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유럽(500-1500/1700)에 살았던 신심 깊은 여인들은 종교적인 신비나 환시 체험에 많이 빠졌다. 이런 여인들에 대한 관심사는 대개는 두 부류인 마녀인가? 성녀인가? 에 대한 해석이었다. 어떤 해석이 내려지느냐에 따라 이들의 삶은 천국과 지옥을 왕래했다. 이들 중에는 마녀로 찍혔다가 성녀로 추앙 받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성녀로 추앙 받던 이들이 하루 아침에 마녀로 찍힌 경우도 있었으니 말이다. 마녀가 성녀로 추앙 받는 경우를 보자; 마녀로 고문당하거나 장작불에 처형당했던 이들이 생전이나 사후에 새로운 해석이 따르지 않았었더라면, 이들은 교회에서 영원히 마녀로 배척 받았을 것이다. 그 반대로 성녀가 마녀로 된 경우는; 이들의 비밀이 생전에 들통나지 않았더라면, 이들은 교회에서 영원히 성녀로 머물렀을 거다. 이렇게 마녀냐? 성녀냐! 를 해석하는 꼭지점에는 주로 당시 교회수장들의 취향과 독선적인 판단이 작용했다. 이런 연구의 기초는 가톨릭적인 신학분석이 아니고 종교 현상학적인 연구물이다. 말하자면 1900년경부터 신학에서 떨어져 나온 종교학이라는 딸 덕택에 이런 연구의 기틀 마련이 가능했던 것이다.
신비주의에 빠진 중세 여인들은 성당에 다니면서 열심히 고백 성사를 보고 영성체(예수의 몸이라는 밀떡)를 모신다. 더 나아가 이들은 오직 영성체만 받아 먹을 뿐 일반적인 다른 음식은 먹지 않고도 생명유지를 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뚜껑을 열어보면 꼭 그렇지는 않았다. 이들은 방안 침대 밑에 음식을 비밀스럽게 저장해 두고서는 뒤에서 먹고 있으면서도 거짓말을 일 삼은 이도 있었다. 또 스스로가 거룩한 자라고 표명하고 다니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들 앞에 엎드려 절하고, 심지어 이들의 옷자락을 찢어 잘라서는 성물(聖物)로 간직 하기도 한다. 당시는 이런 성인 성녀들의 물품을 수집 하는 게 혈안이 되었고 이것을 소유하고자 열광했다. 이런 물품이 어떤 거룩한 힘을 뿜는다고 생각 했고, 이런 성물을 지닌 자들은 천국 행이 빠르고 쉽다는 종교적인 생각이 내포 되었기 때문 이기도 하다.
이태리 페루지아에도 살았던 이런 여인의 한 유형을 보자. 축일이 5월 20일 인 골롬바(1467-1503) 성녀는 도미니카 수도원의 평신도 3회원으로 살아간다. 여기서 제 3회란? 1회가 수도승, 사제라면, 2회는 수녀들이고, 3회는 평신도로서 수도자들처럼 살아가는 이들을 칭한다. 매일 고백성사를 보며 늘 속죄하는 삶을 살았던 그녀는 자주 환시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예언적인 역할도 하였다. 그녀 역시 다른 음식은 일절 먹지 않고 오직 성당에서 주는 영성체만으로 산다는 거다. 그녀가 성당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그녀를 마치 살아있는 성모 마리아처럼 공경 했다. 다른 성녀들이 행했던 것처럼 그녀 역시 성스런 종교적인 삶을 살았다 보니 사람들로부터 자연히 살아있는 성녀처럼 추앙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1347-1380: 축일 4월 29일)와 동일시까지 했다. 카타리나 성녀의 행적이 실린 글에서 카타리나 이름 대신에 골롬바로 대치시키면 똑 같다고 여겼을 정도의 흠숭을 받았다.
그녀는 기적도 일으켰다. 1494년 페루지아 시에 페스트가 돌 때 하늘에 성인들이 나타났다지만 페스트 치유에는 별 도움이 안되었고 사람들은 그냥 죽어 나갔다. 이 때 골롬바가 나서서 페스트에 걸린 이들을 치유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회개하는 속죄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외쳤다. 당시는 페스트가 돌면 병원균으로 보기보다는 하느님의 벌로 보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런 병자들에게 손을 대기만 해도 나았고, 심지어 등잔불의 기름으로도 페스트를 치유했다. 후에는 병자 치료에 몰두 하던 그녀 역시도 이 페스트에 감염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병균에도 거뜬히 살아 남았다.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그녀의 꿈속에 나타난 수호성인과 카타리나 성녀가 그녀를 살려 주었다는 것이다. 참 아쉽다. 수호성인과 카타리나 성녀가 어차피 이런 치유능력이 있으면 꼭 골롬바 한 사람만 택해서 살려 줄 것이 아니라 통 크고 관대한 성인답게 신음하면서 죽어가는 이들도 다 좀 살려 주었더라면 좋으련만…… 성인 성녀 치고는 관대함이 철철 넘치지 못하는구나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든다.
