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민 / (사)평화의길 사무처장

 

평화의길, 통일의길, 평화철도,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AOK 등 다양한 통일운동 단체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해왔던 정용일 전 [민족21] 편집국장이 9월 4일 뇌출혈로 쓰러져 9월 6일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고인이 참여했던 단체들을 중심으로 ‘통일운동가 고 정용일 동지 민주사회장’으로 치렀고, 고인은 9월 8일 오전 11시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됐다. 1980년대 대구지역 학생운동 시절부터 고인과 인연을 맺어 민족21과 평화의길에서 함께 활동해온 안영민 평화의길 사무처장(전 [민족21] 대표)이 고인을 추모하는 글을 보내왔다. / 편집자 주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치된 정용일 전 [민족21] 편집국장. 묘역 영결식 참가자들이 함께 모였다. [사진제공-안영민]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치된 정용일 전 [민족21] 편집국장. 묘역 영결식 참가자들이 함께 모였다. [사진제공-안영민]

“형이 쓰러졌어요. 아무런 의식이 없어요. 어떡하면 좋아요.”

9월 4일 저녁 7시 30분, 전화기 너머로 통곡하며 외치는 정면(전 [민족21] 디자이너)의 목소리였다. 가슴이 쿵 했다. 119 구급대의 다급한 목소리도 함께 들렸다. 급히 집에서 나와 차를 몰았다. 그새 ‘은평성모병원으로 가고 있어요’라는 문자가 떴다. 우선 전대협 시절 용일 형과 함께 활동했던 정명수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말하고 빨리 병원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빗속을 어떻게 운전해서 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휴일 저녁에 전해온 뜻밖의 비보(悲報)

8시 40분 은평성모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하지만 보호자 1인 외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발만 동동 굴렀다. 잠시 후 환자가 워낙 위급한 상황이다 보니 한 사람 더 들어와도 좋다고 했다. 그렇게 들어간 응급실 안에서 넋이 나가 울고 있는 면이를 만날 수 있었다.

곧이어 담당 의사가 나왔다. 현재로선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했다. 출혈이 심하고, 발견된 시간도 많이 늦었다고 했다. 의학적으로는 ‘뇌사’ 상태라는 것이다. 지금 바로 수술을 한다 해도 의식이 돌아올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연명 치료를 할지 말지 결정해달라고 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족들도, 친척들도, 친구들도, 동지들도, 그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비보(悲報)였다. ‘평화의길’ 사무실에서 거의 매일 얼굴을 맞대며 함께 했는데, 불과 며칠 전에도 막걸리 한 잔 하며 통일운동 진로와 평화의길 사업방향을 토론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눈앞에서 벌어질 수 있는지…….

울고 있는 면이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잠시 밖으로 나와 정명수 형과 상의했다. 이미 손을 쓸 수 없다는데, 수술도 연명 치료도 결국 형에게 더 큰 고통만을 안겨줄 뿐이다……. 냉정한 현실을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응급실로 들어가 면이를 만났다. 어렵사리 상황을 설명했다. 그 순간 쌍둥이 오누이 여산이, 여운이가 떠올라 북받치는 울음을 참기 힘들었다.

병원의 안내를 받아 형이 누워 있는 응급 병동 중환자 병실로 들어갔다. 형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곁에서 불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간혹 몸을 뒤척였지만 무의식의 반응일 뿐이었다. 면이와 함께 형의 손발을 주무르며 계속 말을 걸었다. 하지만 형은 잠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우리는 떠나보낼 준비가 전혀 안 돼 있는데……

면이가 자꾸만 자책했다. 오후 3시 10분쯤 볼일이 있어 외출하고, 형이 쌍둥이를 돌보고 있었단다. 저녁 6시쯤 형에게 전화를 했는데 통화가 안 됐단다. 아이들을 돌보느라 전화를 못 받나 싶었단다. 7시 10분쯤 집에 돌아와 보니 형은 침대 아래 누워 있었단다. 그때는 그냥 잠이 들었나보다 싶었단다.

