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평화통일을 지향하도록 되어 있고 한국 정부는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통일을 지향한다."
김영호 통일부장관 후보자가 30일 인사청문 준비를 위한 사무실로 사용하는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본부 회담장에 첫 출근하면서 현관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김정은 정권 타도와 북한 자유화를 통해 남북 1체제가 되어야 통일의 길이 열린다'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해 온 인사의 발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조금 더 들어가 보자.
김 후보자는 먼저 "통일 시나리오에서는 다양한 걸 고려해야 한다. '1체제 2국가', '2국가 2체제' 등 다양한 시나리오를 놓고 어떤 것이 과연 대한민국의 미래,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 가장 바람직한 것인지를 먼저 염두에 두고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구체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런 노력은 앞으로 학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계속돼야 한다"고 답변했다.
완곡하지만, 학자로서 여러가지 시나리오 중 체제통일을 지향하는 '남북1체제 통일'을 주장해 왔다는 걸 굳이 부정하지도 않고, 사실상 앞으로도 그런 생각을 굽힐 뜻이 없다는 것으로 들리는 언급이 이어졌다.
그럼 장관 내정자로서는 생각이 바뀌었을까?
"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인 여건을 많이 고려해야 된다. 그 다음에 정부의 기조도 있고...그런 것들을 고려해서 정책을 펼쳐나가야 한다"고 두루뭉술하게 피해나갔다.
이어 '김정은 정권 타도'와 '흡수통일' 주장에 대해서는 "제가 말씀드린대로 북한의 어떤 변화가 왔을 때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강압적인 흡수통일이라는 것은 대한민국도 추진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아시는 것처럼 강압적으로 군사적으로 흡수통일을 시도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6.25남침전쟁 아니냐"라고 동문서답을 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은 평화통일을 지향하도록 되어 있고 한국 정부는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통일을 지향한다. 그런 방향으로 생각하면 되겠다"라고 말을 끝맺었다.
흡수통일은 북한이 전쟁으로 시도했던 것이고, 한국은 기본적으로 그럴 생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통일을 지향한다는 이야기다.
명시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상황의 변화에 따라 '북한체제 전환'이 불가피할 수 있다는 '신념'은 변함없는 듯 하다.
김 후보자는 '교류협력과 대화'라는 통일부 역할에 대해서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잘라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가치지향적이고 대단히 원칙주의적"이라고 하면서 "통일부는 앞으로 원칙있는, 가치지향적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서 원칙과 가치는 자유, 인권, 법치를 일컫는다.
권영세 장관이 '통일정책 이어달리기'를 주장한데 대해서도 "정책의 연속성도 중요하지만 변화된 상황에서는 남북간 합의들을 선별적으로 고려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차별성을 드러냈다.
남북당국간 합의 중에서도 특히 2018년 9.19군사합의를 문제삼았다.
"합의는 쌍방이 지키는 게 중요하다. 북한이 남북합의 일부를 어긴 것으로 확인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면서, "앞으로 북한이 9.19군사분야 합의를 충실하게 지켜지 않는다면, 또 고강도 도발을 할 경우에는 정부도 나름대로 입장을 정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상대에 대한 일방적 불신으로 가득 찬 주장이고 오랜 세월 남북 당국이 합의해 온 맥락과 지향, 간절함을 무시하는 오만한 태도이다.
남북 당국이 50년전 7.4남북공동성명부터 지금까지 남긴 여러 합의문은 분단상황을 이용해 상대를 기만하려는 북에 휘말려든 남쪽 정부가 마지못해, 또는 적극적인 의도에 따라 작성된 것이니, 북의 핵고도화로 인해 심각한 안보위기가 생긴 지금 상황에서는 그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남북 당국은 1953년 정전협전 이후 20년이 지난 1972년 최초로 합의한 7.4남북공동성명에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도출한 이래 1992년 남북고위급 회담을 통해 발효된 남북기본합의서에선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조항을 제1조에 새겼다.
남북기본합의서는 제2조부터 4조까지 상대방의 내부문제에 간섭하지 않고 비방·중상하지 않으며 파괴·전복하려는 일체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절절히 담겨 있다.
2023년 현재까지 한국정부의 공식 통일방안으로 인정되는 1994년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1989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계승하면서 이 남북기본합의서 발효 등의 상황변화를 반영해 보완, 발전시킨 것이라는 게 통일부의 평가이다.
그뿐인가.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에는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했으며, 2018년 4.27 선언에서는 한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연내 종전선언과 평화체제 구축을 합의하고 그해 9월 평양선언에서 군사적 긴장상태완화와 신뢰구축을 위한 군사분야 부속합의서를 발표했다.
이른바 보수·진보를 망라해 역대 정부가 추진한 일이고 통일의 주체이자 상대인 북한이 합의한 역사적 문건이다.
합의에는 특정 개인이나 일시적인 정권이 사사로운 '신념'을 앞세워 왈가왈부할 수 없는, 민족 전체의 총의가 담겨 있다는 뜻이다.
이참에 말하면, 김 후보자가 통일부 미래기획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진행중인 윤석열정부의 '신통일미래구상' 성안 작업도 남남, 남북 합의없이 진행되고 있어 꺼림직하다.
먼저, 중장기 통일구상과 전략방향을 정립한다는 목표아래 준비중인 '신통일미래구상'의 성격상 필수불가결한 사회 내부의 이견 해소를 위한 의견수렴이 형식적이고 충분치 않아 일방적 독주로 그칠 위험이 농후하다. 기존 통일방안이 여야 정치권의 오랜 숙의끝에 마련된 선례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또 통일의 주체이자 상대인 북측과의 합의 이행과 발전을 위한 방안은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어 '신통일미래구상'이 '윤석열 정부의 통일전략'에 불과하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김 후보자는 앞으로 있을 인사청문회에서 "국민들이 정부의 통일정책이 어떻게 될지, 남북간 긴장이 고조돼 있는 상황에서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은 무엇인지 궁금해 하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 대해 성실히 준비해서 답변하겠다"고 말했다.
최소한 정부의 통일정책이 남북관계의 평화적 관리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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