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이 통과되기 전까지 미국 남부의 많은 흑인들은 문해력 시험과 인두세, 각종 행정장벽 때문에 사실상 참정권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U.S. National Archives). 미국 민주주의의 역사 역시 자유를 둘러싼 끊임없는 배제와 확장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이러한 문제는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법적으로는 자유로운 노동계약이 존재했지만, 실제 노동자들의 삶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The 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 1845)』에서 당시 맨체스터 노동자 거주지역의 참혹한 현실을 기록했습니다. 하수도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빈민가에서는 전염병이 반복적으로 확산됐고, 아동노동과 하루 14~16시간 노동이 광범위하게 이뤄졌습니다.
노동자들은 법적으로는 자유로운 시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존을 위해 노동을 강요받고 있었습니다. 형식적 자유는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 자유는 여전히 불평등했습니다. 굶주림 속에서 맺는 계약은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 계약인가. 이 질문은 이후 노동권과 사회권 논의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자유의 개념은 새로운 층위로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자유는 더 이상 단지 왕권으로부터의 자유만을 의미하지 않게 됩니다. 경제적 종속과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차별과 배제로부터의 자유, 정치적 참여의 자유까지 포함하는 방향으로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들어 자유의 문제는 개인의 권리를 넘어 국가의 독립과 주권의 문제로까지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식민지 지역에서 자유는 단순한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외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정치·경제 질서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인도의 독립운동, 알제리의 반식민지 투쟁, 베트남 독립운동, 중남미 민족주의 흐름 역시 이러한 맥락 속에서 등장했습니다. 특히 중동 산유국들에게 자유의 문제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습니다.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역시 단순한 에너지 위기만은 아니었습니다. 중동 산유국들은 석유 통제권을 서구 강대국 중심 질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국가적 자율성과 주권의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Daniel Yergin, 『The Prize: The Epic Quest for Oil, Money & Power』, 1991).
반대로 냉전 시기 미국의 중남미 개입은 “자유세계 수호”라는 명분 아래 타국의 민주주의와 주권을 침해한 사례로 비판받아 왔습니다. 1953년 미국 CIA와 영국 MI6은 이란의 모하마드 모사데그(Mohammad Mosaddegh, 1882~1967) 정부 전복에 개입했습니다. 모사데그는 영국계 석유회사의 국유화를 추진하고 있었습니다(CIA declassified documents / Stephen Kinzer, 『All the Shah’s Men』, 2003). 1973년 칠레에서는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1908~1973) 정부가 군사쿠데타로 붕괴됐고, 이후 피노체트 군사독재가 등장했습니다. 미국의 직·간접 개입 문제는 이후 미국 상원 처치위원회(Church Committee) 보고서 등을 통해 국제적으로 논란이 됐습니다(U.S. Senate, Church Committee Reports, 1975). 즉 ‘자유’라는 이름은 때로는 타국의 자유와 주권을 제한하는 명분으로도 사용돼왔던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자유는 결코 고정된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자유는 시대마다 다른 층위로 확장돼왔습니다. 왕권으로부터의 자유, 귀족 특권으로부터의 자유, 자본권력으로부터의 자유, 식민지배로부터의 자유, 국가폭력으로부터의 자유, 혐오와 차별로부터의 자유까지. 자유의 역사는 결국 “누가 인간으로 인정받는가”를 둘러싼 투쟁의 역사와 연결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현대사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 놓여 있습니다.
현재의 대한민국 헌법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을 기본으로 합니다. 헌법 1장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 민주주의는 결코 자동으로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시민들은 현재의 1987년 헌법체제를 만들기 위해 해방 이후 40여년 이상을 독재정부에 맞서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했습니다. 오랫동안 국가폭력과 검열, 독재와 혐오정치의 위험 속에서 자유를 지켜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사회는 또 다른 위기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 대한 조롱, 5·18민주화운동 왜곡, 제주4·3 음모론, 이태원 참사 이후 온라인 공간에서 확산된 혐오와 냉소는 단순한 인터넷 문화 현상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공동체의 슬픔은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타인의 고통은 밈(meme)과 놀이문화로 소비됩니다. 시민적 공감 능력은 냉소 속에서 마비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극우정치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시민적 연민과 공감 능력을 약화시키고, 끊임없이 혐오와 조롱, 피해의식과 음모론을 확산시키며 공동체 내부의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우리는 자유의 또 다른 본질과 마주하게 됩니다. 자유는 언제나 권력과 함께 존재해왔다는 사실입니다.
■ 민주공화정은 왜 자유를 ‘공동체’와 연결했는가
재산과 경제력의 확대는 곧 자유의 확대와 연결됐고, 반대로 경제적 종속은 자유의 제한으로 이어졌습니다. 절대왕정이 추구했던 왕의 절대적 자유 역시 결국 권력과 재산, 군사력을 독점할 자유에 가까웠습니다. 그것은 시민과 상공업자, 신흥 자본가 계층이 요구했던 경제적 자유와 권한 확대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결국 절대왕정은 시민혁명의 도전에 무너졌습니다.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공동체 전체의 자유가 아니라 특정 권력집단과 엘리트, 거대자본, 국가기구가 자신들의 권력을 무제한적으로 행사할 자유를 추구한 체제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결국 시민 공동체 전체의 자유를 짓밟고 파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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