아이들한테 “아빠 깨워.” 했더니 “아빠가 안 일어나.”라고 했단다. “그럼 아빠 다리를 밟아서라도 깨워.” 했는데, “엄마, 그렇게 했는데도 안 일어나.”라고 했단다. 그래서 형을 깨우러 와서 보니 그때서야 의식을 잃은 채 쓰러진 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형이 집에서 언제 쓰러졌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쓰러진 아빠를 아이들은 잠을 잔다고 생각했던 것이고.

“내가 집에 있었다면……. 내가 외출하는 바람에…….”

고인과 가족들의 단란한 시절. [사진제공-안영민]
고인과 가족들의 단란한 시절. [사진제공-안영민]

끝없이 자책하는 면이를 우선 달랬다. 함께 형 곁에 앉아 손발을 주물렀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형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새벽 1시, 형은 결국 면회가 차단된 중환자실로 이송됐다. 병원을 나서며 생각했다. 형을 이렇게 보내야만 하나. 기적은 정말로 일어날 수 없는 걸까. 우리는 그 누구도 형을 떠나보낼 준비가 전혀 안 돼 있는데…….

형의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쓰러진 다음날인 5일 저녁부터 전반적인 수치가 모두 떨어지기 시작했다. 언제든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상태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장례식을 생각했다. 하지만 차마 이 말을 면이에게 꺼낼 수가 없었다. 이제 겨우 일곱 살인 여산, 여운 쌍둥이 남매. 아버지의 죽음이 뭔지 실감할 수도 없는 아이들. 이 아이들이 어찌 상주가 되어 장례를 치를 수 있단 말인가. 형을 아는 우리가, 남은 동지들이, 그의 마지막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주 노릇을 내가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형이 참여했던 여러 단체들, 평화의길, 통일의길, 평화철도,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전대협동우회……. 각 단체로 급히 연락했다. 오늘밤이 고비라고, 만약 형이 세상을 떠난다면 우리가 함께 장례를 책임져야 한다고. 그렇게 해서 각 단체에서 모인 책임자들이 장례위원회의 얼개를 짜고 바로 실행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다.

밤 12시가 넘어 후배가 잡아준 숙소에서 자리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태풍이 몰고 온 비바람이 대지를 적시고, 슬픔의 눈물이 밤새 내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 다시 병원으로 갈 준비를 하는데 7시 15분쯤 면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상태가 심각하니 빨리 중환자실로 올라오라고 통보가 왔다는 것이다. 서둘러 병원에 도착했다. 하지만 중환자실로 올라가는 사이, 형은 사랑하는 가족과 동지들을 남겨두고 끝내 눈을 감고 말았다. 7시 36분이었다.

심장이 멎은 형의 모습을 눈물로 지켜봤다. 어린 아이들을 두고 떠나는 심정이 과연 어땠을까.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슬퍼할 새가 없었다. 바로 SNS에 공지를 올리고, 장례위원회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면서 장례식장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분주하게 연락을 취했다. 전날 밤 미리 기사를 작성해둔 연합뉴스 이충원 기자도 빠르게 부고 기사를 올려주었다. 그렇게 장례식 첫날이 시작됐다.

대대협의 ‘정차’

대학시절 동료들과 함께 봉화에서. [사진제공-안영민]
대학시절 동료들과 함께 봉화에서. [사진제공-안영민]

내가 형을 처음 만난 건 대구에서 학생운동을 할 때였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후배들은 형의 이름도, 출신 학교도 몰랐다. 그저 우리에게는 ‘정차’ 형이었다.

‘정차’라는 별칭의 내막은 이랬다. 1987년 6월항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8월 19일 전국적 규모의 학생조직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결성됐다. 이에 발맞춰 대구에서도 대구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대대협)가 결성됐다. 이때 용일 형이 맡은 직책이 대대협 정책차장이었다. 그래서 붙은 별칭이 ‘정차’였다.

