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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곧 망한다"…그들은 비밀을 알고 있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 해방과 분단, 첫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최하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12-15 오전 12:07:57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해방과 분단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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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그동안 한국전쟁, 친일파, 학살 문제를 살폈다. 이 사안들은 해방 공간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수많은 연구자가 해방 공간에 관심을 둔 것도 그만큼 이 시기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 공간을 다각도로 조명했으면 한다. 먼저 한국인들은 해방을 어떻게 맞이했나.

서중석 : 우리가 현대사에 관심이 없다 보니까 막연히, 해방이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어떻게 해방을 맞았는지를 잘 모른다. 해방을 어떻게 맞았는지를 여러 면에서 살펴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았다는 거다. 해방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게 아니다. 끊임없이 항일 투쟁을 해온 분들이 중심이 되어 주체적으로 맞았다. 이 점이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처럼 주체적으로 해방을 맞은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이 점을 적당히 넘겨서는 안 된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새로운 사회를 맞이하고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한 활동을 해방된 바로 그날부터 구체적으로 했다. 해방된 그날부터 스스로 치안을 맡고 행정 등에 관한 여러 일을 직접 해나간 곳은 (전 세계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도 우리가 대단히 뜻깊게 해방을 맞이했다고 얘기할 수 있다.


프레시안 : 1945년 당시 상황, 구체적으로 어떠했나.

서중석 : 그해 8월 15일 아침 8시경, 여운형은 조선총독부의 제2인자인 엔도 정무총감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엔도 정무총감은 천황이 항복을 선언할 것이라고 하면서 치안 문제를 부탁했다. 그때 여운형이 엔도로서는 기가 막힐, 깜짝 놀랄 만한 주장을 한다. 엔도는 단순히 치안 협조를 부탁했을 뿐인데, 여운형은 감옥에 갇혀 있는 정치범(사상범)과 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고 한다. 그리고 '치안은 우리가 맡을 것이니 방해하지 말라', '학생 훈련과 청년 조직화 같은 것에 간섭하지 말라'고 한다. 한마디로 우리 스스로 새 나라를 건설해나가겠다, 주체적으로 해방을 맞아 일을 해나가겠다는 것을 엔도 정무총감한테 분명하게 얘기한 거다.

당시 엔도 정무총감은 굉장히 당황한 것 같다. 물론 일제가 패망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가 짐작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육군을 중심으로 마지막까지 옥쇄 작전을 펴면서 절대로 항복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던 터여서, 일제가 그렇게 쉽게 망할 거라곤 엔도도 짐작을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항복이 결정된 후 조선총독부는) 일제가 한국에 와서 그간 저지른 악행을 볼 때, '일제가 망했다. 항복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엄청난 해악을 끼칠 것이라고 보고 여운형을 특별히 초치해 치안을 부탁한 것이다. 그런데 여운형은 '우리 스스로 새 나라를 세울 구체적인 작업을 하겠다'고 한 것이다. 워낙 다급한 상황이었기에 엔도 정무총감은 그걸 수락했다.


프레시안 : 그 직후 건준과 치안대 조직은 급속히 확산됐다.

서중석 : 그렇다. 건준은 그날 바로 활동에 들어갔다. 8월 16일에는 여운형의 지시에 따라 장권을 중심으로 중앙(건국)치안대가 발족한다. 이 (중앙건국)치안대가 굉장히 발 빠르게 전국 각지에 치안대를 조직하는가 하면, 각지에선 각지대로, 남북 할 것 없이 스스로 치안대를 만드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인들이 '해방이다! 정말 우리나라가 생기는구나!' 이런 해방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치안대가 완장을 두르고 '이제 치안을 우리가 맡게 됐소! 모두 협력해 새 나라를 세우는 일을 같이 해나갑시다!' 이러면서 동네와 거리를 오가며 얘기하고 다니면서다. 그전까지 일본 순사라든가 일본 관리들한테 얼마나 우리가 심하게 공출당하고 압제를 당했나. 그야말로 순사가 오면 애도 울음을 딱 그친다는 공포 분위기 아니었나. 그런데 하루아침에 세상이 변하니 '이거야말로 해방이고 이제 우리가 역사의 주인이 되는 것 아니냐'는 감격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치안대와 건준은 전국적으로 조직된다. 건준 지부의 경우 8월 말까지 전국에 145개가 만들어진 걸로 나온다. 건준은 남한에만 있었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북한에도 있었다. 예컨대 북한에서 제일 중요한 지역인 평양이 있는 평남에도 조만식을 중심으로 건준 평남 지부가 만들어진다. 북한에서 공업이 가장 융성하고 제일 큰 화학 콤비나트가 있던 함남에서도 도용호를 중심으로 건준 함남 지부가 바로 발족하는 걸 볼 수 있다. 이렇게 건준이 전국적으로 조직되고 각 지역에서 치안대가 조직돼 활동했다는 것, 이것 자체도 굉장히 뜻깊은 것이다.

