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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 깨부수는 미국판 '계몽령' 드라마 '제로 데이'



  • 오동진 영화이야기

 

  • 입력 2025.03.16 11:00

  • 수정 2025.03.16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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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12.3 내란 데자뷰, 넷플릭스 6부작

오동진 영화 평론가

조지 멀린(로버트 드 니로)은 전직 대통령이다. 뉴욕 허드슨의 사저에서 회고록 집필을 준비 중이다. 늙고, 당연히 아날로그여서 자신의 정치담과 행적, 기억들은 죄다 몰스킨 노트에 손글씨로 적혀 있다. 아니면 지금은 거의 미국 같은 나라에서만 쓰는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돼 있다. 그는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고지혈증약인 리피토(Liptor)를 먹고(이 약을 먹는 장면이 나중에 중요해진다) 개인 풀에서 수영을 한 후에 애정하는 리트리버 강아지 델과 조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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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1분 간의 사고로 평화로운 일상 깨져버린 전직 대통령

그는 존경받는 대통령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니 사실은 매우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재선 가도에서 스스로 중도하차 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렇게나 아꼈던 아들이 약물 과용으로 죽었거나 자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회인 6회쯤 갔을 때는 개인적으로 엄청난 비밀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건 마치 프랑스의 미테랑이 ‘저질렀던’ 일과도 같은 것이다. 미테랑은 대통령 직을 떠나지 않았지만 드라마 속 대통령 멀린은 그 비밀을 간직하기 위해 권력을 포기한 셈이 된다.) 딸 알렉산드라, 애칭으로 알렉스(리지 카플린)는 뉴욕 주의 한 지역구 하원의원이다. 멀린의 아내 실라(조안 알렌)는 연방법원 대법관 임명을 앞두고 청문회를 준비 중이지만 하원의장인 리처드 드라이어(매튜 모딘)때문에 난항이 예상된다.

 

이런저런 갈등과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회고록 출판사에서는 그에게 고스트 라이터(대필 작가)를 보내 원고에 속도를 낼 요량이다. 하지만 멀린은 대필을 거부한다. 이 작가는 시내로 돌아가는 길에 엄청난 사고를 당해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넷플릭스 6부작 드라마 ‘제로 데이’의 모든 시작은 바로 이 지점 부터이다. 일명 제로 데이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미국 전역에 1분 간 모든 접속망, 네트워크가 끊어졌다. 누군가가 사이버 테러를 벌인 것이다. 이 단 1분 간으로 교통 신호등이 망가지고 관제탑의 통신 라인이 끊겼으며 고속철도의 송수신이 망가졌다. 곳곳에서 사고가 터져 단 1분 만에 3402명이 사망했다. 금융 네트워크도 엉망이 된다. 방송 통신도 먹통이 된다. 사람들은 아무 것도 검색할 수가 없게 되고 세상은 깜깜이가 됐다가 다시 켜졌다.

 

사이버 테러 막기 위해 전 대통령에게 주어진 막강한 권력

사이버 테러리스트들은 그 와중에 2차 공격을 예고한다. 미국은 패닉에 빠진다. 현직인 흑인여성 대통령 에블린 미첼(앤젤라 바셋)은 국민통합형 지도자가 나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지 멀린이 적격이라고 생각한다. 특별 보좌관이었던 로저 칼슨(제시 플레먼스)에게 지시해 멀린을 설득한다. 멀린은 미첼의 요청을 수락하고 이른바 ‘제로 데이 위원회’의 수장 직을 시작한다. 하루빨리 테러리스트를 잡아 들여 사태를 해결하라는 취지로 무소불위의 권한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것 역시 나중에 문제가 된다. 그건 마치 조지 부시가 2001년 테러로 인한 대 참사 이후 애국법(Patriot Act)을 만들어 테러로 의심되는 사람을 영장없이 체포 구금하게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늘 권력이 비대해지면 문제가 발생하고 조지 멀린도 중간에 그 같은 실수를 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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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데이란 말은 디지털 학술 용어이다. 파악되지 않은 소프트웨어의 취약점을 공격하는 사이버 침해를 의미한다. 원래 사이버 네트워크는 하나로 통일하거나 지나치게 표준화하면 한 번에 무력화 될 우려가 크기 때문에 소프트웨어를 다양화한다. 그런데 그 다양한 소프트웨어 중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요소를 찾아 공격함으로써 어디서 누가 어떻게 했는지를 알 수 없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멀린의 ‘제로 데이 위원회’는 그 파악되지 않는 테러단의 실체를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온갖 정치적 음모가 자행된다. 하원의장 드라이어는 대놓고 멀린의 자리를 노린다. 현직 대통령보다 더 한 권한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첼 대통령은 국민 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 ‘어쨌든’ 공격 대상이 필요하다. 그녀는 러시아를 공격하려 한다. 빅 테크 기업의 CEO 모니카 키더(가비 호프먼)는 멀린의 위원회가 무능한 것은 전 대통령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라고 공격한다. (멀린은 치매와 환각 증세가 의심되는 중이다. 그가 먹는 약이 그래서 중요해진다.) CEO 키더는 온갖 정보를 쥐고 있다. 정치평론 유튜버로 오직 조회수와 수익금을 위해 수많은 악소문과 가짜 뉴스를 퍼뜨리고 있는 에반 그린(댄 스티븐스)은 누군가로부터 정보 조작을 위한 사주를 받고 그쪽과의 야합을 서슴지 않는 중이다. 국가 비상사태이지만 정치와 나라는 사분오열에 더해 팔분십열까지 일으키는 중이다.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걸 몰랐던 단 1분짜리 경고, 그게 죄인가?”