정책국장도 아닌 정책차장, 하지만 형은 당시 대구지역 학생운동을 총괄하는 지도핵심이었다. 외형적으로는 총학생회와 총학생회장이 운동의 지도부였지만, 이들을 배후에서 지도하던 비공개 핵심이 바로 ‘정차’ 형이었던 것이다. 형은 1986~87년 당시 학생운동의 비공개 핵심조직이었던 ‘반미청년회’의 회원으로 대구지역의 조직사업을 총괄하고 있었다. 반미청년회는 1986년 10월 애학투련 사건(소위 건대항쟁)을 겪으며 기존 써클 중심의 운동 방식을 극복하고 학생회 중심의 새로운 대중운동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던졌다. 형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대구지역에 적극 전파했다. 학생운동의 대중화를 위한 새로운 길을 앞장서 열어나간 것이다.

1980년대 말 대대협 시절의 '정차' 정용일 [민족21] 편집국장. [사진제공-안영민]
1980년대 말 대대협 시절의 '정차' 정용일 [민족21] 편집국장. [사진제공-안영민]

대대협 시절 형은 정책은 물론 연대사업까지 책임졌다. 전대협 중앙과 대대협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면서 대구지역의 주요 대학은 물론 중소 규모 대학과 경북 지역 대학, 나아가 전문대까지 포괄하면서 정열적으로 조직사업을 펼쳐 나갔다. 그 결과 대구지역 학생운동은 질적 양적으로 성장해나갔다. 1989년 대대협이 대구경북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대경총련) 준비위원회로 발전해나갈 때, 대구는 물론 경산, 구미, 안동, 경주 등 대부분 대학에서 학생회를 세워 내고 학생운동의 핵심조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여기에는 각 대학을 돌며 조직사업에 몰두했던 형의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후배들은 학생회실에서 함께 막걸리를 마시며 정세를 토론하고, 새벽이 되어서야 의자를 붙여놓고 새우잠을 청하던 ‘정차’ 형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한다. 형은 사상과 이론 문제에서 막힘이 없었다. 또한 후배들의 어떤 고민이든 풀어주고 질문에 답해주었다. 이런 형을 우리는 ‘정차’ 형이라 부르며 참으로 믿고 따랐다.

1989년 말부터 형은 조직사업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활동을 하나둘씩 정리했다. 형의 신원을 확인하고 추적해 들어오는 공안당국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시작된 수배생활은 1994년까지 이어졌다. 김영삼 문민정부 들어서고도 한참 후에야 형에게 내려진 수배조치는 해제됐다. 1995년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된 형은 서른두 살의 나이로 뒤늦게 군에 입대했다. 너무 많은 나이 때문에 당시 방위제도가 없어지고 새로 만들어진 공익요원으로 발령받았다. 형은 계명대 뒷산인 와룡산의 산불감시원으로 복무하며 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민족21]의 ‘정국장’

2000년대 중반 [민족21]에 근무하던 시기 동료들과 함께(가운데가 고인). [사진제공-안영민]
2000년대 중반 [민족21]에 근무하던 시기 동료들과 함께(가운데가 고인). [사진제공-안영민]

1994년 봄, 나는 1993년 8월 창립한 전대협동우회의 지역모임인 대구경북지역동우회 조직을 위해 몇 년 만에 정차 형을 만날 수 있었다. 나 역시 1991년 경북대 총학생회장 활동으로 수배를 받아 경찰에 쫓기면서 형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수배 해제 이후 다시 만난 형과 지역 활동에 대한 전망을 세우는 것도 잠시, 나는 그해 6월 구국전위 사건으로 구속되고 말았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나는 형과 다시 오랜 시간 떨어져 있게 됐다.

1996년 가을에 출소한 나는 가족이 있는 서울에 눌러앉았다. 형의 소식은 간간이 다른 사람을 통해 듣는 정도였다. 2001년 봄, 민족21이 창간된 후 형은 누구보다 반가워했다. 6.15선언 실천에 꼭 필요한 사업이라고 적극 환영했다. 그러면서 통일언론의 필요성과 지속가능성을 볼 때마다 강조했다. 그러다 2002년부터는 민족21의 대구지사장을 맡아 민족21 보급과 열독 운동에 앞장섰다.

