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기업적 금통위와 무력화된 통화정책
신임 총재의 앞길을 가로막는 더 큰 암초는 한국은행 내부의 의사결정 구조에 있다. 한국 경제는 양극화가 심화된 K형 경제의 전형이라서, 통화정책을 펴기 어려운 국가임에 틀림없다. 반면 현재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는 K자의 한 축인 서민경제와 중소기업보다는 다른 축인 대기업과 부동산업에 우호적인 인사들로 채워져 있다. 중앙은행 총재가 부채의 위험을 강조하는 메이저리거급이라도 함께 금리를 결정하는 금통위원들이 모두 건설 경기 부양만을 외치는 ‘건설 해바라기’들이라면 제대로 된 정책을 펴기는 쉽지 않다.
한국은행 스스로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건설 및 부동산업에 대한 대출 규모는 무려 600조 원에 달한다. 생산적인 금융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기반으로 금융시장의 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 경제 성장을 낮추고 효율성을 떨어뜨린다고 보고서는 지적하고 있다. 금융 시스템 전체를 위협할 정도로 기형적인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져야 할 금통위원들은 구조조정의 칼을 뽑기는커녕, 여전히 "부동산 경기가 살아야 내수가 산다"는 언론의 논조에 경도되어 금리 인하만을 추구하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보수적인 학자 출신 총재가 소신 있게 통화 긴축을 단행하거나 부실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압박하기란 구조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한은 총재의 역할은 이들의 등쌀에 밀려 무력화될 위기에 처해 있다.
고유가·고환율·고물가 ‘삼중고’, 서민의 식탁은 눈물바다
경제 지표상의 차가운 숫자는 서민의 삶에 닿을 때 뜨거운 눈물이 된다. 지금 서민 경제는 단순히 '어렵다'는 형용사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 고유가, 고환율, 고물가라는 '삼중고' 앞에서 서민들은 하루하루 두려움에 떨고 있다. 스태그플레이션의 위협이 현실화될 때 한국은행의 금융정책은 속수무책으로 무력화된다. 케인즈는 금융정책을 '줄을 당기는 것(Pushing on a string)'에 비유한 바 있다. 줄을 당겨 긴축할 때는 효과가 명확하지만, 구조적 불황 하에서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줄을 밀거나 놓아버릴 때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반도체 대기업이 수출 대금을 환전하지 않는다는 비난에 대응하기 위해 은행에 예금을 하려 했으나, 정작 은행들이 수익성 악화 등을 이유로 이를 마다했다는 보도가 나올 지경이다. 이는 현재 시중 은행들이 가계의 부동산 담보대출이나 건설업·부동산업 대출 외에는 마땅한 대출처를 찾지 못하는 '유동성 함정'에 근접해 있음을 시사한다. 금융정책은 이미 무력화되었고, 재정정책은 비효율의 늪에 빠져 한국 경제의 저성장 체질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자산가들이 저금리 유동성을 타고 주식과 부동산 파티를 벌이며 '금융장세'의 꿀을 빨고 있을 때, 금융회사들이 성과급 잔치를 벌이며 배를 불리고 있을 때, 서민들은 그 늘어난 유동성이 초래한 고물가의 청구서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빚을 갚기 위해 점심 식사 한 끼 가격에 벌벌 떨며 소비를 줄이는 이들에게, 한국은행의 금리정책 실기는 단순한 판단 미스가 아니라 생존권을 위협하는 범죄와 다름없다.
가계 부채의 늪과 부동산 투기의 망령
가계는 빚을 갚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데,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여전히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고 있다. 정부와 금융권은 건설업계의 부도를 막는다는 명분 아래 끊임없이 자금을 수혈하고 있으며, 이는 결국 '대마불사'의 신화를 공고히 하고 있다. 일본은 건설업과 금융업의 부실을 감추는 에버그리닝을 방치한 결과 잃어버린 30년을 맞았고, 한국 경제 역시 같은 경로를 걸을 위험에 처해 있다.
한국은행 총재가 이 기형적인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 제대로 된 정책을 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정치권과 금통위 내의 관료주의적 저항은 에버그리닝을 지속하려하기 때문이다. 부실한 건설사와 부동산업에 대한 과감한 구조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한국 경제의 자금 흐름은 계속해서 고여 썩게 될 것이다. 600조 원이라는 거대한 폭탄을 안고서도 "언젠가 오르겠지"라는 투기적 망령에 사로잡힌 사회에서, 중앙은행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전무해 보인다.
민주당 정부의 무지와 보수적 경제학자에 대한 짝사랑
여기서 우리는 정치권의 모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서민 경제와 양극화 해소를 최우선 가치로 내건 민주당 정부가 어째서 한국은행 총재직만큼은 이토록 일관되게 보수적인 경제학자들만 고집하는가? 이는 민주당 정부가 서민의 삶과 직결된 통화정책의 파급 효과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다. 경제정책을 관료들에게 맡기고 다시 그들의 추천을 받아 보수적인 인물로 한국은행 총재를 임명하는 어처구니 없는 의사결정을 반복하는 상황에서 한국경제의 저성장과 양극화는 심화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창용에 이어 신현송까지, 그들은 모두 합리적이고 뛰어난 학자들이지만 기본적으로 자본의 효율성을 중시하는 보수적 경제관을 가진 이들이다. 이들의 시선에는 자산 시장의 안정과 대외 신인도라는 거대 담론만 존재할 뿐, 한국은행 보고서가 지적한 저성장과 저효율로 기초체력은 약화되고 양극화의 틈바구니에서 무너져 내리는 서민들의 구체적인 삶은 보이지 않는다. 이창용 총재가 방치한 고환율로 한국은행의 금융정책은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게 되었다. 채식주의 식당을 경영한다면서 주방장은 스테이크 장인만 고용하는 이 아이러니가 결국 서민 경제를 더욱 사지로 내몰고 있다.
착시를 걷어내고 운동장 자체를 바꿔라
일시적인 반도체 경기 회복은 독이 든 성배와 같다. 이미 한국 경제는 여러 번 수출 지표가 좋아 보인다는 반도체 착시에 취해 저성장과 비효율의 구조적 문제를 방치해 왔다. 그러는 사이 구조개혁의 골든타임을 흘려 보냈는데 이번에도 다시 같은 우를 범한다면, 한국 경제는 일본이 걸어갔던 '잃어버린 30년'의 장기 침체 경로를 그대로 답습하게 될 것이다. 저출산과 혁신 저하라는 정해진 미래 앞에서, 펀더멘털이 무너진 한국 경제를 구원할 방법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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