 

▲ 1945년 해방에 환호하는 한국인들. ⓒ연합뉴스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해방? 우리는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았다

프레시안 : 이 무렵 해외 독립 운동 세력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나.

서중석 : 우리는 일제한테 강점당한 그날부터 독립 운동을 해왔다. 일본이 독일과 한편이 돼 연합국과 싸우게 됐다고 할 때부터 한국의 많은 독립 운동 세력은 일제가 머잖아 망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언제 망할 것인가, 이것까지는 생각하기가 어려운 거였다. (어쨌건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독립 운동을 한 단계 높여 나라를 세우기 위한 건국 사업에 들어갔다. 해외에 있던 독립 운동 세력도 각지에서 해방을 맞을 준비를 다 하고 있었다.

중경(충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일본이 진주만 기습 작전을 펴자마자 바로 일제에 선전 포고를 했다. 그리고 일제의 패망에 대비해 조소앙을 중심으로 건국강령을 만들어 채택했다. 1945년 8.15를 전후해서는 해방을 맞을 준비를 더 구체적으로 하고 있었다.

연안(옌안)을 중심으로 한 조선독립동맹, 그 세력도 해방을 맞을 구체적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선의용군과 조선독립동맹 지부가 각지에 흩어져 있었는데, 연안으로 집결하면서 (해방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또 만주 빨치산들도 하바롭스크 부근에 있는 흑룡강(헤이룽강) 옆에서 교도려라는 것을 편성해 활동하면서, 1945년 7월이 되면 해방을 맞기 위한 구체적 조직을 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해외 각 지역의 독립 운동 세력이) 이렇게 모여 준비는 했지만, 8.15 해방이 됐을 때 고국에 바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프레시안 :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두 가지 때문이었다. 하나는 거리다. 중경이 얼마나 먼가. 지금도 비행기로만 3시간 넘게 걸리지 않나. 또 연안은 서안(시안)에서도 한참 더 들어가는 궁벽한 곳이다. 그래서 중국공산당 본부가 거기에 차려져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한국까지 오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바롭스크 쪽도 마찬가지다. 한국에 들어온다는 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이뿐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은 해외 독립 운동 단체가 들어오면 한국 문제를 두 나라가 중심이 돼 풀어가는 데 문제가 생긴다고 본 것 같다.

프레시안 : 중국과 소련에 있던 세력뿐만 아니라 미국에 있던 이승만도 바로 귀국하지 못했다.