2003~2004년 무렵 나는 통일운동의 새로운 방식과 내용을 모색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형을 몇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당시 민족21 기자인 내게 형은 “통일운동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남쪽 민중들이 북에 대한 객관적인 현실에 눈을 뜰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방북취재의 물꼬를 튼 민족21이 북을 왕래하고 교류하면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해줘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런 형에게 나는 “형도 민족21에 힘을 보태 달라.”고 요청했다. 우선은 민족21에서 교정 아르바이트라도 해달라고 제안했다. 형의 실력을 알고 있었기에 비록 아르바이트이지만 젊은 후배 기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것이 인연이 돼 민족21 사무실을 자연스럽게 드나들었던 형은 2006년부터 취재부장을 맡아 민족21에 공식 합류했다.

민족21은 형에게도 꼭 맞는 옷이었다. 학생운동 시절부터 다독가였던 형은 정세를 바라보는 눈이 남달랐고, 특히 북에 대한 이해가 탁월했다. 민족21 시절 형은 묵직한 인터뷰 기사를 도맡았다. 문정인, 정세현, 임동원 등 당대의 남북관계 전문가들과 진행하는 인터뷰에서 형은 인터뷰이들과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또한 깊이 있는 질문 속에 수준 높은 대담을 진행했다. 그런 과정 속에 2009년부터는 편집국장을 맡아 민족21을 진두지휘해나갔다.

진심을 다해 존경했던 사람, 안재구

2020년 7월 ‘통일애국지사 고 안재구 선생 민주사회장’ 장면. 고인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안재구 선생 추도식에서 사회를 봤다. [자료사진-통일뉴스]
2020년 7월 ‘통일애국지사 고 안재구 선생 민주사회장’ 장면. 고인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안재구 선생 추도식에서 사회를 봤다. [자료사진-통일뉴스]

형과 내게 시련이 닥친 것은 2011년 7월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은 ‘조선로동당 정찰총국 지령 받아 종북잡지를 발행해왔다’는 얼토당토않은 간첩 혐의로 민족21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국정원의 표적은 당시 편집주간이었던 나와 편집국장이었던 형이었다. 하지만 국정원의 수사는 흐지부지되었다. 나는 회합통신 혐의로 기소됐지만 7년의 재판 끝에 집행유예 형으로 끝났고, 형은 기소조차 되지 않은 채 수사가 마무리됐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당시 국정원의 수사기록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안재구 교수가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을 수 없어서 대신 오랫동안 검증해온 정용일을 조직사업의 후계자로 삼고 지도해왔다.”

실로 어처구니없고 실소가 나오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민족21에서 일하던 당시 형은 나의 아버지인 안재구 교수를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이유는 형이 20대 시절부터 진심으로 존경해왔던 안재구 교수의 회고록을 써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남로당 문제부터 전쟁 이후 남쪽의 변혁운동이 어떻게 뿌리를 잃지 않고 버텨냈는지, 4.19 직후 다시 혁신운동으로 부활하는 과정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인혁당, 남민전으로 이어지는 대구지역 변혁운동의 생생한 역사를 형은 아버지로부터 듣고 싶어 했다.

그런 기대 속에 여러 차례 만나 식사도 하면서 아버지의 증언을 들었던 것이다. 이를 국정원은 마치 두 사람의 관계가 무슨 조직적 관계라도 되는 양 의심의 눈으로 감시해왔고, 2011년 7월 안재구 교수와 아들인 나, 그리고 정용일을 엮어서 조직사건을 터뜨리려고 했던 것이다.

형은 안재구 교수의 평전 작업을 본인의 일생 목표로 세웠지만, 민족21 사건으로 그 목표는 중도에 꺾여야만 했다. 2016~17년 뒤늦게 인터뷰를 재개하며 다시 작업을 시작했지만, 이때는 안재구 교수의 건강이 급속히 나빠지면서 인터뷰를 지속하지 못했다. 그 뒤로는 형도 건강이 나빠지면서 작업은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이제는 인터뷰 자료만 남겨 놓고 아버지도 형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다시 '평화의 길'에서 심장이 뛰다

마석 모란공원 묘역에서 열린 고인의 영겷식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는 명진 스님. 고인은 명진 스님이 이사장으로 있는 '평화의 길'에서 함께 일했다. [사진제공-안영민]
마석 모란공원 묘역에서 열린 고인의 영겷식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는 명진 스님. 고인은 명진 스님이 이사장으로 있는 '평화의 길'에서 함께 일했다. [사진제공-안영민]

