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추계리. 친일파 송병준이 99칸 별장을 짓고 영화를 누리던 자리다. 그 큰 별장은 사라졌다. 물 빠진 연못과 무너진 정자 터, 녹슨 쇠다리만 남았다. 너른 부지에는 지금 온누리교회가 들어서 있다. 뉴탐사 역사탐사팀이 역사독립군 배기성 강사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영화는 누렸으되 남은 건 폐허뿐
배기성 강사는 별장터에 서서 송병준을 이렇게 소개했다. "이완용과 송병준은 누가 더 나쁜 친일파인지 서로 1등이라고 다툴 수 있는 유일한 같은 급"이라고 했다. 조중응, 이병무 같은 정미칠적도 친일에 부역했다. 그러나 배기성 강사는 "이완용과 송병준은 수괴급"이라며 둘을 따로 떼어 놓았다.
연못 이름은 영화지다. 빛날 화에 영화로울 영을 썼다. 한가운데 작은 섬이 있고 그 위에 정자가 놓였다.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호리병 모양 연못을 채웠다. 지금은 물이 빠져 석축만 드러난다. 섬으로 건너가던 다리는 발길이 끊긴 지 오래다. 배기성 강사는 "태어나서 처음 와봤다"고 했다. 친일파가 대대로 누린 영화의 자취가 폐허로 가라앉아 있었다.
표지석이 가리키는 일진회
별장터 한쪽에는 표지석이 서 있다. 적힌 글귀는 이렇다. 이곳은 친일 세력의 거점이자 일진회 지역민의 집합소였다. 1907년 8월 24일 양지에서 용인 의병과 일본군이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은 송병준 별장으로 도주했고, 일제는 순사 수십 명을 배치해 의병 공격에 대비했다. 별장이 친일의 소굴이었던 탓에 의병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됐다.
배기성 강사는 송병준과 일진회를 떼어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일진회는 한일자, 곧 조선과 일본은 하나라는 뜻을 내건 친일 단체였다. 송병준이 사실상 만들었다. 다만 회장 자리는 이용구에게 넘겼다. 배기성 강사는 "내가 만들었는데 내가 회장을 하면 모양이 안 난다며 이용구를 바지회장으로 내세웠다"고 전했다. 1904년 양지 현감을 지낸 송병준은 이 일대 풍광에 반해 99칸 별장을 지었다. 정미칠적으로 자작 작위를 받았고, 경술국치에 기여한 공로로 백작에 올랐다.
교회로 넘어간 땅, 남양주로 옮겨진 별장
별장 부지는 손바뀜을 여러 번 거쳤다. 6·25 때는 피난민이 모여 살았다. 전쟁 뒤에는 상이군인 수용소가 됐고, 1950년대 중반에는 전쟁고아원으로 쓰였다. 1970년대 초에는 한 권사가 저택을 사들여 기독교 수양관을 차렸다. 1990년대 들어 저택을 허물고 온누리교회가 들어섰다. 마지막에는 한 신자가 이 땅을 사들여 교회에 기부했다. 송병준에게서 직접 받은 땅은 아니다.
별장이 통째로 사라진 것도 아니다. 기와집 일부가 경기 남양주 평내 궁집으로 옮겨져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용인집이라 부른다. 용인에서 온 집이라는 뜻이다. 헐릴 뻔한 한옥을 옮겨다 놓은 것이라 비교적 깔끔하게 보존돼 있다. 건물이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진다. 표지석 하나, 옮겨진 한 칸이라도 남은 게 그래서 다행이다.
부평 캠프 마켓과 빼앗긴 땅
배기성 강사는 송병준의 출발을 민영환의 식객으로 짚었다. 을사늑약 뒤 민영환이 자결하자, 송병준이 칼을 빼들고 유족을 겁박해 인천 부평 땅을 빼앗았다고 했다. 그 땅이 미군기지 캠프 마켓이다. 송병준 후손은 캠프 마켓을 비롯한 2500억원대 땅을 돌려달라며 반환 소송을 냈다. 결과는 패소였다.
배기성 강사는 이 소송의 뒷이야기를 직접 들었다고 했다. 최용규 전 의원과 홍경선 보좌관이 일본 홋카이도 땅까지 뒤져 반환 불가 의견을 재판부에 냈다고 했다. 배기성 강사는 "홍경선 보좌관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라고 밝혔다. 인천 부평에서는 시민단체가 친일 재산 환수 운동을 벌였다. 용인에서는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별장터가 교회로 넘어갔다. 두 도시의 길이 갈렸다.
끊기지 않은 그림자, 아들과 사위
송병준의 아들 송종헌도 아버지의 길을 걸었다. 배기성 강사는 송종헌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종을 곤장으로 때려죽였다고 전했다. 한양에서 돌아오던 송종헌에게 고개를 돌린 그 종의 부인을, 송종헌이 장총으로 쏴 죽였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1927년의 일이라고 했다. 송종헌은 광복 뒤 반민특위에 체포됐고, 1949년 옥중에서 뇌졸중으로 죽었다.
사위 구연수에게로 그림자는 이어진다. 배기성 강사는 구연수가 명성황후 시해의 마지막 가해자라고 주장했다. "죽이고 나서 자기가 죽인 걸 덮으려고 기름을 뿌려 시신을 불태웠다"고 했다. 구연수의 아들이자 송병준의 외손자가 구용서다. 구용서는 초대 한국은행 총재와 상공부 장관, 초대 산업은행 총재를 지냈다. 배기성 강사는 "친일파는 자기 역사를 지우려고 자신뿐 아니라 관련된 모든 역사를 지운다"며 "그래서 우리 일제강점기는 그 자체로 거대한 공백"이라고 했다.
송병준의 마지막도 배기성 강사의 설명으로 들었다. 송병준은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조선일보 사장을 지냈다. 그 무렵 박헌영, 김단야, 강달영, 조봉암 등 민족주의 성향 기자들과 부딪쳤다. 조선총독부가 기사 문제로 압박하고 기자들은 굽히지 않으니, 송병준이 화병으로 쓰러졌다는 것이 배기성 강사의 이야기다. 송병준은 1925년 뇌경색으로 죽었다. 배기성 강사는 "송병준도, 아들 송종헌도 뇌경색으로 죽었다. 천벌"이라고 했다.
지난 6·3 지방선거에서 용인시장에는 국민의힘 이상일 후보가 당선됐다. 더불어민주당 현근택 후보는 떨어졌다. 배기성 강사는 현근택 후보가 됐다면 별장터를 민족반역자 다크투어 거점으로 만들기로 했고, 자신을 현장 진행요원으로 임명하겠다는 약속도 받았다고 했다. 이상일 시장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그 구상은 사라졌다. 6월 6일 현충일, 이재명 대통령은 친일 부당재산 환수를 다시 꺼냈다. 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16년 만에 부활을 예고했다. 송병준이 영화를 누리던 연못은 오늘도 물이 빠진 채 그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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