서중석 : 해방이 됐을 때 이승만은 귀국을 서둘렀다. 그런 데는 굉장히 발 빠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에서는 이승만을 상당히 안 좋게 생각했다. 그래서 여권을 내주지 않았다. (이승만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들어오려 했지만 그게 잘 안됐다. 그러다가 아마 남한에 주둔하던 하지 사령관의 건의에 따른 것이 아닌가 싶은데, 도쿄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에서 군용기를 보내 이승만의 귀국을 도왔다. 그렇게 해서 이승만은 10월 16일이 돼서야 국내에 들어온다. 해방 후 두 달이 지나서야 들어온 거다. (이승만은 10월 4일 미국 워싱턴에서 출발했다.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하와이까지는 민항기를 이용했고, 하와이에서 일본까지는 군용기에 탑승했다. 맥아더는 서울에 있던 하지를 불러들여 도쿄에서 이승만과 회동했다. <편집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쪽은 (귀국이) 훨씬 더 늦었다. 11월 23일이 돼서야 제1진이 국내에 들어오고 제2진은 12월이 돼서야 들어온다. 그러면 김일성 쪽은 (한반도와 맞닿은) 소련하고 가까웠으니 빨리 들어왔을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한반도를 공략하게 돼 있던 부대인 제25군의 작전 등의 문제 때문에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김일성이 귀국한 건 9월 19일이다. 예전에 여러 설이 있었는데 이날이 확실하다. 소련 자료에 그렇게 나온다. 그날 김책 등과 함께 원산에 상륙한 걸로 돼 있다. 그러니 김일성 쪽도 (해방 후) 한 달이 지나서야 들어온 것이다.

조선독립동맹 쪽도 늦게 귀국했다. 이 세력이 들어오는 것을 소련이 막았다. 중경 임정이 서울에 들어오는 걸 미국이 상당히 오랫동안 지체시킨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김두봉을 비롯한 조선독립동맹의 주요 지도자들이 북한 땅에 들어오는 건 12월 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신탁 통치? 한국은 그렇게 수준 낮은 나라가 아니다

프레시안 : 해외 독립 운동 세력의 귀국이 그렇게 늦춰진 만큼, 국내에 있던 이들의 역할이 더 막중했을 것 같다.

서중석 : 그렇다. 해외에서도 해방을 맞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고 얘기할 수는 있지만, 지리적으로 너무 멀었고 이들이 들어오는 걸 연합국이 지체시켰다. 해방을 맞을 만반의 준비가 국내에 갖춰져 있지 않았더라면 '신탁 통치 받아도 싸다', 우리가 이런 얘기를 들을 뻔했다.

미국이 한국에 신탁 통치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근거 중 하나로 내세운 게 뭐냐 하면 '한국은 자치 경험이 없지 않느냐. 그러니까 정치적 경험을 쌓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한 기간 동안 신탁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이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타율적으로 맞았다면 어떻게 됐겠나. (예컨대) 미군이 들어온 후에야 한국인이 치안 같은 걸 (담당)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됐다면 '한국은 신탁 통치를 받을 만큼 수준이 낮은 나라, 자치 능력이 없는 나라 아니냐', 이런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해방을 맞을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것을 선두에서 이끌어간 중심인물이 여운형이다.

프레시안 : 여운형은 언제부터 그걸 준비했나.

서중석 : 여운형은 1930년대 말경부터 일제가 위태로운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쿄를 오가며 국제 정세에 관한 정보 등을 모으면서 준비하고 있었다. 1941년 12월 진주만 작전이 있자마자 바로 해방을 맞을 준비를 해나간다.

1942년 YMCA에 있던 장권(YMCA 체육부 간사이자 유도부 사범)에게 '네가 앞으로 치안대를 조직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치안을 맡아야 한다'며 준비 작업을 하게 했다. 그에 더해 식량 문제를 담당할 사람을 찾아내고, 건국동맹을 조직하고, 또 농민들을 중심으로 농민동맹을 조직하고, 그러면서 교사 조직, 철도원 조직, 노동자 조직 등 여러 조직을 만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건국동맹을 통해 어떤 활동을 했나.

서중석 : 건국동맹은 전국에 지부를 조직했다. 해외에 있던 독립 운동 세력과도 연계를 시도했다. 제일 연락을 많이 한 데는 연안에 있던 조선독립동맹이었다. 그리고 임시정부하고 연락하려고 (건국동맹에서 파견한) 대표가 북경(베이징)까지 갔는데, 그때 일제가 패망한 걸 알았던 거다. (건국동맹 측은) 만주에 있던 독립 운동 세력들이 어디로 갔는지를 처음에는 몰랐다. 그래서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무장 세력도 조직했다. 또한 지하투쟁을 했던 공산주의 세력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도 다른 곳과는 연결이 잘 안되고 대개 여운형과 연결되는 걸 볼 수 있다.