민족21 이후 형과 내가 다시 한 공간에서 만난 것은 ‘평화의길’에서다. 민족21은 국정원 압수수색 사건 여파로 2013년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 당시 질질 끄는 재판에 시달리던 나는 집에서 육아에 몰두하며 칩거 중이었다. 형은 형대로 악화된 건강을 돌보며 새로운 진로를 모색 중이었다. 나의 칩거는 아버지의 건강 악화로 점점 길어졌다. 형의 모색 또한 2013년 결혼과 2016년 쌍둥이가 태어나면서 단편적이고 분절적으로 흘러갔다.

그러던 우리의 가슴을 다시 들끓게 만든 것은 2018년 4월 27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었다. 6.15선언과 10.4선언의 뒤를 이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합의한 4.27선언은 새로운 통일정세를 예고했다.

우리의 심장도 새롭게 뛰기 시작했다. 민족21은 비록 문을 닫았지만 새로운 통일정세 앞에서 우리는 새로운 역할을 찾아야 했다. 그런 마음들이 명진 스님을 중심으로 다시 하나로 뭉쳤다. 명진 스님은 민족21의 발행인으로 오랫동안 우리를 이끌어주셨던 분이다. 물욕과 권력욕으로 만신창이가 된 불교계를 비판해왔던 개혁적인 불자들도 명진 스님을 중심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이들이 마음을 하나로 모아 만든 것이 바로 ‘평화의길’이었다.

2018년 11월 5일 창립한 ‘평화의길’은 4.27선언과 9.19선언의 실천대오였다. 우리는 지난 시절 평화통일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대중적 평화통일운동, 일상적 평화통일운동을 추구했다. ‘내 마음의 평화, 우리 이웃의 평화, 한반도의 평화’라는 모토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향이자 좌표였다.

여러 단체의 각종 ‘위원장’을 맡다

10년 가까운 칩거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온 나와 달리 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새로운 방식과 내용의 평화통일운동을 고민해오고 있었다. 평화의길 이전에 통일의길 결성에도 적극 참여해 교육위원장을 맡았고, 평화철도 결성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해 사무처장을 거쳐 정책위원장을 맡았다.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에서도 도원결의한 창립멤버로 홍보위원장을 맡았다. 해외동포들의 새로운 통일운동 조직인 AOK에서도 기획위원장을 맡아 적극 참여했다. DMZ생명평화누리동산에도 힘을 보태 통일교육사업단에 참여했다.

이처럼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는 사양하지 않고 겹치기로 출연했다. 여러 단체에서 진행하는 강연과 토론회, 세미나와 발표회에서도 토론자가 아니면 사회자로 참여했다. 그러면서 기자 출신답게 각종 매체에 기고 활동도 등한시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쪼개며 활동하는 동안 건강이 서서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몸이 버티기 힘든 상황이 되면 몇 달씩 요양하기도 했다. 그러다 몸이 회복되면 다시 활동에 나서는 일이 반복됐다. 모임이 잦아지면서 술 약속도 많아졌다. 독주로 과음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막걸리 한두 통에도 후유증은 계속 쌓이는 법이다.

2022년 들어 형의 건강은 다시 악화됐다. 2월에 강제로 끌고 가다시피 해서 대형병원에서 종합검진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진료 의사는 “무조건 술을 끊고 활동을 중단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형에게 진심으로 충고했다. 딱 석 달만 활동을 중단하고 건강 회복에만 집중해보자고 했다. 형은 나의 충고대로 따라줬다.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에 들어갔다. 종종 연락을 해보면 새로 이사한 집에서 쌍둥이 챙기면서 푹 쉬고 있다고 했다. 면이에게 연락을 해봐도 “형이 술도 끊고 건강에 부쩍 신경을 쓴다.”며 달라진 형의 모습을 전해주었다. 몇 달 후 만난 형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한눈에도 건강이 많이 좋아진 듯 보였다.

