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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 1차 독재 징후가 보인다

[사의재 직필] 24번째 앞둔 대통령의 거부권... 죽은 정치의 시대

24.10.02 06:59최종 업데이트 24.10.02 06:59

▲ 윤석열 대통령이 3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개회 선언을 하고 있다. 2024.7.30 [대통령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연합뉴스

정치의 대지가 사막처럼 말라 있다. 국회가 소란하고 미디어에 뉴스가 넘쳐도 대한민국 정치의 땅에는 풀 한 포기 살리지 못할 것 같은 거친 모래바람만 불고 있다. 2024년의 대한민국은 정치가 죽고 민주주의가 사라진 황망한 시간을 맞고 있다. 민주주의는 정치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제도들이 소통과 대화와 합의로 운영되는 질서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형식이자 껍질이라면 정치 사회의 소통은 민주주의의 내용이자 알맹이다.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는 정치 사회의 소통과 대화가 사라지고 선거만이 단 한판의 승부처로 남았다. 단 한 표라도 이기면 모든 것을 얻게 되는 선거 전쟁은 점점 더 도박판을 닮아 가고 있다.

우리는 정치가 죽고 선거만 남은 이 알량한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라고 해야 할지 독재라고 해야 할지 참으로 이상한 정치의 나라에 살고 있다. 나는 최근 한 칼럼에서 선거가 정치의 모든 것이 된 우리 시대를 '아주 얇은 민주주의의 시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제 나는 대한민국의 시간을 죽은 정치의 시간, 깨진 민주주의의 시간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죽은 정치의 한복판에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정치'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이미 21번의 거부권을 행사했고, 현재 예상되는 3개의 법안에 대한 거부권이 행사된다면 24번째 거부권을 기록하게 된다. 45건의 거부권을 행사한 이승만에 이어 윤석열은 민주화 이후 가장 많은 거부권을 행사한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은 국회의 의결을 무위로 돌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다. 헌법학자들은 대통령의 거부권이 권력분립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에 엄격하게 축소되어야 한다고 해석한다. 또 무제한적 거부권은 권한쟁의나 탄핵심판을 통해서 헌법적 제재가 필요하다고 보기도 한다. 특히 대통령과 가족을 둘러싼 특검이나 채 해병 관련 특검에 대한 거부권은 대통령의 거부권이 허용될 수 있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경우로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 같은 거부권은 대통령이 초법적 존재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은 정치사회의 소통을 봉쇄하는 '정치 없는 정치'의 표식이자 죽은 정치의 가장 뚜렷한 징표다.

제도적 독재 혹은 법률적 독재

오늘 우리는 정치가 죽은 암흑의 시간을 맞고 있다. 죽은 정치의 시간은 '민주주의'의 시간이 아니라 '독재'의 시간이다. 정치가 죽은 윤석열 정부의 시간을 우리는 '1차 독재'의 징후로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 1차 독재는 주어진 제도적 공간을 통해 작동하기 때문에 제도적 독재나 법률적 독재로 부를 수 있다. 쿠데타 이후의 군부독재나 공산혁명 이후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달리, 1차 독재는 선거로 집권한 정치권력이 제도와 법률의 형식이 부여하는 권한을 과도하게 남용하는 방식으로 정치사회를 통제하는 권력유지의 교묘한 전략이다.

첫째, 1차 독재는 의회를 제도적 수단으로 무력화한다. 법안에 대한 협력과 대화를 차단함으로써 대치와 대결을 장기화하고 거부권의 남용을 통해 대의정치를 무력화한다.

둘째, 1차 독재는 여당을 도구화한다. 총선 참패와 거듭되는 실정, 급락하는 지지율로 보면 대통령의 탈당만이 여당을 살리는 길이자 정치 도의 일 수 있다. 그러나 당을 놓치면 곧 심판이라는 명백한 현실 앞에 대통령은 여당의 고삐를 한층 더 단단히 조이고 있다. 여당과 그 의원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대통령의 아바타가 되고 말았다.

▲ 한동훈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과 윤재옥 국민의힘 공동선대위원장 등이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 마련된 국민의힘 제22대 국회의원선거 개표상황실에서 출구조사 결과를 시청하고 있다. 2024.4.10 ⓒ 공동취재사진

셋째, 1차 독재는 언론을 제도의 틀 안에서 길들인다. 윤석열 정부는 방송사와 언론사에 대한 기회를 차별화하며, 방송 언론 관련 공공기관에 대한 인사를 통해 실질적 억압과 통제를 시도하고 있다.

넷째, 1차 독재는 국민을 갈라 치기 해서 두 국민으로 만들고 이른바 반국가세력에 대해서는 과도하고 철저히 배제된 제도적 통제를 시도한다. 관행과 관례로 유지되는 일들을 합법과 준법의 이름으로 처벌하는 가혹한 통제는 1차 독재의 일상이다.

