.
서 교수는 “남북지도자회의는 민족의 대단결에 의하여 외세의 간섭을 막고 민족문제를 풀려고 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의가 있다”며 “한반도처럼 외세의 영향이 강한 지역에서 민족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한 것은 중시되어야 할 것”이라고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과 나란히 자리매김했다.
그는 “1948년 4월회의는 반세기가 되도록 다른 형태로라도 그 열매를 맺었어야 한다”며 “2000년 여러분이 잘 아는 6월 남북정상회담으로 결실을 맺었다”고 말했다.
그 증거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전후 미‧중‧일‧러 주변 4강이 보인 달라진 태도를 들었다. 그해 5월 한‧중 수교로 소원했던 북‧중 간에 정상회담이 열렸고, 7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방북해 북‧러 정상회담이 개최됐으며, 10월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하고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추진했으며, 일본은 대북 쌀지원을 약속하고 2002년 9월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이 성사됐다는 것.
그는 특강 발표문에서 “2018년 4.27, 5.26 남북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이루어진 것은 단순히 비핵화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며 특히 5.26 판문점회담에 대해 “남과 북이 4강의 양해나 동의, 승인 없이, 사전 상의 없이 만났다”며 “남북이 4강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 상의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4강에 대한 정치력을 최대한 높일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특강 사회를 맡은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내년도가 75주년이라 민간 차원에서도 정말 제대로 남북 요인회담을 하려고 했다”며 “북한 대표단이 와서 여기서 함께 해야 된다.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꿈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면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고 대선 결과에 아쉬움을 표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가 주관한 이날 특강에는 지부 회원들과 김규식 손녀 김수옥 여사와 심산 김창숙 외증손자 김태욱 씨 등이 참석했다.
참가자들은 인지난해 6월 장항습지에서 발목지뢰 피해를 당한 김철기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 전 지부장근 파주시 탄허면 통일동산의 ‘장준하 공원’과 묘소를 찾아 둘러보고 참배했다. 파주시 천주교 나자렛공동묘원에 있던 장준하 묘소는 2012년 수해를 입어 통일동산으로 이장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두개골에 크게 함몰된 구멍이 확인되기도 했다.
지난해 6월 장항습지에서 발목지뢰 피해를 당한 김철기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 전 지부장은 “분단의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인가 정말 몸으로 직접 느꼈다”며 “분단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서, 통일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불편한 몸이지만 한걸음 더 나가서 평화의 길을 가기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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