징검돌 하나 놓고 사라지는 삶이라지만……

그런데 그게 독이었다. 아마도 7월부터였을 게다. 몸이 좀 좋아졌다 싶으니 다시 밀린 숙제하듯 활동을 벌여 나갔다. 약속이 늘고, 자연스레 술자리도 많아졌다. 한두 잔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술자리가 점차 길어지는 경우가 잦았다. 그때 독하게 말렸어야 했다. 이럴 거면 다신 안 보겠다고 소리라도 쳤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내가, 또 우리가 그 때문에 지금 얼마나 통탄하고 있는지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형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평화의길을 창립할 당시 우리는 기쁨과 희망에 들떴다. 새로운 평화의 길, 통일의 길에서 다시 우리의 열정을 불살라보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기쁨과 희망이 사그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북 정상의 합의가 수포로 돌아가고, 문재인 정부의 무능과 무기력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우리의 가슴도 어디 한 곳이 턱 막힌 것만 같았다.

특히 윤석열이라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자가 대통령이 되고나서부터는 형도 나도 깊은 침묵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아픔이 어찌 쉽게 가실 수 있으랴. 아무리 뛰어난 운동가라도 그 역시 희로애락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다. 힘들고 괴로운 건 마찬가지다.

그래서 더욱 슬프다. 정용일, 그가 품었던 이상이 너무 숭고했기에 슬프다. 그가 발 딛고 있었던 현실이 너무 척박했기에 슬프다. 운동가의 삶이 당대에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징검돌 하나 놓고 사라지는 생이라지만, 그래도 늦은 결혼으로 오십이 넘어서야 느꼈던 행복, 일곱 살 쌍둥이의 재롱을 보며 시름을 달래던 그런 소박한 행복조차 더 이상 누릴 수 없다는 현실이 슬프다. 그래서 정용일, 그를 떠난 보낸 오늘이 아주 오래도록 우리의 주변을 맴돌며 우리를 끝없이 지켜볼 것만 같다.

“평화로운 통일세상, 아빠 대신 우리가 이루어줄게”

9월 7일 여의도 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통일운동가 정용일 동지 민주사회장’ 추도식 장면. 수많은 지인들이 빈소를 찾았다. [자료사진-통일뉴스]
9월 7일 여의도 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통일운동가 정용일 동지 민주사회장’ 추도식 장면. 수많은 지인들이 빈소를 찾았다. [자료사진-통일뉴스]

태풍은 물러가고 있었지만 추석을 코앞에 두고 장례식을 준비하며 걱정이 태산 같았다. 형이 마지막 가는 길, 그래도 쓸쓸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하지만 기우였다. 빈소가 차려진 첫날 오후부터 형의 동지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형이 참여하고 있었던 여러 단체의 선후배들과 전대협, 대대협 시절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 형의 죽음을 가슴아파하는 수많은 지인들이 줄지어 빈소를 찾아왔다.

9월 7일 저녁 7시 30분에 열린 추모식장은 눈물로 가득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형의 아이들, 여산 여운 쌍둥이 남매를 보면서 다들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눈물 속에 우리는 함께 다짐했다.

“여산아 여운아, 아빠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우리가 이야기해줄게. 아빠가 너희들에게 만들어주고 싶었던 평화로운 통일세상, 누구나 행복한 평등세상을 아빠 대신 우리가 꼭 이루어줄게.”

고인의 추도식에서 호상 인사를 하고 있는 필자인 안영민 전 [민족21] 대표. [자료사진-통일뉴스]
고인의 추도식에서 호상 인사를 하고 있는 필자인 안영민 전 [민족21] 대표. [자료사진-통일뉴스]

추모식에서 대대협 2기 의장으로 형과 함께 활동했던 임채도(1988년 경북대 총학생회장, 한살림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은 형의 삶에 대해 이렇게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민청학련의 여정남 선생, 그리고 남민전의 이재문 선생 이후에 우리 대구경북지역이 다시 조국 역사에 바친 인물이 정용일 선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뜨거운 심장! 온화한 사람! 통일운동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해온 모두의 동지, 정용일. 9월 8일 오전 11시, ‘통일운동가 고 정용일 동지’는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불굴의 한 길 인생을 마감하고 고단한 몸을 뉘었다. 그를 우리는 심장에 남는 사람으로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 그의 남김 없는 사랑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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