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언론에서 악마화된 그곳. 강북노동자복지관을 지난 2일 찾아갔다. 두꺼운 철문에 쇠사슬이 감겨 있고, ‘단결 투쟁’이라고 적힌 머리띠를 한 거구의 사내들이 문 앞에서 “칼로 쑤셔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것 같이 묘사된 바로 그곳이다.
현실은 달랐다. 건물 2층까지 뻥 뚫린 통유리가 유난히 투명했다. 통유리 안쪽 1층엔 도서관이 있다. 이름은 노동정보도서관이지만, 문학·역사·철학 코너가 눈에 띈다. 여느 동네 도서관과 다를 바 없다. 이름과 연락처를 기재하면 누구나 대출이 가능하다.
도서관 맞은편엔 체육관이 있다. 탁구대와 운동기구가 나란히 자리 잡았다. 탁구는 지역주민이 특히 좋아한다. 다른 한켠에선 복지관이 운영하는 ‘몸펴기’ 강좌가 열린다. 매주 수요일 저녁 10여 명의 중장년 주민이 모여 건강을 관리한다. 2층 강의실에선 인문학 강좌가 열린다.
“폐쇄적 운영”이라 비난하지만 정반대다. 신축 대관 시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대강당과 시청각실 올해 1~2월 이용자는 1천명을 넘었다. 계획 중인 홈페이지 구축이 완료되면 홍보 활성화로 더 많은 지역주민과 단체가 이용하게 될 전망이다. 공익 사단법인 ‘희망씨’는 지난달 복지관 대강당에서 회원 총회를 열었다. 약 80명의 회원이 모였다. 희망씨 관계자는 “시설 운영이 폐쇄적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다른 공공기관 시설 운영이 지나치게 까다로운 건 아닌지 실태 조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복지관이 민주노총 전용 공간으로 사용된다는 일부 보수신문 주장이 무색했다. 서울시로부터 복지관 운영을 수탁받은 민주노총 서울본부는 건물 3·4층 일부를 사무실로 쓰고 있다. 건물 전체 연면적 2,773㎡ 중 413㎡다. 규정에 따르면 노조 지역대표기구는 복지관 연면적의 15%(415㎡)까지 사무실로 사용할 수 있다. 나머지 75%(2,360㎡)는 모두에게 개방돼 있다.
물 샐 틈 없는 서울시의 회계 감독
강북노동자복지관 회계 담당자는 회계가 불투명하다는 정부 지적에 억울해했다. 그는 서울시 민간위탁 회계관리시스템을 열어 보였다. 시스템 창에는 신한은행 통장 계좌의 거래내역이 모두 기재돼있었다. ‘모든오피스(서대문점)’에서 구입한 사무용품비 4만 700원부터 직원들 퇴직연금납입액 1,350만 5,901원까지 빠짐없이 보였다. 복지관 회계 담당자는 “입출금 내역이 공개돼 임의대로 처리할 여지가 없다”며 답답해했다.
복지관 예산 입출금은 서울시가 지정한 보조금 전용 통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분기 단위로 서울시 예산이 입금된다. 출금 내역은 회계관리시스템에 연동돼 자동으로 업데이트되고, 복지관 행정 담당자가 건별로 지출결의서를 등록한다. 서울시가 복지관 예산 상황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구조다.
사후 점검도 진행된다. 혹여나 거짓 지출 내역이 있는지 서울시가 정기 점검 한다. 서울시가 지정한 회계사와 노무사, 서울시 사무관 등이 복지관을 방문해, 협약내용 이행 여부와 예산집행, 재산관리, 근로환경 등 업무 전반을 살펴본다. 회계 자료뿐 아니라 프로그램 강사나 자재업체, 보안업체 등 거래처와 맺은 계약서도 들여다본다.
