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에서 경찰의 지프차 돌진 공격으로 대규모 항쟁이 촉발되었던 1980년 4월 21일로부터 정확히 한 달이 지난 5월 21일 수요일. 전라남도 광주시 전남도청 앞과 금남로 일대에서 시민들과 계엄군 사이에 대치 상황이 발생했다. 시민들과 대치하던 계엄군은 전남도청 앞에서 갑자기 집단 발포를 시작했고 당시 중3 학생이던 김완봉(15세)군 등 34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흥분한 시민들은 총기를 탈취하여 시민군을 조직했고 계엄군은 광주 외곽으로 물러났다. 광주의 치안은 시민군과 수습대책위원회로 넘어갔다. 이 날은 광주 사건의 성격이 민주화 시위에서 계엄군에 대항한 시민 무장항쟁으로 전환된 핵심 분기점이었다.
사북과 광주의 계엄군... 11공수특전여단
5월 21일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시위대를 향해 집단 발포를 한 부대 중 하나는 사북에 투입 예정이었던 11공수특전여단 62대대였다. 이 부대는 3공수, 7공수와 함께 시위대 진압을 맡은 주력 부대였으며, 곤봉과 대검을 사용하여 시민들에게 잔혹한 유혈 진압을 가했다.
군 기록과 계엄군 진술을 종합하면, 11공수여단은 5월 19일 새벽 4시부터 제7공수여단 33, 35대대로부터 광주 작전 거점을 인계 받았다. 이후 오전 10시 30분에 바로 62, 63대대 병력을 광주로 증원했다. 11공수 62대대는 5월 19일 15시경 도청 앞 금남로 남쪽에서, 63대대는 전남여고 맞은편 중앙국교 앞 사거리에서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은 '주남마을 민간인 학살'의 장본인이기도 하다. 11공수여단 62대대 부대원들은 5월 22일 새벽 광주에서 화순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주남마을에 매복해 있다가, 5월 23일 오전 9시 30분쯤 나주 방면으로 향하던 미니 버스 1대에 무차별 사격을 가해 탑승객 18명 중 15명을 사살했다. 생존자 중 중상자인 청년 2명도 11공수여단 본부 작전보좌관의 처리 명령에 따라 인근 야산에서 총살 당했다. 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증언자는 여고생 홍금숙이었다.
다음 날인 5월 24일, 제63대대는 주남마을에서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던 중 송암동 효천역 부근에서 전투교육사령부대(보병학교 교도대)와 오인 교전을 벌였다. 이 교전으로 대대원 9명이 사망하자, 63대대는 이에 대한 화풀이로 송암동 인근 마을을 수색하며 초등학생 전재수부터 6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불문하고 민간인을 마구 학살했다. 이때 시민군이었던 김종철과 주민 권근립, 김승후, 임병철 등이 사살됐다.
5월 27일 새벽 11공수특전여단은 전남도청으로 진입하여 최후 진압 작전을 벌였다. 도청에 남아 있던 시민군과 학생들이 마지막 항전을 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최종 진압되었다.
사북을 위해 투입 준비를 마쳤던 11공수를 주력부대로 광주민주화운동이 진압된 바로 다음날, 5월 28일 <경향신문>에는 "사북사태 관련 모두 26명 구속"이라는 짤막한 기사가 실려 사북에서 일어난 사태도 일단락이 되었음을 알렸다.
1980년 5월의 마지막 날을 장식한 기사는 '국가보위비상대책원회가 설치되었고, 그 위원장에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가 취임했다는 소식이었다.
항쟁의 봉우리와 사건의 골짜기
선과 악이 뚜렷이 구분되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건에서 선악의 구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때때로 폭력의 가해자가 폭력으로 되갚음 당하기도 하고, 폭력의 피해자가 어느 순간 폭력으로 대항하기도 한다. 가해와 피해가 교차되는 지점이 얼마간 존재하는 것이다.
각자가 어느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는가, 어느 시점에서 사건을 바라보았는가, 그리고 무엇을 주로 보고 들었는가에 따라 사건에 대한 개인의 평가는 종종 일반적인 평가와 궤를 달리한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숨지거나 크게 다친 당사자와 군경의 가족들에게는 시위 군중에 대한 원망과 반감이 앞설 뿐 '독재타도'니 '민주화'니 하는 대의는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반면, 시위 과정에서 군경의 총칼에 숨지거나 큰 피해를 입은 학생과 시민들에게는 계엄군에 대한 원한과 분노가 치밀어오를 뿐, '질서'니 '법치'니 하는 말들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가 되는 것은 당사자의 기억이 아니라 집단의 기억이다. 사북과 광주는 바로 여기서 극명하게 갈렸다. 사북에 대한 집단의 기억은 심하게 왜곡되었고 광주에 대한 그것은 엄정히 바로잡혔다. 시간이 갈수록 '광주'는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사북'은 더 많은 사람들이 잊었다.
우리는 광주에서 맞부딪힌 두 방향의 폭력 중에서 더 압도적인 계엄군의 폭력을 기억한다. 그것은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카메라에 비친 시민 항쟁의 장면들로서, 절망적으로 고립된 광주 시민을 측은히 바라보는 외부자의 시점이다. 그리하여 광주는 국가 폭력에 처참하게 짓눌린 힘없는 시민들의 고난사이자 영웅적인 저항의 서사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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