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죽음 막을 수 없었나…매일 곱씹으며 ‘그날’을 산다”
영상 26도. 5월4일 전국이 이상고온으로 초여름 뜨거운 날씨였지만, 변수정(가명·40)씨는 아직 ‘영하 1도’ 그날에 갇혀 있다. 아버지가 응급실에 실려 간 2월15일. 수정씨는 그날이 정말 추웠다고 회상했다. 뇌수두증(뇌척수액이 고여 신경을 압박하는 질환)을 앓고 있던 아버지와 6개월에 한번 진료를 위해 서울대병원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진료를 마치고 광주 집으로 돌아오던 차 안에서 아버지가 갑자기 경련을 일으켰다. 수정씨는 곧장 119에 신고했다. 늦지 않게 구급차가 왔지만 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지 못했다. “119는 왔는데 아버지 체온이 38.6도인 거예요. 열이 있으면 일반 응급실로는 이송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119 구급대원이 20∼30분간 격리 응급실을 수소문한 뒤에야 변씨의 아버지는 겨우 충북의 한 병원 응급실로 이송될 수 있었다. 코로나19 검사 결과 양성이었다.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가 우세종으로 자리잡으며, 매주 신규 확진자가 2배씩 뛰던 때였다. 이후 아버지는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수정씨가 아버지 변동범(72)씨를 다시 만난 건 한달 뒤인 3월15일, 광주의 한 대학병원 중환자실이었다. “저와는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코로나 유족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왜 돌아가셔야 했던 걸까요? 코로나19 전담병원을 믿고 아버지를 보낸 저희 잘못일까요?” 두달이 지났지만 지난 4일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수정씨에겐 여전히 모든 것이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2월3일부터 ‘오미크론 대응체계’로 정부의 방역방침이 달라졌지만, 만 60살 이상 고령에 기저질환자였던 수정씨 아버지는 원할 경우 입원이 가능했다. “응급실을 찾지 못해 아찔했던 기억을 떠올리니 병원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더라고요.” 수정씨네 가족은 보건소에 병상 배정을 요청했고, 수차례 전화를 건 뒤에야 ‘코로나19 전담요양병원’ 병상을 배정받았다. 요양병원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전담병원’이니 재택치료를 하는 것보단 나을 거라 생각했다. 2월16일 아버지는 홀로 요양병원 차량을 타고 병원으로 떠났다.
병원에 들어간 순간부터 아버지와 연락이 어려웠다. “끊자.” 이틀 만에 통화를 나눈 아버지는 거친 숨소리로 통화조차 버거워했다. 열이 있긴 했지만 집에선 건강이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아빠 집이 더 편해? 거기 괜찮아?” 수정씨의 물음에 아버지는 “집에…”라고 힘겹게 말했다. 하지만 수정씨는 선뜻 아버지를 퇴원시킬 수 없었다. “집으로 가시면 다시 입원해서 코로나19 치료는 받지 못하세요.” 보건소 직원의 말이 수정씨의 발목을 잡았다. 2월19일 요양병원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호흡·의식이 없으십니다. 상급병원 중환자실로 지금 이송합니다.”
기도삽관 뒤 곧장 혈액검사가 시행됐다. 폐렴에 의한 패혈증 쇼크뿐 아니라, 탈수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3∼4일 뒤 의식이 깨어났지만 스스로 가래를 뱉지 못해 기도삽관과 기관절개를 반복했다. 코로나치료제로 혈전이 생겨 심장에 스텐트 시술도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코로나19 감염 한달 만인 3월15일 세상을 떠났다. “병원에 전화하면 요양병원 간호사는 잘 지낸다고 했어요. 어떻게 하루이틀 만에 상황이 이렇게 나빠질 수 있는 거죠?”