지도 점검은 연 2회(7·12월) 진행된다. 복지관 회계 담당자는 지난해 지도 점검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그는 “야근수당 지출 내역을 보고는 ‘왜 야근을 했냐’며 당시 작성한 시간외근무 신청서까지 가져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최소 반나절 동안 이어지는데, 제가 계속 붙어서 요청해오는 서류를 가져다주고 질문에 대답했다”고 덧붙였다.
지도 점검과 별도로 매년 통합 회계 감사도 한다. 서울시가 복지관을 담당하는 외부 회계법인을 감사인으로 지정한다.
복지관 운영 예산과 민주노총 서울본부 예산은 분리된다. 복지관 운영 계좌에 있는 돈을 민주노총 서울본부로 옮기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예산 관리 주체도 다르다. 복지관 행정 담당자는 수탁 기관인 민주노총 서울본부가 채용하기는 했지만, 노조와는 무관하다. 복지관 행정 담당자는 “노조 쪽 일은 안 해봤고, 공공기관에서 회계 업무를 본 경력을 좋게 봐줘서 뽑아준 것 같다”며 “복지관 소속 정직원이기 때문에 수탁기관이 바뀌어도 계속 다니게 된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3년 단위의 계약이 만료되는 오는 9월부터 복지관 운영 위탁을 공개모집으로 전환할 방침이다. 민주노총 서울본부는 2002년부터 수의계약으로 복지관 운영을 맡아왔다.
민주노총 서울본부는 서울시로부터 수탁받아 복지관을 관리·운영하고 있다. 올해 복지관 관리·운영 예산은 총 4억원이다.
예산은 인건비·운영비·사업비로 구성된다. 인건비가 2억 6천만원으로 가장 크다. 시설·미화·행정 직원 6명이 일한다. 운영비는 1억 1,700만원이 들어간다. 전기·가스·수도 등 공공요금과 제세공과금이 5,400만원정도다. 여기에 각종 소모품비와 인터넷 통신비, 보안경비 시스템 사용료 등이 붙는다. 사업비는 2,500만원으로 잡았다. 현재 노동상담 법률지원과 생활체육 체형교정운동(몸펴기) 강좌, 지하 1층 상설전시관 운영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향후 템플스테이와 댄스 강좌도 열 계획이다. 사업비 대부분은 법률지원 노무사 자문료와 프로그램 강사비다.
법률지원은 복지관의 대표 사업이다. 복지관 2층에 노동법률지원센터가 있다. 지난해 지원 건수는 4,800건 수준으로, 8,500여 명이 도움을 받았다. 내방·전화·인터넷을 통한 상담뿐 아니라, 법원 사건 소송 지원과 법률검토의견서 작성, 고용노동부 진정·고소 사건 대리·대행 등 적극적인 법률지원도 수행한다. 지난해 120회 이상 진행된 노동법·인권 교육에는 4천명가량이 참여했다.
올해 서울시가 지원하는 복지관 예산은 2억 4천만원이다. 서울시 예산으로 충당하지 못하는 비용은 민주노총 서울본부가 부담한다.
보조금 받으니 자체 예산 공개하라는 정부의 무리수
정부와 여당은 노조가 정부 지자체로부터 1천억원대 보조금을 받고 있다며, 회계 자료 제출을 요구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국무회의에서 “지난 5년간 국민 혈세로 투입된 1,500억원 이상의 정부 지원금을 사용하면서도 노조는 회계 장부를 제출하지 않고 조직적으로 반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당 발언은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이 노동부와 광역자치단체로부터 받은 자료를 근거로 한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받은 보조금을 정리한 자료다. 노조가 받은 보조금은 강북노동자복지관 운영과 같은 위수탁 사업에 대한 예산이 대부분이다. 민주노총 서울본부가 자체 예산까지 들여가며 복지관을 운영하는 현실과 ‘혈세 1,500억원’을 내세우는 윤 대통령 인식은 괴리가 크다.
