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대통령이 3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개회 선언을 하고 있다. 2024.7.30 [대통령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연합뉴스
정치의 대지가 사막처럼 말라 있다. 국회가 소란하고 미디어에 뉴스가 넘쳐도 대한민국 정치의 땅에는 풀 한 포기 살리지 못할 것 같은 거친 모래바람만 불고 있다. 2024년의 대한민국은 정치가 죽고 민주주의가 사라진 황망한 시간을 맞고 있다. 민주주의는 정치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제도들이 소통과 대화와 합의로 운영되는 질서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형식이자 껍질이라면 정치 사회의 소통은 민주주의의 내용이자 알맹이다.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는 정치 사회의 소통과 대화가 사라지고 선거만이 단 한판의 승부처로 남았다. 단 한 표라도 이기면 모든 것을 얻게 되는 선거 전쟁은 점점 더 도박판을 닮아 가고 있다.
우리는 정치가 죽고 선거만 남은 이 알량한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라고 해야 할지 독재라고 해야 할지 참으로 이상한 정치의 나라에 살고 있다. 나는 최근 한 칼럼에서 선거가 정치의 모든 것이 된 우리 시대를 '아주 얇은 민주주의의 시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제 나는 대한민국의 시간을 죽은 정치의 시간, 깨진 민주주의의 시간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죽은 정치의 한복판에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정치'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이미 21번의 거부권을 행사했고, 현재 예상되는 3개의 법안에 대한 거부권이 행사된다면 24번째 거부권을 기록하게 된다. 45건의 거부권을 행사한 이승만에 이어 윤석열은 민주화 이후 가장 많은 거부권을 행사한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은 국회의 의결을 무위로 돌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다. 헌법학자들은 대통령의 거부권이 권력분립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에 엄격하게 축소되어야 한다고 해석한다. 또 무제한적 거부권은 권한쟁의나 탄핵심판을 통해서 헌법적 제재가 필요하다고 보기도 한다. 특히 대통령과 가족을 둘러싼 특검이나 채 해병 관련 특검에 대한 거부권은 대통령의 거부권이 허용될 수 있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경우로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 같은 거부권은 대통령이 초법적 존재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은 정치사회의 소통을 봉쇄하는 '정치 없는 정치'의 표식이자 죽은 정치의 가장 뚜렷한 징표다.
제도적 독재 혹은 법률적 독재
오늘 우리는 정치가 죽은 암흑의 시간을 맞고 있다. 죽은 정치의 시간은 '민주주의'의 시간이 아니라 '독재'의 시간이다. 정치가 죽은 윤석열 정부의 시간을 우리는 '1차 독재'의 징후로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 1차 독재는 주어진 제도적 공간을 통해 작동하기 때문에 제도적 독재나 법률적 독재로 부를 수 있다. 쿠데타 이후의 군부독재나 공산혁명 이후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달리, 1차 독재는 선거로 집권한 정치권력이 제도와 법률의 형식이 부여하는 권한을 과도하게 남용하는 방식으로 정치사회를 통제하는 권력유지의 교묘한 전략이다.
첫째, 1차 독재는 의회를 제도적 수단으로 무력화한다. 법안에 대한 협력과 대화를 차단함으로써 대치와 대결을 장기화하고 거부권의 남용을 통해 대의정치를 무력화한다.
둘째, 1차 독재는 여당을 도구화한다. 총선 참패와 거듭되는 실정, 급락하는 지지율로 보면 대통령의 탈당만이 여당을 살리는 길이자 정치 도의 일 수 있다. 그러나 당을 놓치면 곧 심판이라는 명백한 현실 앞에 대통령은 여당의 고삐를 한층 더 단단히 조이고 있다. 여당과 그 의원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대통령의 아바타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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