이렇게 건국동맹을 중추로 여러 다른 조직 및 해외 독립 운동 세력과 연계하고, 무장 세력을 조직하는 작업을 하면서 8월 11일쯤이 되면 이만규에게 독립 선언서를 제작하게 했다. 일제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당시 단파 방송을 듣고 있었던 여운형을 비롯한 몇 사람은 (일본에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을 8월 10일 일제가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작업을 구체적으로 진행하면서 (지주·부르주아 세력을 대표하는) 송진우하고도 연락을 하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8월 14일 저녁,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사람이 여운형한테 와서 '내일 아침 일찍 엔도 정무총감이 만나자고 한다'고 한 거다. 그러니 여운형은 뭣 때문에 만나자고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치안 협조만 부탁하려 한 엔도 정무총감에게 여운형이 '아니다. 정치범 등을 석방하고, 치안은 우리 스스로 맡을 것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식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걸 통해 우리는 주체적으로 해방을 맞을 수 있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여운형과 건국동맹·건준의 활약, 그리고 꿈같이 맞은 해방

프레시안 : 다수의 일반 한국인들은 해방 소식을 어떻게 접했나.

서중석 : (대다수의) 일반 한국인들은 공출, 강제 동원, 징병 같은 걸로 무척 고초를 겪으면서도 '일제가 바로 망할 거다', 이런 생각까지는 못 했다. 일제가 망한다는 소문도 없지 않았지만, (일제가) 계속 승리하고 있다고 항상 선전(한 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일부 층에선 8월 15일 낮 12시에 중대 선언이 있다는 걸 알았다. 한국인 중에도 일제 관공리나 경찰이 여럿 있지 않았나. '천황이 중대 발표를 한다더라'는 소문을 들은 소수가 8월 15일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당시 전국적으로 조선인이 가지고 있었던 라디오 숫자가 적었다. 10만 대가 안 넘은 걸로 돼 있다. 거기다 대고 히로히토 천황이 상당히 떨리는 음성으로 소위 '종전 조칙'을 읽었다고 한다. 항복하면서 (전쟁을 끝낸다는 뜻의) '종전 조칙'이라고 한 것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어쨌건 그걸 떨리는 목소리로 읽었는데, 그때 또 라디오 감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전기 사정이 워낙 나쁘지 않았나. 그래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몰랐다고 한다. 천황이 아주 비통한 소리로 이야기하니까 무지무지하게 큰일이 일어난 모양이다, 이런 정도는 알겠는데 설마하니 완전히 망했다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경성부(오늘날 서울시) 관리를 한 사람의 증언을 들어보면, 갑자기 낮 12시에 떨리는 목소리가 나오는, 잘 들리지도 않는 그 방송을 듣던 일본인 관리들이 일제히 엎드리면서 통곡했다고 한다. '야, 이건 굉장히 중요한 것 아니냐. 망한 것 아냐?' 이런 생각을 했는데 귓속말로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항복했다고. 그렇게 알았다고 한다.

프레시안 : 일제 패망 소식이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알려지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는 말로 들린다.

서중석 : 일본이 패망했다는 것을 한국인들이 많이 알게 된 건 8월 16일이다. 이날 오후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이 세 차례에 걸쳐서 방송을 하면서다. 안재홍은 우리가 정부를 접수한 것처럼 하면서, 치안도 우리가 맡고 국군도 신설할 것이라는 점 등을 이야기했다. 그야말로 나라를 세우는 얘기를 쭉 했다. (사람들이) 일제가 패망했다는 걸 그 방송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게 된 거다.

그 말이 얼마나 빨리 퍼져 나갔겠나. 정말 꿈같이 맞은 해방 아닌가. 아주 뛸 듯이 기뻐하며, 꽹과리를 치면서 각지에서 풍악을 울리고 현수막 같은 걸 갖고 나오는 사진들이 대개 8월 16일, 17일 그때 찍힌 거다. 그렇게 감격스럽게 해방을 맞이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열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김덕련 기자,최하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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