추후에 의무기록을 떼고서야 안 사실이지만, 요양병원은 기존에 먹던 약 외에 아버지에게 따로 항생제나 해열제 등을 처방하지 않았다. 의무기록에는 ‘2미터 간격 두고 컨디션 체크함’ 등의 기본적인 상태 확인만 이뤄진 걸로 돼 있었다. “코로나 전담병원이라면, 폐사진을 찍고 해열제를 처방해주는 식의 매뉴얼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수정씨는 초기에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건 아닌지 의료 소송을 알아보고 의료분쟁조정위원회 상담도 진행했다. 해당 요양병원은 광주시청을 통해 “환자가 기존에 복용 중인 약을 가져와 별도의 치료약 처방은 없었으며, 수시로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는 입장을 보내왔다. 시청 역시 “코로나19 환자 조치에 대해서는 의료진의 의학적 판단에 따라 처치와 처방이 이뤄지는 전문영역이므로 시에서 직접 관여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숨진 아버지가 병원에 가지고 간 약은 뇌수두증 치료를 위한 신경과 약이었다. 코로나 전담병원에서 숨진 변동범씨는 감기약 한번 먹어보지 못하고 숨진 것이다.
수정씨 아버지가 입원한 요양병원은 2021년 1월 전담병원으로 지정됐다. 광주시 코로나19 담당 공무원은 “코로나 초기 의원들의 참여가 적어 인프라가 잘 갖춰지지 않은 곳도 (지정이 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수정씨 가족의 의료 소송을 검토한 의료전문변호사는 “요양병원 등에 계시다가 상태가 악화되고 전원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과정이 매끄럽지 못한 게 사실이지만, 의료기관에 직접적인 책임을 묻거나, 국가 과실로 책임을 묻기가 까다롭다”고 설명했다.
임종이 임박했던 3월15일 병원은 ‘3분의 면회’를 허락했다. 정부는 ‘코로나19 감염 뒤 7∼8일 지나면 바이러스 배출이 사실상 이뤄지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확진 7일 뒤면 별도의 유전자증폭(PCR) 검사 없이 격리 의무가 해제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병원은 수정씨 가족이 아버지의 손을 잡는 것조차 막았다. “병원에서 좀 더 큰소리를 쳐도 됐었고, 면회도 조금 더 하겠다고 우겨도 됐었는데… 너무 순종적이었던 것 같아서 후회스러워요.” 수정씨는 삶에서의 마지막 한달을 홀로 보내야 했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코로나19는 아버지의 마지막을 끝까지 괴롭혔다. 변동범씨가 숨진 3월 중순은 이미 ‘선 화장 후 장례’ 조치가 폐지된 뒤였지만, 현장 상황은 달랐다. 화장장은 주검을 목욕시키고 의복을 입히는 ‘염습’을 거부했다. 수정씨 아버지는 수의도 입지 못한 채 숨진 다음날 한줌의 재가 됐다. 변동범씨가 숨진 다음달인 4월4일 중앙방역대책본부는 “현재까지 시신을 통해 감염된 사례나 증거나 없다는 게 세계보건기구(WHO)의 입장”이라며 염습 과정 중 추가 전파 가능성을 일축했다.“
(중환자 격리 해제 기준인) 20일을 넘겼으니, 코로나19 환자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격리 기간 이후 사망을 한 거라 이후 병원비도, 장례 지원금도 받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한달간의 입원도, 임종도, 장례도 다 코로나19였지만 정부는 변동범씨가 더 이상 코로나19 환자가 아니라고 했다. 수정씨는 아버지가 사망 시까지 격리되었기 때문에 기간을 인정해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보건소는 “20일이 지침”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보건소 쪽은 <한겨레>가 시청 등 취재에 나선 뒤인 13일 변동범씨의 격리 기간을 변씨가 숨진 3월15일까지로 변경했다.
사회는 코로나19를 잊어가지만, 수정씨 가족은 아직 코로나19가 남긴 상흔 속에 살고 있다. 2월15일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았다면 서울대병원에 갔을 때 아버지의 고열을 알아챌 수 있었을까… 수정씨는 매일 아버지의 죽음은 정말 막을 수 없는 일이었는지 곱씹어본다. “우리 아빠가 몸에 암이 생겨서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갑자기 방역이 완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확진된 거잖아요. 그 이후 아무 지원조차 해주지 않는 게 정말 야속합니다.” 아버지 없는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계절은 바뀌어가지만, 코로나19가 끝날 때까지 수정씨는 겨울일 것만 같다. 점점 더 날은 뜨거워질 테지만, 수정씨는 여전히 영하 1도의 그날에 살고 있다.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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