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10명 중 5명은 '피해자다움' 통념 가져 … 근거 없는 '무고죄 공포'도
이번 여가부 조사에선 성폭력 피해자의 사건 대응방식을 '정형적인 형태'로 규정하고, 이를 벗어나는 피해자는 '진정한 피해자가 아니'라고 보는 통념도 확인됐다. 응답자의 52.6%는 '성폭력 피해를 입은 사람이라면 피해 후 바로 경찰에 신고할 것이다'라고 답했고, 39.7%는 '금전적 이유나 상대에 대한 분노, 보복심 때문에 성폭력을 거짓으로 신고하는 사람도 많다'고 답했다.
이 같은 통계 결과는 "실태조사 상의 신고율이 여전히 10%대로 집계"(김혜정 소장)되는 성폭력 사건에 대한 몰이해와 '성폭력 무고' 사례에 대한 근거 없는 두려움을 잘 보여준다.
실제 성폭력 피해자들은 범죄 직후 '바로 신고하거나' '바로 장소를 벗어나거나' '바로 가해자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등' 정형화된 대응양상을 보이지 않는다. 지난 2019년 안희정 성폭력 사건 당시 대법원은 "특정하게 정형화한 성범죄 피해자의 반응만을 정상적인 태도라 보는" 것은 성폭력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편협한 관점"이라는 2심 법원의 판단을 인용한 바 있다.
또한 강간 등 성폭력 사건은 전체 흉악범죄에 비해 현저히 낮은 기소율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피해자들이 법적대응을 포기하게 만드는 주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신고 대응을 '피해자의 정형적 모습'으로 바라보아선 안 되는 이유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20년 상담통계에 따르면 술·약물·수면상태 등을 활용한 준강간 및 준강제추행 피해 사례에서 법적대응을 선택한 피해자들은 38%(전체 65건 중 25건)에 불과했다. 법적 대응을 선택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처벌에 대한 불확실(30.8%) 때문이었다. 대검찰청 범죄분석통계에 따르면 2021년 기준 검찰에 송치된 전체 성폭력 피의자 3만1991명 중 기소된 이들은 1만3740명으로 42.9%에 불과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지난 3월 발간한 2022년 성폭력 상담 통계에서 검찰의 불기소뿐 아니라 경찰의 불송치 또한 성범죄 피해자가 "넘어야 할 벽"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동 기관의 2022년 한해 불송치 대상자 조사에 따르면 불송치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요소가 바로 수사기관 등의 "피해자다움에 대한 통념 작용"(32.4%)이다.
개별 사건을 들여다보면 △명확하게 거부의사를 밝히지 않은 점 △바로 피해 장소를 벗어나거나 주위에 도움을 청하지 않은 점 △피해 전후로 가해자와 연락을 주고받은 점 등의 모습이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않다'는 판단의 근거가 됐다. 통계로 드러난 '통념'은 실제 수사과정에까지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통계에서 나타난 '성폭력을 거짓으로 신고하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도 비슷한 효과를 가진다고 지적한다. 근거 없이 부풀려진 '통념'이 실제 피해자들에게 불리한 사회·문화·법률 지형을 만들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 2020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성폭력무고죄 검찰 통계 분석'(2017~2018년 대검찰청 통계)에 따르면 같은 기간 동안 성범죄로 처분된 인원은 8만 677명인 반면 성폭력 무고로 유죄를 받은 인원수는 341명에 불과했다.
당시 연구원은 "성폭력 피해를 주장했다가 무고 혐의를 받거나 나아가 무고죄 유죄까지 선고받는 사례는 그 수가 적더라도 성폭력 피해자 전반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이 매우 크다"며 "무고 혐의를 받을 수 있다는 위협은 성폭력 피해자를 더욱 침묵하도록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법률현장에서 성폭력 무고죄는 가해자들이 재판을 지연시키거나 피해자를 압박하기 위해 활용하는 대표적인 '방어 전략'으로 꼽힌다. 김정혜 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지난해 6월 무고죄·강간죄 관련 이슈토크쇼에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의심과 비난이 존재하고, 그러한 의심과 비난 때문에 피해자는 침묵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다시 성폭력 근절이 방해되는 악순환의 구조가 있다"며 "가해자는 무고 역고소를 통해 이러한 순환구조를 이용한다"고 설명했다.
'강간통념', 남성의 경우가 압도적 … "정부 반페미 정치엔 책임 없나"
이 같은 강간통념은 어떻게 생성되고 강화되고 있을까. 성폭력을 여성의 '정조에 관한 죄'로 규정하고 있던 형법 제32장이 지난 1995년까지 유지되어온 만큼 한국사회의 강간통념·강간문화는 길고 견고한 역사를 지닌다. 통념의 극복을 위해서도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다만 여성계에선 지난 대선 국면부터 지속되어온 현 정부여당의 반 여성주의 기조가 이 같은 통념의 강화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한다. 무고죄 강화, 여성가족부 폐지, 강간죄 개정 반대 등 안티 페미니즘 정책을 통해 소위 '이대남(20대 남성) 공략' 전략을 국면전환 카드로 삼아온 현 정부의 기조가 강간통념의 확대재생산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통계에선 연령대보다 성별에 따른 성폭력 인식 격차가 두드러졌다. 대부분의 문항에서 여성보다 남성의 성폭력 통념이나 고정관념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무고죄 이슈와 관련한 '금전적 이유나 상대에 대한 분노, 보복심 때문에 성폭력을 거짓으로 신고하는 사람도 많다'는 항목은 30대 남성(43.5%)에서 가장 높은 응답률이 나왔고, '피해자가 끝까지 저항하면 강제로 성관계(강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항목의 경우 20대 남성(27.7%)에서 응답률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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