노동부가 첨병으로 나서 노조에 회계 자료 제출을 압박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노조 334곳에 회계 투명성 자율점검 안내문이 발송됐다. 문제는 정부 지자체의 보조금뿐 아니라 조합비로 마련한 노조 자체 예산 관련 자료도 요구했다는 점이다. 민주노총 서울본부 한 해 예산은 4억 4천만원 수준이다. 복지관 운영비로 지원되는 서울시 보조금과는 무관한 돈이다. 서울시 예산 2억 5천만원 받았으니 노조 자체 예산 자료까지 내놓으라는 건 지나친 요구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노조 회계와 위탁사업 회계는 전혀 다른 회계다. 지금도 위탁사업 회계는 투명하게 공개되고 누구나 찾아볼 수 있다”며 “정부의 노조 회계 공개 요구는 고장난 변기를 고쳐달라고 요청해 고쳐줬더니 ‘내가 수리비를 냈으니 당신 사업의 모든 회계 서류를 나에게 주시오’라고 말하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노동부는 자료를 제출하지 않은 노조를 상대로 오는 15일부터 과태료를 부과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노조는 이미 법적으로 요구되는 수준 이상의 자료를 제출했으며, 다만 과도한 개입에는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노조법상 노조가 조합원에게 공개해야 할 자료와 정부의 제출 요구에 응해야 할 자료는 따로 규정된다. 노조는 엄연히 민간단체인 만큼, 제삼자인 정부에 모든 자료를 공개할 의무는 없다. 조합원은 신청 절차를 통해 상당한 범위의 중요 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
노동부는 조합원에 한해 제공되는 자료의 증빙을 요구했다. 예·결산서, 총수입·지출원장 등 회계 자료를 비롯해 조합원 명부, 임원 주소록, 회의록 등이 포함된다. 증빙 수단으로는 각 자료의 내지 1쪽을 내라고 했다.
정부의 자료 제출 요구는 노조 탄압의 전초라고 노조 측은 설명한다. 박은정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내지 1쪽을 내면 행정적으로 선례가 되고, 선례가 쌓이면 관행이 된다”며 “과거 정부는 노조에 대한 조사권으로 회계 자료를 확보해 노조 탄압 수단으로 악용했다”고 설명했다. 1997년 노조법 개정 전에는 정부가 노조 운영에 대한 조사를 빌미로 회계 자료를 볼 수 있었다. 노조가 후원한 단체의 성격을 이유로 정부가 제재를 가하는 등 회계 자료는 노조 탄압을 위한 소재가 됐다.
정부는 노조 회계 공시시스템 구축도 추진 중이다. 노동부가 관련 입법을 준비 중이다. 하물며 상장기업도 중요 자료는 제한적으로 제공한다. 가령 주주명부 열람 청구권은 주주에 한해 부여된다. 제삼자는 권한이 없다. 또한 주주는 이사회 회의록 열람도 청구할 수 있으나, 회사가 거절할 수 있다. 재무제표가 공시되지는 하지만, 거래 내역을 건별로 확인할 수 있는 수입·지출결의서가 외부로 유출되는 일은 없다.
정부에 들어간 자료가 국회와 언론 등을 통해 외부로 공개될 우려도 있다. 박 정책국장은 “정부가 자료를 가진다는 건 어떤 경로로든 외부로 유출될 가능성을 내포하게 된다”며 “보수진영에서 노조 운영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회계 자료를 뜯어보며 미주알고주알 지적하고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조합원도 자료를 열람할 수는 있지만, 복사해 외부로 가져갈 수는 없다. 지난 2017년 대법원은 자료 유출 시 노조의 자주적인 운영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등사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판결 내렸다.
박 정책국장은 “노조 자료에 대한 정부의 과도한 권한 행사를 막기 위해 투쟁으로 노조법은 개정했다”며 “과거로 회귀하려는 정부 시도에 노조가 자료를 제출하면서 응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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