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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탈중국’에 반기 드는 미국 기업들

엔비디아 젠슨 황 “중국 얕보지 말라” 경고…“시장 축소 우려” 비판도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지난 5월 31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컴퓨텍스 2023’ 기조연설에 나선 모습. ⓒ엔비디아
미국 정부가 추진하는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대한 현지 기업 반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의 제재가 오히려 중국 자립을 앞당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패로 기록된 일본의 대한국 수출 규제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미국 기업은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을 잃게 되는 데 대한 불만도 터트리고 있다. 중국 제재를 둘러쌓고 미국 정부와 기업 간 갈등 조짐이 보인다.

5일 업계에 따르면,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31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정보기술(IT) 박람회 컴퓨텍스에서 취재진과 만나, 중국의 ‘반도체 굴기’ 노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황 CEO는 “(미국 정부의) 규제가 어떻든 우리는 절대적으로 준수할 것”이라면서도 “중국은 그 기회를 활용해 자국 현지 기업을 육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중국에 그렇게 많은 그래픽처리장치(GPU) 스타트업이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이 분야에 쏟아부어진 자원의 양은 꽤 크다”며 “그렇기에 그들을 얕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제재는 오히려 중국이 반도체 자립에 박차를 가하게 하는 배경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젠슨 황은 지난 24일 파이낸셜타임스(FT)와 인터뷰에서도 “중국이 자체 칩 개발에 나서고 있는 점도 우려되는 상황”이라며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반도체를 사들일 수 없다면 그들은 스스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는 중국의 반도체 자립만 도와줄 뿐”이라고 했다. 중국 기업이 게임, 그래픽, 인공지능(AI)을 위한 엔비디아의 첨단 프로세서와 경쟁하기 위해 자체 반도체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엔비디아의 고성능 GPU는 AI 기술의 핵심으로 꼽힌다. AI 기술이 발달할수록 빠른 연산 처리 기능을 갖춘 고성능 GPU가 요구된다. 챗GPT 개발사 오픈AI가 최근 출시한 대규모 언어 모델 GPT-4에는 엔비디아의 고성능 GPU가 1만여개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엔비디아의 GPU 시장 점유율은 90%에 달한다.

최근 반도체 기업 최초로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돌파한 엔비디아가 중국에 대한 미국 제재의 최전선으로 등 떠밀리는 형국이다. 미국 정부는 지난해 8월, 엔비디아가 생산하는 첨단 반도체의 중국 수출을 금지했다. 첨단 반도체가 중국의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게 미국 정부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미국 제재를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일환으로 본다. 중국의 기술 발전을 저지하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미국 제재로 중국 수출이 막힌 엔비디아의 GPU 제품은 ‘A100’과 그 업그레이드 버전인 ‘H100’이다. 엔비디아는 미국 제재에 저촉되지 않도록 성능을 낮춘 GPU를 중국에 수출하고 있다. 첨단 반도체를 중국 수출용으로 재설계한 ‘A800’과 ‘H800’이다. 해당 제품은 알리바바그룹과 바이두, 텐센트 등 중국 기술 기업의 클라우드 컴퓨팅에 사용되고 있다.

지난달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제재로 첨단 반도체를 확보하지 못하게 된 중국 기업이 가용한 반도체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AI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기사는 “많은 중국 기업이 현재 A800과 H800을 포함해 3~4개의 덜 진보된 반도체 결합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4월 텐센트는 H800을 적용한 대규모 AI 모델의 훈련을 위한 컴퓨팅 클러스터를 공개했다. 또한, 알리바바와 바이두, 화웨이는 화웨이가 개발한 AI 반도체 어센드와 V100·P100 등 엔비디아의 구형 반도체의 조합을 시도하고 있다.

하드웨어의 한계를 소프트웨어 개선으로 극복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화웨이는 엔비디아의 반도체 없이 어센드만으로 AI에게 최신 세대 언어 모델을 훈련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미국의 중국 제재에 대한 미국 반도체 기업 반발은 과거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강행한 소재·부품·장비 수출 금지를 상기시킨다. 일본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로 2019년 7월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인 포토레지스트·불화수소·불화폴리이미드 3개 품목 수출을 통제했다. 한 달 뒤에는 화이트리스트(수출 심사 우대국)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일본의 수출 규제는 한국의 자립을 촉진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포토레지스트의 일본 수입 비중은 2018년 93.2%에서 지난해 77.4%로 감소했다. 같은 기간 불화수소는 41.9%에서 7.7%로 급감했다. 불화폴리이미드 경우 투명폴리이미드로 대체되고 있다. 일본 기업으로서는 한국 시장 매출이 줄어드는 타격을 보게 됐다. 결국 일본은 지난 3월, 3개 품목의 수출 규제 조치를 해제하기로 했다. 한일 정상회담이 계기가 됐다고는 하나, 실상은 자국 피해가 가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미국의 중국 제재도 크게 다르지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미국의 중국 제재는 지렁이를 밟아 꿈틀거리게 하는 것과 같다”며 “끓는 물 속 개구리처럼 미국 제품을 제공하면서 서서히 죽게 하는 것과 비교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소부장 수출 규제가 그랬듯, 미국의 제재는 중국이 더 빨리 자립하도록 할 수 있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3월 16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열린 한일 정상 소인수 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2023.03.16. ⓒ뉴시스
젠슨 황 “중국 시장 대체 불가”…미국 정부-기업 간 갈등 심화 양상