이런 그녀의 행위와 말들을 인정한 시주무청은 그녀를 공경하는 행사를 일년에 한번씩 열어줄 정도였다. 그것도 모자랐던지 살아 있는 이 성녀가 가해라도 당할까 봐 두려운 나머지 그녀를 지키는 무장한 호위병까지 두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판단이 두 가지 부류로 갈라졌다. 그녀에게 잔뜩 의구심을 품고서는 기회를 봐서 언젠가 그녀의 정체를 파헤치겠다는 부류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를 옹호하기에 나선 이들이다. 특히 그녀의 고해 신부는 그녀가 성녀임이 틀림 없다는 것을 교황에게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1495년 교황 알렉산더 6세가 페루지아에 왔다. 여기서 우리는 골롬바 얘기에 들어가기 전, 잠시 이 알렉산더 교황을 좀 보기로 하자. 이 교황은 종교적인 경건함과는 거리가 먼, 여러 여인을 축첩으로 거느리고 9명의 자녀까지 두었던 양반이다. 1430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1492년에서 1503년까지 교황 재직을 했다. 그는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부정적인 방법으로 교황 자리를 차지했다. 그가 교황이 되는 데는 삼촌인 교황 갈리스토 3세(1455~1458)의 영향으로 높은 서열로 오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고선 쉽게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그가 추기경이었을 때부터 이미 종교적인 경건성은 뒷전이고, 정치적인 권모술수에 더 능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당시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가난정신을 실천했던 당시의 한 수도자는 길거리의 군중들 앞에서 타락한 당시의 그리스도교를 ‘똥통’이라고 설교까지 하고 다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이 설교가의 목을 친 뒤 불에 태워 죽였다. 사실 이 시절은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 사이에 경계가 없던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자식을 가진 교황도 비일비재했다. 골롬바 얘기와 연결 된 알렉산더 교황의 아들과 딸이 있다. 아들은 체사레 보르지아(1476-1507)다. 그는 열 일곱 살에 주교 품에 올랐고, 열 여덟 살에 추기경으로 임명 되었지만 세속정치에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고 추기경 자리를 포기했다. 그리고 딸 이름은 루크레치아(1480-1519)로 교황은 이 딸을 특별히 사랑했는데 골롬바와도 연관성을 가진다.
이런 뒷 배경을 가지고 다시 골롬바의 얘기로 돌아와 보자. 이 도시에 온 알렉산더 교황은 골롬바를 만났다. 이 교황을 만난 골롬바는 교황의 옷에다 손을 대자말자 몸이 차디찬 돌처럼 변하면서 즉시 신비체험에 빠졌다. 그녀가 이 신비체험에서 깨어나자 교황은 그녀에게 계시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질문 하기에 이르렀고, 교황의 아들 체사레도 여기에 합류한다. 이 두 사람은 그녀의 신비함과 거룩함에 무척이나 놀라워하면서 그녀의 경당에 죄 사함의 면죄부 보증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희대의 탕녀로 알려진 교황의 딸 루크레치아가 나타나자 상황은 돌변했다. 그녀는 먼저 골롬바를 떠 볼 참이었다. 병이 깊을 대로 깊어 이미 의사도 포기한 종양으로 죽어가는 한 아이를 데려와서는 그녀에게 살려보라고 명령했다. 이 때 골롬바는 이 아이에게 치유기적을 일으킬 수 없다고 거부 했다. 그 이유는 이 아이가 혼외에서 태어난 사생아 이기 때문 이란다. 이 과정을 지켜본 교황 딸 루크레치아는 당장 그녀를 마녀로 찍으면서 고발했다. 당시에 루크레치아는 교황 아버지를 등에 없고 막강한 힘 행사를 하던 여인이었다. 또한 교황 아버지의 뜻에 따라 부잣집 아들과 몇 번이나 결혼 한 여인이었다. 그러니 교황 아버지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녀에겐 별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독일 자료에는 그녀의 근친상간 얘기도 자주 나온다. 이렇게 호기심 어린 역사물이 전해 내려오다 보니 독일에서는 이미 그녀에 관한 이런 저런 얘기가 영화로도 찍히고 역사 드라마로 TV에서 방송 될 정도다. 이렇게 막강한 힘을 지녔던 그녀는 골롬바 만을 마녀로 몰아 넣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성인전 저자이자, 영혼안내자, 점성학자 인 그녀의 고해신부에게도 마찬가지로 죄를 뒤집어 씌운다. 그의 죄목은 골롬바의 계시를 세상에 퍼뜨렸다는 거다. 그녀는 이들을 태워 죽일 계획에 까지 돌입했다.