놀라운 것은, 멀린이 겨우겨우 실체에 접근했을 때 그 핵심인사로부터 듣게 되는 말이다. 정말 생각하기도 싫지만 이 진술은 지금 한국 내란 세력의 우두머리 윤석열의 말을 집약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현실과는 다르게 드라마 대사인 만큼 좀 더 지식인스러운 톤이긴 하다. 그 대사를 정리하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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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누군가 제안했다. 사람들에게 겁을 줄 수가 있다. 1분이면 우리가 얼마나 취약하고 연약한지 일깨울 수 있다고 했다. 1분의 경고면 된다고. 그건 말이 된다,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했다. 정말 중요한 게 뭔지를 사람들이 깨닫는다면 모든 소음, 헛소리, 거짓말을 듣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의 말을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 일이 일어나도록 놔뒀다. 하지만 누가 죽을 줄은 몰랐다.”

 

(멀린이 중간에 말한다) “그래서 모두가 한패가 됐군?”

“그랬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이 나라가 마지막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 언제인가. 우리는 18개월 동안 단 하나의 법안도 통과시키지 못했다.”

 

(다시 멀린의 중간 대답) “그렇다고 그건 해결책이 될 수 없어.”

“우리는 당신과 달리 모험을 했다. 상황을 개선하려 했다. 당신은 당신의 손에 피와 오명을 안 묻히려고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그때는 그게 옳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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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멀린은 위원회의 최종 보고서를 만들며 테러 일당들, 사실은 평소 멀쩡하게 같이 국정을 운영하고, 나라를 걱정했던 사람들을 반역죄, 내란죄로 고발한다. 그가 그렇게 하기까지 여기저기서 정치적 타협을 하라고 종용하고 충고한다. 하지만 그의 최종 결정은 올바른 쪽이다. 비록 천륜을 어기는 일일지라도.

 

타협하지 말고 정치적 올바름 실현하라는 영화의 메시지

할리우드 드라마답게 결말과 결론이 다소 환상적이다. 현실은 아마도 타협을 했을 것이며, 비밀의 핵심과 실체는 베일에 가려진 채 놔뒀을 가능성이 많다. 흔히들 말하듯이 역사에 맡긴다면서. 그러나 6부작 드라마 ‘제로 데이’가 가져가려 했던 가치의 목표는 역설적으로 그렇지 못한 미국의 현실, 혹은 한국과 같은 현실에서 대중들이 허구의 얘기나마 정치적 올바름이 실현되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은 그런 얘기를 보여주는 것조차 어려운 시대임을 강조하려 한 건 아닐까?

 

그 시청의 쾌감을 갖게 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미국 사회를 바꾸고 세계의 극단주의자들, 한국에서처럼 확신에 가득차 국가 폭력을 동원하는 자들을 교화하는 첫 단계가 될 수 있음을 고려했을 것이다. 예측컨대 아마도 이 드라마의 결론을 두고 제작진, 감독과 대본 작가, 심지어 배우들 간에도 상당한 난상토론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대통령 조지 멀린은 마치 문재인 같은 느낌을 준다. 멀린 역시 도덕적 완결성을 위해 노력했지만 개인적인 흠결도 많았으며, 심지어 오판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비서실장 발레리 화이트홀(코니 브린튼)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특별 보좌관 로저 칼슨은 이전에 마약 문제가 있었고 검은 세력에게 빚이 있으며 그것 때문에 늘 곤경에 처한다. 로저 칼슨이야말로 조지 멀린을 가장 먼저 배신할 수 있는 인물이다. 게다가 그는 멀린의 딸 알렉스와 애인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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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장광설로 떠들지 않고 듣고 적는 대통령을 원하지

이 복잡한 인물 계보를 뚫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데에 있어 드라마 ‘제로 데이’는 중간에 길을 잃기도 한다. 다소 버거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소재와 주제가 주는 무거움 때문에 시선을 놓치지 않게 한다. 국민을 ‘계몽하기’ 위해 한국의 대통령과 일부 정치군인들은 야합을 통해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 본보기의 카드를 미국의 트럼프가 만지작거리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시킨다. 그 전에 영화와 드라마, 연극과 공연, 미술과 음악은 사람들에게 불안의 전조, 그 배경과 원인을 알리고 경계시켜 준다. 그 ‘성의’를 눈치 채느냐 못 채느냐는 철저하게 보는 사람 몫이다. 적어도 ‘제로 데이’는 국민 우민화가 가장 큰 문제라고 보고 있다. 그걸 귀담아 듣게 만든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좋은 점은 조지 멀린이 늘 사람들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보다는 듣고 또 듣는다. 그리고 몰스킨 노트에 자신의 생각을 적는다. 멀린의 듣는 모습이 그렇게나 좋게 보이는 것은 한국 시청자만이 느끼는 대목일 수도 있겠다. 한국의 대통령, 파면 직전의 대통령은 늘 혼자서 1시간을 떠들었다지. 지도자는 말하기보다 듣기에 능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돼야 한다. ‘제로 데이’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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