중국은 엔비디아의 주요 매출처다. 엔비디아 매출의 5분의 1이 중국에서 발생한다. 미국 제재에 따른 엔비디아의 피해가 불가피하다. 중국 수출 금지 발표 직후 엔비디아 주가는 11% 하락해, 시가총액 400억 달러 이상이 증발했다. 엔비디아가 정부 제재에도 중국 시장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황 CEO는 미국의 중국 제재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왔다. FT와 인터뷰에서도 미국 정부와 의회를 향해 “중국과 무역을 제한하는 추가 제재에 신중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미국 IT 기업 매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약 3분의 1에 달한다고 언급하며 “중국은 부품 공급원이자 제품의 최종 시장으로서 대체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최대 시장 중 한 곳에 첨단 반도체 칩을 더 이상 판매할 수 없게 되면 미국 기술 기업들이 막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조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 반도체 산업 견제를 위해 실시한 수출 통제로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손이 묶인 상태”라고 말했다.

황 CEO는 조만간 중국을 방문할 예정인 것으로도 알려졌다. 최근 블룸버그통신은 그가 이번달 중국을 방문해, 텐센트홀딩스와 바이트댄스 등 중국 주요 IT 기업, 비야디(BYD)와 리샹 등 전기차 기업 경영진과 만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의 중국 제재와 엇박자 행보를 보이는 건 엔비디아뿐만이 아니다. 미국 최대 반도체 기업 인텔도 중국과 거리를 좁히고 있다. 지난 4월 인텔은 중국 하이난에 ‘집적회로 사무소’를 개소했다. 해당 사무소는 소프트웨어·하드웨어 제품 유통 등 무역 업무를 비롯해 라이선스, 정산, 인재 양성, 지분 투자 활동 등을 수행한다. 사무소 개소 직후 베이징을 방문한 팻 겔싱어 인텔 CEO는 “인텔의 중국 진출은 매우 중요하다”면서 “중국은 세계 최대 시장 중 하나이자, 인텔의 가장 중요한 시장 중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인텔의 중국 투자 규모는 약 130억 달러, 직원 수는 1만 2천명 이상이다. 지난해 중국 매출 비중은 27%로 집계됐다.

중국 투자를 제한하는 미국 반도체법의 ‘가드레일’ 조항에 대한 미국 반도체 업계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미국 반도체법상 보조금을 받은 기업은 중국 내 시설 투자가 제한된다. 향후 10년간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생산 능력을 최대 5%까지만 확장할 수 있다. 또한 범용(레거시) 반도체 상한은 최대 10%다. 이를 어기면 보조금을 반납해야 한다. SIA는 지난달 미국 상무부에 가드레일 조항 완화를 요청하는 의견서를 제출해 “중국은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며 “전 세계 반도체 제조 능력의 약 21%를 차지하고, 조립·테스트·패키징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점하고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잠재적인 반도체법 보조금 수령 기업은 중국에 수많은 기존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면서 “이들 기업이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보장함으로써, 기존 시설에 대한 과거의 투자를 보호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젠슨 황 CEO도 미국 반도체법에 대해 “결국 크게 망신당할 것”이라고 직격한 바 있다.

중국 견제를 둘러싼 미국 정부와 기업 간 입장차가 가시화되는 양상이다. 김양팽 전문연구원은 “자유무역주의 체제에서 정부와 기업은 목표와 지향점이 다르다”고 짚었다. 이어 “미국 정부는 중국을 제재해 중국 발전을 늦추면 자국에 이익이 된다고 보는 반면,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중국 시장을 잃게 되니 반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예전처럼 기업이 이데올로기적 판단에서 정부와 같이 움직이는 시대는 갔다”면서 “미국 기업은 자유경제 시장에서 정부 조치가 중국 기업의 기술 개발을 도울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자기들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21년 4월 12일(현지 시간) 백악관에서 개최한 반도체 화상회의에서 반도체 웨이퍼를 들어 보이며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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