제도와 법률의 틀 내부에서 꿈틀대는 1차 독재는 계기와 명분을 만나면 2차 독재의 시간으로 돌진한다. 2차 독재는 국가폭력과 강권통치의 칼을 거침없이 휘두르는 직접 독재를 의미한다. 강제연행, 구금, 고문 등 우리에게 끔찍한 독재의 추억을 남긴 바로 그 독재의 시간을 가리킨다. 1차 독재의 시간은 시민저항의 사이클로 볼 때 '전면적 저항'으로 진화하지 않은 '예비적 저항'의 시간과 맞물려 있다. 예비적 저항의 시간은 정부의 실정과 국민의 기대 사이에 형성되는 심각한 긴장의 시기다. 이 시기는 다양한 저항의 프레임을 생산하지만 이른바 마스터 프레임으로의 전환은 이루어지지 않는 단계다. 예컨대 이 시간에 나타나는 '탄핵'과 '퇴진'의 프레임은 정당한 근거와 내용을 갖춘 완성된 프레임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예비적 저항의 시간에는 가장 민감한 저항의 고리에서부터 저항 행동이 출현하지만 전면적 확장성을 갖지는 못한 수준에 있다.

거대 야당의 소명

1차 독재와 예비적 저항의 현실 앞에서 이제 우리는 1차 독재의 맞은편에 선 그리고 죽은 정치의 시간 안에서 정부 여당과 공존하고 있는 거대 야당의 존재에 주목해야 한다. 지난 총선 이후 민주당은 유례 없이 강력한 정당이 되었다. 압도적 의석과 강력한 당권, 최대 규모의 충성도 높은 당원들이 민주당의 화려한 현실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의회 정치는 국회의 의결과 대통령 거부권을 반복하는 1차 독재의 순환 구조에 갇혀 있다. 윤석열 정권의 1차 독재를 종결짓는 길은 무엇보다도 이 제도적 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데 있고, 이 순환의 족쇄를 탈출하는 힘의 원천은 '저항'의 국민적 공감을 넓히는 데서 찾아져야 한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깨어있는 시민이 정확한 판단력과 행동주의로 무장한 '이성적 군중' 혹은 '영리한 군중'으로 바뀌는 모습에 이미 익숙하다. 그러나 국정농단이 자행되고, 정치가 죽고, 민주주의가 사라지는 것만으로 이성적 군중의 민주적 의지가 자동적으로 표출되지는 않는다. 영리한 군중은 대안의 리더십과 공감적 비전의 존재를 확신하고서야 비로소 기존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데 나선다.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 유성호

죽은 정치의 시대는 비전 없는 정치의 시대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갖춘 거대 야당에도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뚜렷한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정치는 국민의 마음을 얻는 비전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정치적 리더십은 비전을 생산하고 비전을 실현하는 능력이다. 야당은 폭넓은 국민적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비전을 생산할 때 비로소 준비된 정당이 되고 1차 독재의 시간을 마감할 수 있다. 불확실한 미래를 열고, 위기에 대응하는 정확하고도 명료한 비전이야말로 좋은 정치를 만든다. 제대로 된 비전은 국민의 삶이 갈망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그래서 좋은 정치는 당대의 국민이 만드는 시대의 예술이다. 위대한 국민의 역사는 시대가 빚은 비전의 역사이자 그 결실로서의 정치적 걸작의 역사다. 국민 주권의 민주공화제,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경제성장, 독재를 이긴 민주화, 금융실명제, IMF 외환위기 탈출, 남북정상회담, 평창 평화올림픽, 일본 수출규제 위기의 극복, 코로나 19 위기극복 등은 다름 아닌 위대한 비전을 실현해 낸 정치적 걸작의 역사다.

상대의 실정에 기댄 '쉬운 정치'는 야만적 2차 독재의 문을 열어주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이제 거대한 몸집의 야당은 충성스러운 지지자 너머의 정치를 기획함으로써 광범한 국민의 마음을 얻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1차 독재의 해괴한 몰골을 지우고 위대한 비전으로 정치적 걸작의 역사를 추가할 시대의 소명이 거대 야당에 맡겨져 있다. 좋은 비전을 만드는 일은 국민의 마음을 찾는 일이며 흩어진 국민의 마음을 꿰는 일이다. 국민의 마음을 찾아 나서는 겸허한 '탁발의 정치', 정책과 비전의 지혜를 모으는 '집현의 정치'가 절실하다.

▲ 조대엽 포럼 사의재 공동대표 ⓒ 조대엽

*필자 소개 : 조대엽은 현재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고 포럼 사의재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최근 정책전문가들의 싱크탱크 정책마루 선우재를 만들어 상임대표로 있다.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장과 노동문제연구소장, 한국사회연구소장 등을 역임했고 학회활동으로는 한국사회학회, 한국비교사회학회, 한국 NGO학회, 한국정치사회학회 등에서 활동했다. 문재인 정부의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장을 역임했으며 국민경제자문회의 민생분과의장, 금융산업공익재단 대표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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