자 보자! 골롬바는 종교적인 신비체험을 하였다. 하지만 교황과 교황의 아들은 그녀를 성녀로 판정 했고, 교황의 딸은 그녀를 마녀로 판정 했다. 어쨌든 그녀는 성녀와 마녀라는 이 두 영역을 넘나 들다가 죽은 것은 틀림이 없다. 정확히 124년이 흐른 1627년, 그제서야 그녀는 후대 교황의 축복을 통해서 정식 가톨릭 성녀로 공포했다.
수공업자의 과부였던 성녀 도로테아 폰 몬타우(1347-1394)도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다른 이들처럼 신비가로서 살면서 유사한 전철을 밟았다. 기쁜 미소를 얼굴에 머금은 그녀는 자주 신비 체험에 빠지는가 하면, 성당에서는 홀로 눈물을 흘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당시에는 눈물을 잘 흘린다는 것은 신의 은총으로 간주 했다. 마녀 재판 때도 마녀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여러 방편 중에는 눈물로 판정하는 잣대가 있다. 재판관이 한 여인을 마녀인지 아닌지 심문 할 때 눈물을 흘려보라 명한다. 만약에 그 여인이 눈물을 철철 흘리지 못하면 당장 마녀로 판정 되었다. 마귀가 마녀와 교통해 눈물 주머니를 말려 눈물을 못 흘리게 만든다는 거다. 시대가 규정한 한 종파의 교리에 묶인 종교적인 옹매듭이 이렇게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도구로 작동 했다. 그럼 오늘날은 이런 식으로 고착된 유사한 종교적인 옹매듭은 과연 없을까? 하고 우리는 스스로 의문을 던져 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도로테아는 자주 고해 신부에게 그녀의 이런 체험을 보고했고, 그녀의 고해신부는 그녀가 신적인 환영에 빠졌다고 단정했고 성녀로 간주 했다.
하지만 그녀를 못 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은 그녀가 마녀 짓을 한다는 죄목을 건다. 이 여인이 가톨릭 믿음의 근본을 뒤 흔들고 있으니 반드시 태워 죽여야 한다고 소리 높였다. 44세가 되던 해인 1391년 7월에 고발 당한 그녀는 단찍히의 주교관 재판장 앞에 섰다. 하지만 그녀는 불에 타 죽는 것을 전연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신을 위해 죽을 것을 자처했다. 자기가 마녀로서 불에 타 죽어야 한다면, 자기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불에 타 죽을 때 드는 장작비용을 자기 주머니에서 지불 하겠다 고 선언 했을 정도다. 다행히 그녀는 장작더미에서 불타는 것은 모면했지만 그녀 역시 살아 생전엔 마녀와 성녀라는 위태 위태한 줄 타기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녀가 죽고 난 몇 년 후인 1404년 사람들이 그녀를 성녀 품에 올리고자 시도 했다가 중단 되었다. 다시 572년의 세월이 흐른 후인 1976년에서야 그녀는 가톨릭의 성녀 품에 올랐다.
이렇게 성녀와 마녀라는 이름은 종이의 앞면과 뒷면처럼 보인다. 그 판가름 또한 모호하다. 누굴 만나서 어떤 심판을 받느냐에 따라서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갈라진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만약에 이들이 후에 성녀 품에 오르지 못했다면 이들은 교회사에 영원한 마녀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죽은 후에 이들이 성녀로 추앙 받았기에 하늘에서 기뻐할까? 만약 이들이 후세기에 구제되어 성녀로 칭송 받지 못했다면 지금 이들은 하늘에서 고통스러워 할까? 단지 말 할 수 있는 것은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사실만을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신학적인 해석이 아닌 종교 현상적인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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